용기를 낼 수 없다면 그저 걸어갈 뿐
지난달 부로 주말 시간을 틈틈이 이용하여 웹 개발을 배우는 일을 시작했다. 감사하게도 사이드 프로젝트로 진행하는 일에 참여하게 해 주신 분이 계셔서 비록 햇병아리 상태지만 이곳 저곳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경험을 쌓고 있다. 비전공자인 내가 따라가기엔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배울 수 있다는 기회 자체가 참으로 큰 것이라는 것을 이제 알 나이가 되었기에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갈 뿐이다.
지금 회사에서 일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딱 밥벌이만 할 뿐인 무색무취 씨는 왜 또다시 마음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됐을까.
몇 주 전, 또 다른 지인 한 분이 Layoff 를 당했다. 이 분과는 무언가 인연이 깊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당시 같은 회사의 선임 분이었고, 나이가 있으셨던 만큼 경력도 화려한 분이었다.
유학 및 해외취업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나던 해, 이 분 또한 미국에 오셨고 몇 년 뒤 내가 졸업하고 첫 직장을 구해 이주하기 전에도 역시 비슷한 처지로 우연히 만나뵈었던, 인생의 분기점을 비슷하게 공유해 왔던 분이다.
오십줄에 비록 Layoff 를 당하셨다고 하나, 그 분의 경력과 능력이라면 충분히 더 좋은 곳에 가실 수 있으시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분을 믿는 이유는, 수많은 인생의 역경과 돌발상황을 견뎌내시고 자신을 비워낸 그 분의 마음밭 때문일 것이다.
해외생활을 하며 외노자로 산다는 것은, 마음수양의 연속이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생활을 경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언어 구사에 문제가 없지 않는 이상,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조직 내에서 나의 한계는 정해져 있다. 익숙해지긴 했지만, 커리어 욕심이 큰 사람에게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민자 집단 사이에서의 관계 또한 마음수양을 필요로 한다. 알 수 없는 인생길에서, 별 다른 일 없이 순탄히 인생이 풀리는 사람들 그리고 제아무리 노력을 해도 인생길이 꼬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고, 출발점이 비슷했던 이민자 집단 내에서의 관계는 이러한 상황의 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많은 나이로 인해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후배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상사, 불완전한 의사 소통으로 인한 오해, 자라나는 아이들과 계속 늘어가는 요구들...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 모든 일들을 지금껏 묵묵히 견뎌 오셨던, 그 와중에서도 가진 것들에 감사하자고 말씀하시던 그 분의 마음밭은 얼마나 깊어졌던 것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아마도 이번 일로 그 분은 다시금 자신의 한계를 보게 되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한다. '주변 상황은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가치를 잃는다. 어느덧 오십줄이 되고 단물이 빠진 나는 지금 용도처분이 되고 있다.' 용기를 내라고 얘기하는 격려를 위한 격려의 말은 이 시점에서는 별로 와닿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의 나란 인간이 보기에는.
어차피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보통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를 받아들이며 걸어가는 것 뿐이다. 그 분은 그 분의 깊은 마음밭으로 현실을 감내하며 그저 버텨낼 것이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마음 속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올린 채 여기저기 일을 벌이며 하루를 살아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어릴 적 만화영화의 주인공처럼 역경을 넘어서 더 강해지는 멋진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저 이대로 끝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한계를 이미 알아버린 미생으로서 몸부림을 치며 오늘도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 분과 아직 연락할 수는 없다. 저 멀리서 조용히 앞으로의 인생길이 좀 더 순탄하게 펼쳐지기를 기원하며 머지 않은 시기에 반가운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