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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Oct 23. 2024

2024년 동서문학상 에세이부문 맥심상 수상했어요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올해 동서문학상에 소설 2편, 에세이 2편을 냈다. 소설은 기존에 써놨던 단편을 수정해서 제출했고, 에세이 1편은 제출 마감 코앞인 주말에 쓰고 수정해서 냈는데, 그렇게 급하게 써낸 에세이가 맥심상에 붙었다. 에세이 글감은 1년 전부터 머릿속에 있던 것인데, 급하게 쓰다 보니 A4 3장을 채우는 것도 나에겐 버거웠다. 나름으로는 잘 썼다고 생각하면서 응모했는데, 보내고 나서 글 선생님께 보여드리니 혹평(?)을 받았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뼈아픈 지적이었다. 그래서 큰 기대가 없었고, 발표일인 어제 퇴근하면서 생각나 찾아봤더니 역시 수상 명단에 없었다. 혹시나 하고 '맥심상'을 클릭했더니 참가상, 격려상이라고도 하는 맥심상 100명 중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2년 전에 처음 동서문학상에 에세이 1편을 보냈다가 고배를 마신 기억이 떠올랐다. 보통 여러 편을 보낸다고 하는데, 처음이고 낼만한 글이 없었다. 맥심상이라 아쉽기도 하지만, 좀 더 글쓰기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붓을 꺾지 않고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맥심상은 수상작품집에 수록되지 않으므로, 브런치 구독자님과 이웃들에게 이 글을 처음 공개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결혼하기 전만 해도 내 손은 작고 하얗고 고왔다. 희고 잡티 없는 손은 귀하게 자란 사람 같아서 볼 때마다 내심 기분이 좋았다. 사 남매의 막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을 것 같은 셋째 딸이지만, 가부장적인 종갓집에서 딸이란 존재는 환영받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가장 늦게 결혼한 딸로서 제사 때마다 엄마를 도와 전을 부쳐야 했고 평소에는 청소와 빨래 널기를 도왔다. 

  흰 실내화나 운동화를 솔로 빨아서 신는 것도 언제부턴가 나의 몫이 되었다. 건조기가 없었고 통돌이 세탁기가 고작인 학창 시절에는 신발을 빠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요즘 흔히 신는 고무 실내화와는 달리, 20세기에 신던 흰 실내화는 쉽게 때를 제거하기 어려웠다. 헌 칫솔이나 손잡이 달린 솔로 세탁비누를 듬뿍 찍어 빡빡 문지르고 여러 번 헹궈서 말려야 했다. 그런 수고를 하느니 차라리 더러운 실내화를 신고 싶었지만,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무서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틈틈이 집안일을 도왔지만 손은 한겨울에나 거칠어졌지, 다른 계절에는 여전히 희고 고왔다. 예쁜 손을 보면서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란 귀한 고명딸이 된 상상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얼마 전, 아홉 살짜리 학생이 내 손을 보며 말했다. 

  “우리 엄마 손은 예쁜데, 선생님 손은 할머니 손 같아요. 왜 이렇게 파란 줄이 올록볼록 튀어나왔어요?”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내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희고 고왔던 손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손등에는 자글자글 주름이 잡히고 파란 정맥이 기차처럼 불끈불끈 솟아있었다. 손가락 마디의 관절은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듯 툭툭 불거져 나왔고, 그 때문일까 가끔 통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군데군데 꺼멓게 보이는 기미는 저승꽃처럼 번졌고, 예전에 없었던 점도 하나둘 늘었다. 손바닥을 보면 손등처럼 까맣지는 않지만, 무수히 많았던 번뇌의 밤처럼 갈라진 손금이 세포 분열을 일으킨 것 같다.

  여름에는 선크림을 바르고 겨울에는 핸드크림을 바르며 보호했지만, 손은 세월의 티를 벗을 수 없었다. 시간이라는 마술이 스치고 간 손에는 더 이상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고, 고생과 봉사한 흔적만이 가득했다.  

   

 언젠가 아파서 누워계신 시어머니의 손이 눈에 들어온 적이 있다. 한평생 가족을 위해 농사짓고 손품을 팔면서 부지런히 일한 그 손은 거칠고 남자 손처럼 투박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손가락 관절이 굽어서 펴지지 않았던 모습이다. 마치 손안에 계란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어머니, 손가락이 왜 이래요?”

  “일을 많이 해서 그라제. 관절염 때문에 안 펴진다.”     


  남편의 어머니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로서 지켜본 시어머니의 손은 뭉클한 감동을 건넸다. 미의 희생으로 여자가 얻는 것은 자식의 안녕과 가정의 평안이었을까. 의식하지 않더라도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그 힘은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때로는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가족을 위해 밥하고 청소하고 하루 종일 일을 하면서도 힘들다고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는 시어머니. 남편은 제 어머니와 아내를 비교하며 그렇게 말했다. 비록 입으로는 툴툴거리긴 했으나, 나의 손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이십 년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나의 손은 밥을 짓고 두 명의 아기를 어르고 직장생활을 했다. 다림질은 못해도 옷을 세탁하여 말리고, 가계부를 쓰고 아이와 여행을 다녔다. 똑소리 나게 살림을 잘하진 못했지만, 아이들은 자랐고 아이를 키운 나의 손은 그만큼 늙어갔다.     


  시어머니의 손을 보며 친정어머니의 손을 떠올려 보지만, 이제 세상을 떠난 지 몇 해 지난 어머니의 손은 애석하게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직장생활은 하지 않으셨지만, 6명의 가족을 건사하느라 바쁘게 사셨다. 신선한 생물을 반찬으로 만들어주기 위해 다른 동네로 장을 보러 다니셨고, 젊을 때는 뜨개질로 아기 덮개를 만드는 부업도 하셨다. 어머니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여 나무 방망이를 두드려 걸레를 빨았고, 가스를 마셔 콜록거리면서도 연탄을 갈았다. 텔레비전이나 여성 잡지에서 본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는데, 철없던 우리는 반찬이 늘 비슷하다고 투덜댔다. 부드러운 카스텔라와 옥수수가 콩콩 박힌 도넛, 홈메이드 피자를 만들어 주시느라 엄마의 젖은 손은 마를 새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음식 맛이 안 난다며 간을 봐달라고 하실 때도 딸의 손이 흉내 내지 못할 만큼 찌개는 오묘한 맛이 났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진 어머니는 반지를 끼지 못하겠다고 빼놓고 다니셨고, 마디가 굵은 그 손으로 하트를 만들어 우리를 배웅하셨다.     


  시골 할머니의 손에는 샛노란 쌍가락지가 있었다. 시골의 하루는 아침 일찍 시작되었다. 할머니의 손은 새벽부터 바빴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할아버지가 계신 사랑방의 식어가는 아랫목을 데웠고 소 여물을 준비했다. 돌아서서 큰 가마솥에 밥을 짓고 시래기 된장찌개의 간을 봤다. 가마솥에 들어간 부드러운 계란찜이 익어갈 때쯤 식구들은 눈을 떴고, 할머니의 손과 발은 종종걸음을 쳤다. 불을 때지 않는 도장에서 산적 꼬치를 빼내고 구운 생선도 하나 빼 들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물린 상에 남아있는 음식을 우리 상에 올려주는 것도 할머니의 거친 손이다. 기관지가 약해 기침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손은 한 치 어긋남이 없이 정해진 일을 해냈다. 넓은 마당에 빨래를 널고 우물 두레박 안에 넣어둔 과일을 건져서 간식으로 내었다. 어디서 전해 들은 민간요법으로 손주들 비염을 고쳐주시려 애쓰기도 하셨다.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린 것이 언제였을까, 희미한 기억 속으로 따뜻한 손의 온기만이 남아있다.  

   

  식탁에 앉은 딸아이의 손을 만져보니, 예전의 내 손처럼 보들보들하다. 티 없이 순진무구한 아이의 손을 보니 새삼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이 고운 십 대의 손도 10년, 20년, 30년이 지나면 어떻게 변해 있을까? 아이가 살아갈 미래의 장면 속에서 손도 표정을 얻고 흔적을 남기겠지. 때로는 입가에 미소와 함께 머물 것이고 때로는 눈물을 닦아내기도 할 손. 그때 나의 손도 아이 옆에서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싶다.  

   

  주름진 손을 깨달았을 때 부끄러워 주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을 닮아가는 내 손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다. 세월이 준 훈장인, 나의 늙은 손이 자랑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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