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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Oct 28. 2022

사랑에는 형태가 없어

그래서 항상 모호한 거야 *을유문화사 도서 <그림의 이면>과 함께합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 없이 죽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태국문학인지라, 낯설고 경계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사랑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지구를 통틀어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어차피 전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책이다보니 나는 어느 순간 몰입해있었다. 번역체가 주는 딱딱함이 혹여나 소설을 읽는데 방해가 될까 겁이 났지만, 이것 또한 높은 지위와 고고하고 우아한 끼라띠의 품격을 드러내주는데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그들의 품격있는 사랑을 고백하기에도, 이를 감응하는데에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언어가 눈앞에서 그려질 것이다. 그러면 그 언어 너머에 있는 것들을 느끼면 된다. 그 너머의 것이, 이면의 것이 주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의 이면에 담긴 그들의 사랑이, 글 너머, 보이는 활자 너머, 보이지 않는 놉펀과 끼라띠의 총명한 눈에서 분명히 느껴질 것이다.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시작으로 나는 사랑이라는 무거운 감정의 무게에 짓눌려보고자 했다. 사랑은 항상 나에게 있어 알 수 없는 무언가였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무언가였다. 사랑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하기를 수없이 했지만, 종국에는 답이 없음을 시인하게 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고 답을 하는 작품을 만난 적도 있고, 사랑은 호르몬에 속아넘어간 인간의 생존본능이라고 답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늘 끌어당기던 것은 숭고한, 감정의 너머의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이었다. 사랑은 나에게 감정이라고 정의내리기에는 이를 초월한 하나의 상태였던 것이다. 

놉펀의 사랑이 너무 뜨겁다고 생각했다. 그 활활 타오르는 상태에 주변이 모두 아지랑이처럼 흐물거렸을 테고, 그래서 놉펀은 무엇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끼라띠의 사랑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놉펀이 모를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놉펀이 태국으로 돌아와 자신의 사랑이 멍청했음을 고백할 때, 그 고백을 듣는 끼라띠의 심정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과의 사랑을,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창피한 젊은 날의 치기어린 행동이었다고 정의내리는 것. 끼라띠는 그 말에 한없이 상처받았다가도 그렇게하여 놉펀이 다른 차원의 행복으로 접어들 수 있다면 채워졌을 것이다. 끼라띠는 놉펀을 추앙했다. 마지막에 끼라띠가 고백했던 끼라띠의 사랑은 꽉 차 있었음이 분명하다. 끼라띠는 받는 사랑, 주는 사랑, 주고 받는 사랑 따위에 관심 갖던 사람이 아니었음을 느낀다. 끼라띠는 그저 놉펀을 사랑했다. 그저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 자체로 자신과 놉펀 모두가 채워질 수 있게. 진심으로 응원하고, 행복을 바랐다. 사실 그런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던 지난날의 나였다면 이 소설이 퍽이나 재미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읽어냈던 마지막 문장의 깊이와 무게를 다시 돌아와 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추앙의 경험이다. 세상에는 대상 없이 관계만 남는 사랑이 있다. 다가가려는 것만으로도 타버리는 사랑이 있다. 직접 주지 못하더라도 내 품에서 채울 수 있는 사랑이 있다. 사랑을 정의하는 짓은 바보같은 짓이다. 무수히 많은 사랑의 형태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냥 사랑하면 되는 거였다. 

끼라띠와 놉펀은 사랑을 했다. 

다른 형태의, 다른 세기의. 서로에게 완전히 가닿지 않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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