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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 Sep 15. 2022

계절이 주는 특권

적어도 가을에는 외로움과 슬픔이 썩 고독하지 않습니다

차주부터는 기온이 확 내려가더라고요. 감기 조심하시고, 푹 가라앉아 가을을 즐기세요. 


벌써 9월도 반이 지났습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것의 연속일 것이라 예상되었던 학기인데, 그래서인지 더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덥니다. 정신없을 때 더 외로운 거 아시나요.




M은 단단한 사람이 좋다고 늘 말했다. 그 앞에 있는 상대는 누가 되었든 '단단한 사람?' 하며 되묻기 십상이었고. 가끔가다 그냥 응, 하는 사람, 더 가끔가다 이해했다며 고개 끄덕이는 사람. M은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을 보며 웃었다. 순간 울컥하며, 뭘 이해한 거냐고 다시 물어보고 싶었는데 묻지 않았다. 진짜 이해한 거 같은 표정이었다. J는 그런 친구였다. M은 그런 친구의 심연을 늘 바라보고 있었고. J는 그것에 감사했다.


M은 집에 돌아와서 단단한 사람이 뭔지 생각했다. 실은 저도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단단한 사람이 좋다는 말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실은 좋아하는 사람더러 단단하다고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M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 데 묶어 단단하다고 이야기하더라도, 이질감에 둥둥 떠다니는 인간들 뿐이었다. 아마 그들은 진짜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결론에 닿았다. 


S는 늘 젠틀했다. 다정해 보였다.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M은 다가갈 생각 없이 멀리서 바라만 보았지만, S를 단단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S는 M의 눈에 단단함을 잘 감추고 있음에도 굳건한 심지가 티 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S는 그랬다. 잘 상처받는 본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모든 흉짐을 품었다. 그럼에도 타인의 상처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단단함에 가깝다고 느꼈다. 


사람은 원래 자신의 감정에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데는 타인의 감정을 대할 때보다 더한 책임감과 때로는 고통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M에게도 가장 닿기 힘든 심연은 자신의 것이었다. 자신의 심연과 꾸준히 소통하는 듯한 S를 바라보며 M은 가벼움을 느꼈다. M은 가벼운 것이 싫다고 늘 이야기했지만, 다른 결의 가벼움이었다. 후련함. 날아갈 것만 같은 느낌. 나비. 풍선. S를 그렇게 이야기했다. 아주 가끔은 닮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M은 우울을 즐긴다. 특유의 센치함이 자신의 감수성을 지켜준다고 이야기했다. J는 동의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유지하려 하지 않아도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우울이 J에게 그리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J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진부하게도 정답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하며 울었다. J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버겁고, 사실은 자기 자신도 버겁고, 세상이 버거웠다. 그럼에도 사람과 함께하고픈 욕구로 잔잔히 채워진 자신을 바라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런 J에게 M은 남다른 존재였다. M을 통해서 자신의 심연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을 좋아했다. M이 늘어놓는,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만 같은 추상적이고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들을 J는 진심으로 꼭꼭 씹으며 들었다. M이 말하는 모든 문장에는 모순이 담겨 있었지만, J는 그 모순의 끝과 끝에서 느껴지는 괴리가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고 말했다. M은 모순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J는 모순의 존재로 자신을 속죄하는 사람이었다. 둘의 대화는 그렇게 완전히 모순적으로 온전했다. 듣는 사람과 말하는 사람의 완벽한 조화였다. 둘은 그 둘이 모두 되었다. M은 그래서 가을을 좋아했다. 자신이 가장 모순적일 수 있는 계절이라면서. J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M은 크게 놀라며 J를 이렇게 설득했다.  

'네가 그토록 힘겨워하던 우울이 당연해지는 계절이야. 너도 오늘부터는 일반인이라고.'


'언제부터 가을인데?' 

S가 물었다. M은 고민했다. 대충 지는 해가 아름답고 멀어져 가는 초록빛이 그리워지면, 그 때로부터 보름 이내로 가을이 오겠거니, 하라고 했다. 그럼 지금은 한창 가을이겠다. 영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K와 Y는 참 상극이었다. K는 듣는 사람에 가까웠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었다. Y는 듣는 귀가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Y의 이야기는 M에게 늘 휘발성 있는 이야기로 다가왔지만, K는 그런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K는 깊고 깊은 사람이라, 본연의 K를 마주하려면 깊고 깊게 들어가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K는 항상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물리적인 이야기도 포함. Y가 보기에 그녀는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었다. Y는 K와 이야기할 때마다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의문을 가지는 관계성이었지만, Y는 자신의 가벼움을 K의 무거움을 통해 중화시켰다. K는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을이 외로운 계절이라 더 아프니까, 가을이 영영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고 Y가 K를 이야기할 때, K는 드디어 입을 열였다. 

'여름은 숨을 쉬기가 힘들어. 가을이 좋다.'


M은 Y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나 놀랐다. K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K는 생각보다 더 깊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아파하는 사람이구나. K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위로할 수 없었다. 위로하는 행위가 아파하는 사람에게 응당 행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아픔이 부정적으로 다가가는 사람이 있겠지만, M과 K가 늘 나누던 대화 속에서 가을의 고독과 외로움, 아픔, 슬픔, 연약함은 이상향에 가까웠다. 그들의 삶이 그들의 삶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연약하기 때문이었음을.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상태에 감사하고 원통해하며 살았다. 


M이 꺼낸 말은 위로가 아니었다. 

'세상에 내보인 살갗이 남들보다 조금 많은 것뿐이야. 그래서 세상에 더 많은 부분을 데이며 사는 것뿐이야. 대신 우리는 세상을 더 넓은 면적으로 느낄 수 있어. 우리가 느끼는 면적에 포함되는 사람이 많아. 그래서 우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치유될 거야. 재물로 쓰이는 삶이 싫으면 신을 원망하던가.'


K는 한참을 울었다. 햇살같이 울었다. J는 자신의 우울이 위로받아 마땅한 것이라 여겼지만, 막상 위로를 받을 자세는 아니었다. 당신의 상처를 좀 보자며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공격적이었다. J는 K가 우는 걸 보며 생각했다. 결국 위로는 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발견하는 거였다. 




고독, 외로움, 모순...

따위의 무거움과 마주하며 자신의 심연을 만날 수 있는 분기가 되길 바라며 글을 적습니다. 

연약한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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