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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QP Mar 07. 2024

퍼펙트 데이즈 - 인물화라기보단 풍경화를

   여느 날처럼 극장에 내다 걸린 상영작들을 스윽 훑어보다가 이 영화의 이름을 발견했을 때, 그리곤 자그마한 노력으로 그것이 빔 벤더스의 신작임을 알게 되고, 자연히 아직 비어있는 좌석을 찾아 극장 안을 들어갔다 나왔을 때, 거장의 이름값은 배반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난 수개월 동안 맛보지 못했던 감각,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감상을 글로 써야겠다는 이 기쁨이 내게 전혀 생소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주 만나 뵈는 익숙함은 또 아니었다. 그토록 반가운 감정에 그리고 그것을 말로써 적어낼 기대감에 눈으로는 줄곧 스크린을 응시하는 내 머릿속이 어느새부터인가 영화 이외의 다른 이유로 복잡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두 시간가량이나 나를 맘편히 내맡길 수 있었던, 즉 드물게도 몰두하게끔 한, 대단한 흡인력의 작품이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빛과 소리의 인상은 무엇이었는가. 이를 말하기에 앞서 최초로 나를 매혹했던 그 요소들이 영화의 중반부가 지나며 조금씩 흐려졌음을, 그리고 영화가 자기 본래의 색을 잃는 정도와 비례하여 나의 관심은 실제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보다도 되려 영화의 전반부를 감상한 후 일종의 개념으로 새롭게 구성된 영화의 이상에만 차차로 집중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 따라서 지금 글을 적고 있는 나에게도 더없이 분명한 점은 후술할 영화에 대한 감상이 그것의 모든 면면에 잘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내가 느낀 감격은 영화의 전반부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나아가 객관적인 대상으로서 <퍼펙트 데이즈>에 관한 일반적인 서술을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감상이란 원래가 다 그렇지 않은가. 


   <퍼펙트 데이즈>는, 또는 당시 영화관에 앉아 있던 내가 이상화한 대상 <퍼펙트 데이즈>는 독특한 경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인물화라기보다는 정물화를, 그보다는 차라리 풍경화를 닮아 있고,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소설보다는 시에 상응하는 영화였다. 보통의 영화들과는 달리 그것은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온 누구라도 그 줄거리를 요약할 수 있을까? 외려 줄거리를 억지로 읊는 것은 여기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이 점은 간단한 상상력의 작용으로 쉽사리 입증되는데, 예컨대 이 영화를 이루는 여럿 에피소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할지언정 전체로서 작품이 가지는 예술적 가치에는 거의 조금도 변동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획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시간축을 따라 흩뿌려진 사건들의 전개가 아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조직하는 전반의 구조이기 때문에, 마치 인물화나 정물화에서처럼 배경에서 삐져나와 돌출한 명백히 분리된 대상 - 인물이나 사건, 줄거리 등 - 은 존재하지 않고, 잘 쓰인 시에서 모든 행이 동등하게 아름다운 것과 같이 매 장면 매 시퀀스가 동등한 가치를 가지므로 각각을 이를테면 배경과 피사체란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체의 조망에서 가지는 중요도에 따라 비교할 수 없다. 이 같은 구성의 효과로서 역설적으로, 예술성은 작품의 일부가 아니라 총체성을 관조할 때에 온전히 발견되지만 그 세부적인 부분들에 동질적으로 퍼져 있어 영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분할하더라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단편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잘 고안된 구조가 단지 예술성의 뼈대라면 그것을 채워내는 살결은 영화 속 설정이란 구체성이다. 감독은 여기 선연한 색채를 칠하는 과정에서도 탁월함을 잃지 않았다. 먼저 작중 배경이 되는 공간으로서 도쿄 : 얼핏 보면 무채색의 시가지뿐이지만 가까이 보았을 땐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양각색 공중화장실의 종류만큼이나 아기자기한 섬세한 다양성의 도시; 그러면서 그 다채로운 빛깔에도 불구하고 한 발짝 멀리서 되돌아보았을 땐 단조로운 일상만을 되풀이하는 대도시 도쿄는 영화의 구성이 지향하는 바와 완벽하리만치 멋들어지게 어울렸다. 반복이란 통일성에 감춘 소박한 다양성의 활력, 감독은 도쿄라는 도시의 미학(아마 세계의 어느 도시라도 공유할 그것)을 정말로 아름답게 담아냈다. 다음으로 영화의 표면상 주인공으로서 화장실 청소부 : 그러한 직업 자체가 암시하는 바, 그의 "인물성"이 느닷없이 강조되는 후반부를 차치하면 그는 영화 속의 주인공, 즉 주요 인물이라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영화 전체의 구조를 형성하고 지탱하는 뼈대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그 자신과 그가 겪는/또는 속해있는 일화들은 본래 의미에서의 "인물"이나 "사건"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은 다만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도쿄의 여러 얼굴을 내보이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그 얼굴들에는 물론 도로, 주택, 공중화장실, 목욕탕, 노점, 사진관, 서점, 그의 동료 청소부를 포함하여 스치듯이 등장했다 곧이어 퇴장하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두에 응집력을 제공하고 하나의 구심점으로 작용하는 과묵한 청소부와 그의 일상이 있다. 영화 속 나열되는 장면들이 자칫 무절제하게 흐트러진 인상을 주지 않도록 자기 자신이란 통일성을 부여하는 주인공의 역할이 대중의 시선에는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도시 청결의 유지란 항상성을 위해 불가결한 화장실 청소부의 그것과 닮은 것이 설사 우연일까.


   이처럼 높은 수준의 구조적 안정성을 희생했기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 다다라선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독특한 컨셉을 끝까지 가져가기엔 싫증이 난 것일까? 일반적인 영화였더라면 더욱 흥미로웠을 "사건"들이 전개되고 화면 속의 인물이 비로소 "인물"로서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 영화가 다소간 진부하게 느껴진 것은 감독이 뚝심 있게 유지하던 고집을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놓아버린 탓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가 막을 내리기 직전, 여느 아침처럼 차를 몰고 출근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카메라가 담아내는 방식(얼굴을 클로즈업), 그것은 영화의 앞쪽 절반만을 본 관객의 입장에선 결코 예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비록 그 장면에 딱 붙여 빔 벤더스의 팬이라면 너무나도 익숙할, 운전 중 도로를 촬영한 장면과 하늘에서 바라본 도쿄의 원경을 덮어씌우기는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인상을 지우기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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