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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Feb 01. 2023

결과론적인 삶에 대하여 #2.

  정신없이 업무에 푹 빠져있을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두 번째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 먹은 날, 공교롭게도 지난번 시험 점수가 나왔다. 평소같으면 침을 꿀꺽 삼키고 결과를 열어봤을텐데, 그럴 정신이 없어 얼른 열어보고 희비를 느낄 새도 없이 업무로 돌아가야 했다. 퇴근길에서야 차가운 가로등 아래를 걸으며 점수에 대해 곱씹을 수 있었다. 기대해지 않았던 만큼 실망도 없었지만 그건 점수도 마찬가지. 언어 실력이라는 건 쉽사리 오르거나 내려가지 않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얼마 전, 아파트 바로 앞에 주상복합 단지가 들어서고 카페든 음식점이든 자연스럽게 하나 둘 씩 생겨나 더이상 버스를 타거나 한참 걸어야 하는 수고를 덜수 있게 되었다. 예전과 다르게, 이제는 조용한 곳에 오래 앉아 진득하게 어떤 일이든 몰두하는 것이 어째서인지 어려워, 독서도 공부도 도서관보다 카페에서 하는 걸 선호하게 되어버렸다. 이런 내게는 집 앞의 카페는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로 나가는 때보다 옷차림도 마음가짐도 한결 편하게, 커다란 에코백에 노트북과 책 몇 권, 항상 들고다니는 공책과 필기구를 챙겨 한적한 구석자리에 앉아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해진다.

  결과론에 대해 이야기 했던가, 얼마 전에 지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꽤나 많은 사람들이 결과론과 운명론을 비슷한, 내지는 같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에 조금 놀랐었다. 어째서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는 것이 같다고 말하는 걸까. 운명은 결과라기 보다는 현상이고, 실패는 쌓아온 과정의 업보일텐데도, 어째서 과정은 본인의 공이고 결과는 운명의 탓이라고 말하는 걸까.

  주말 새벽──, 빗방울 소리에 눈이 뜨여, 밖을 보니 마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잿빛 구름 뒤의 희끄무레한 윤곽만으로 알수 있을 정도로, 힘 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그날따라 측은해 보였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잠깐 빗방울이 주춤하는 사이에 얇은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채로 카페로 향했다. 커피 주문을 마치고 창가자리에 앉자마자 폭풍우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되고 있는 참이었다. 금요일 저녁에 들었던 일기예보에는 주말엔 일부 소나기가 오는 지역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이건 소나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격렬하지 않나. 밖은 습윤한 비 냄새가 자욱해서 도저히 가을이 왔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문득 여름 언젠가의 수박이 그리워졌던 평범한 주말의 아침.

  결과론에 대해 나는 어느 쪽이냐고 하면──, 확실히 말해서 결과론적인 성향에 상당히 기울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과정보다는 결과에 상당히, 아니 거의 전적으로 무게를 두는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결과없는 과정은 시간낭비. 어느정도 결과가 있는 과정은 결과 만큼의 가치가 있으니,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과정을 덧붙여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순간, 변명이든 자랑이든 둘 중 어느 한 쪽이 되어버리고 만다.

  얼마 전에 모인 동창들의 모임에서, '이제는 중간정산'이라는 모임의 테마가 초대 메세지의 제목이었으나, 십수년 전의 준비쟁이는 여전히 준비쟁이였고, 당시의 우등생은 여전히 우등생이었다. 학생 시절에 매달 지겹도록 받았던 성적표의 순위에서, 인생사 새옹지마라거나 개천에서 용났다고 할만한 변동은 없었다. 최종 결과는 아니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에 대한 결과는 명확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성적순이 아닌 건 행복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모임은 이제 교복을 입고 옹기종기 모여 최신 게임과 전자기기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때와는 다르게, 삼삼오오 모여, 한쪽에서는 집과 차, 그리고 가정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또다른 한쪽에서는 직장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리게 된다.
  내년이면 서른. 어느 쪽이든 이야기에 잠깐만 귀를 기울이면 시기적으로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들에 한해서 만큼은 모두 같다는 걸 간단히 알 수 있는 자리였다. 동시에 결국 이 고민들도 '결과'만이 남게 될 것이라고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에 출발선에 섰던 건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는 수년 내로 다음 과제로 넘어갈 것이며, 누구는 지금처럼 십수년이 지나도 제자리에서 준비만 하고 있을 것이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글쎄──, 나는 어떤 걸까.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건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건 과연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던 일들이었을까. 카페 창문에 툭툭 빗금을 치는 무수한 빗방울 만큼이나 많은 생각과 반성들이 스쳐지나갔다.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는 진한 커피와 책을 옆에 두고, 턱을 괸 채로 창 밖을 한참동안이나 보고 있었다.
   과정의 결과로, 흔한 회사원으로, 취미로 가끔씩 별을 보러 다니고, 때때로 읽고 쓰는 평범한 모습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땐, 그럴만한 과정의 결과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상의 무슨 대단한 결과를 바랐던 건 아니지만, 이정도면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을 정도도 아닌 애매한 결과.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러고보면, 결과에 초점을 맞춘다는 건, 생각보다 큰 단점이 있는데, 그 중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조급함인 것 같다. 결과를 판단하기에 핵심적인 두 가지는 역시 달성 여부와 소요기간, 달성 여부에는 세부적으로 어느정도 수준으로 달성했는지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데, 그건 꽤나 스스로에게 압박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본인이 스스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이런 류의 사람들은 보통 결과가 좋지 않은 걸, 과정에서 결코 위로받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빨리 여기서 실패라는 마침표를 찍고, 조금 더 기한을 연장해 결과의 질을 끌어올릴 것인지, 실패로 손해본 시간과 쓸데없는 노력의 눈덩이를 좀더 크게 부풀릴 것인지, 그 결정만이 남았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스스로의 한계를 어느 정도 선에서 인정하고 타협할지의 문제. 확실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렇게 긴 고민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느덧 8월이 지나고──, 먼 옛날의 기억 속에 방학도 이쯤이면 끝났겠지만, 돌아보니 유난스럽게 올 여름의 수확이 적었던 것이 역시나 마음에 걸린다. 커다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돌아보니 절반이 수포로 돌아가 있었다. 절반이라도 건진 게 다행이라는 자기기만을 떠올리는 스스로가 안쓰러워졌다.

... 결과적으로 그런 여름이었다.
2017년의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여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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