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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Oct 27. 2022

결과론적인 삶에 대하여 #1.

  어느 순간부터 저녁에 창문을 열어놓는 것만으로도 선선하고 건조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라는 걸 실감하는 요즘. 문득 학원에서 강의를 듣다가 창 밖을 보니, 커다란 전광판 시계 시침은 어느 덧 여덟 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근처의 수제 맥주가 유명한 펍으로 향했다. 분주하게 걸음을 재촉하던 중, 문득 수제 맥주가 유명하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렴 어때, 시원한 맥주 한 잔 이면 수제든 양산이든 알게 뭐람' 마음 속으로 생각하며 더위와 갈증을 달래기 위해 휴대폰에 표시된 위치를 보고 두리번 거리며 이리저리 헤매었다.


  크고 무거운 잔에 맥주를 몇 번씩이나 리필해 마시고 대화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쯤, 화제는 점점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지하주차장을 누비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잊을 수 없는 누구의 생일파티 에피소드까지.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하고서야 깨달았다.

어린 시절에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몇가지 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의미있는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걸. 그렇다고 그 시절이 전혀 쓸모없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어찌되었든 그 시절에 수많은 웃픈 일들이 있었고 지금 다시 상기했을 때, 내면 밖에서의 일들은 안주거리 정도로 밖에 쓸모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대조군이 되어있었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의미있었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했던 것이 산더미였고, 거의 대부분 아직 늦은 것도 아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가지 중요했던 건 이미 늦어버렸다. 그 이야기가 나온 건, 더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의 과거의 끝에서, 고무줄처럼 화제가 다시 현재로 되돌아왔을 때였다.

 

  '때때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그 곳으로. 사람은 금방 처음을 잃어버리고 마니까.' 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조연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한 마디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원점이라는 게 정말 콕 찝어 말하기엔 너무 모호하다는 것도.

  아무튼 이따금씩 소설을 읽다보면 작중 인물과 꽤나 닮아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닮아가는 건지, 아니면 닮은 혹은 닮고 싶은 인물을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을 만들어 내는 소설이야말로 강력하다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작품이 아닐까. 읽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내면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인상적인 장면이나 인물을 새겨 놓고는, 한동안 눈치채지 못하다가 본인의 글을 쓰는 순간 발견하게 되는 선명한 흔적. 그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지난 달부터 잠깐 한가해진 틈에, 응시할 수 있는 시험은 일단 죄다 신청 해놓고,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바로 옆에서 공부에 몰두하고 있는 학생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만족스러운 시험은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험장을 나오며 가장 가까운 다음 시험을 신청하고 맘 편히 걸어 나왔다. 한 번으로 안되면 두 번 하면 된다. 예전보다 딱 한 가지 나아진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니까, 부담없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얼마든지 만족할 때까지 해주지, 다짐하면서.

  친구를 만나기로 한 명동 거리의 어느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시험 본 직후이니 일단은 시험 이야기. "열심히 하는게 뭐가 중요해. 결과가 좋아야지. 점수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결국 노력이라는 건 나온 점수만큼의 노력이라는 거잖아." 정곡을 찔리고 나서 "그야 그렇지."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건 결과로 말할 수 있는 것. 뚜렷한 결과 없는 계획과 과정만큼 무의미한 것도 없다. 그럼 과연 과정이라는 건 이야기 할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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