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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색하늘 Oct 12. 2022

우산에 대하여

  금요일 오후 늦게, 조금씩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사무실이 텅텅 비어 있었다. 글쎄 유난히 고요한 정적 속에서 으슬으슬하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잠깐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바람직하게도 어느새 하나 둘씩 집에 가버린 후였다. 반대로 그저께 출장에서 복귀해 밀린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홀로 남아있게 된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져, 일회용 종이컵에 커피를 가득 담아온 후부터 느긋하게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아홉시쯤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나오니 밖에는 잿빛 구름이 물 샐 틈없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이 시간에는 보통 완전한 감색으로 어두워야 할 밤하늘에 회색 구름이 가득하다 보니, 평소보다 조금 밝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우산은 챙겨 나왔다. 실은 하늘이 이럴 거 라고는 전혀 모른 채로, 단지 자리에 우산이 세 개나 있어서 하나 정도는 집으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뭐, 세 개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하고는 스스로의 덤벙거림을 관대하게 납득했다.

  평소에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오전에 가져간 우산을 퇴근하며 도로 가져온다는 걸 잊어버리거나, 혹은 출근 길에만 비가 오는 경우가 있어 그대로 회사에 우산을 놔두고 홀가분하게 돌아오는 걸 몇 번인가 반복하다 보니 자리에 우산이 서너 개가 쌓여 있게된 것이었다.

  자리에 있는 세 개의 우산 중에 두 개를 가져갈지 한 개를 가져갈지 고민을 하다가 문득 예전에 동기가, "자리에 우산 두 개 쯤은 남겨두는게 좋지 않을까? 혹시 드라마처럼 우산 하나를 빌려주면서 운명을 만날지도 모르고" 라고 했던 말이 신경쓰여, 결국 우산 하나만 챙겨나왔다.

  뭐, 다시 생각해보니 저런 멜로드라마같은 상황은 절대로 일어날 수가 없는 게──, 사내에는 우산이 건물 입구마다 수십개씩 넉넉히 배치되어 있고 심지어 퇴근 버스도 자주 있으니까. 두 개를 가지고 나왔어야 했는데, 하고는 실소를 지었다.


  우산이라 하니, 생각해보면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애매한 하늘에 우산을 챙기지 않은 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길에 비가 쏟아졌다. 어릴 적에는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비싸게 사는 것보다는 조금쯤 비를 맞는다고 해도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해서 거리낌없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었다. 우산을 빌린다는 선택도 있었지만, 뭐랄까──, 상식적으로 우산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도 하고(지금의 나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지만) 한 우산 아래 둘이 들어간다는 것도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좋게 포장하면 그렇고, 실은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게 너무나도 싫었다. 어쩔 수 없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는 일처럼 타인에게 쉽게 부탁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일기예보에서 아무리 비가 오지 않는다고 떠들어도 하늘을 보고 불안한 날이면 마음 속으로 기우제를 지내면서 일단 우산을 챙겨 갔다. 그리고 그런 날은 대체로 허무하게 먹구름이 풀려버려, 돌아올 즈음에는 맑은 하늘 아래 햇살이 약오를 만큼 따뜻했다.


  어느새 회사 중앙문을 지나며, 머리 위에서 형형색색 빛나는 네온 불빛이 유난히 더 번져 보이는 듯 했다. 잠깐 우산을 접었다가 펼치며 가만히 보니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것 중에서도 참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고 할까──. 가느다란 여덟 개의 우산살에 마디마다 정교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절같은 힌지도, 팽팽하게 펼쳐져 빗방울을 경쾌하게 튕겨내는 감색 나일론도, 버튼 하나로 착착 거침없이 펼쳐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말 그대로 특별한 약속 없는 ‘불금’에, 퇴근하고 곧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것도 뭔가 아까운 기분이 들어, 금방 버스에서 내려 대로변의 근처 카페에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2층 창가에 앉아 얼음을 동동 띄운 커피를 마시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말 다양한 우산들이 거리 위로 지나갔다. 마치 핀볼 사탕 자판기에서 온갖 색깔의 사탕들이 빙글빙글 돌며 투명한 튜브 사이로 오락가락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보고 있자면, 이유없이 그리운 느낌이 들어 멍하니 계속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우산을 접기 시작했다.


... 이윽고 비가 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런 부분은 운이라는 게 있는 걸까, 아니면 날씨를 관장하는 신이 내게 저주 같은 걸 내린 건 아닐까.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지. 시간은 벌써 한밤중으로, 다음 날로 넘어가려고 할 때쯤, 먹구름 사이로 희끄무레한 달빛 아래 우산을 접고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

  아아──, 날씨라는 건 요컨대 동전던지기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동전의 앞뒤를 맞추는 게임에는 거의 이겨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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