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직하지 않고 상냥하지도 않은 2023년 여름 시즌 최고의 걸작
아리 애스터의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2023)’는 보(Beau)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어머니 장례식에 가는 여정을 다룬다. 영화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의 모티브며 구성을 큰 틀에서 차용한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들은 현실 세계에선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이다. 지옥에서 온 슬랩스틱을 방불케 하는 사건의 연속은 작정하고 관객들을 당황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멀쩡해 보이는 노신사가 말을 걸길래 얼떨결에 대화를 시작했는데 3분 정도 지날 때쯤 그가 중증 조현병 환자라는 걸 슬금슬금 깨닫기 시작할 때의 당황스러움이랄까. 이쯤 되면 불친절을 넘어서 난폭한 지경이다.
하지만 영화는 관객과의 공감을 다른 지점에서 교묘하게 구축한다. 먼저 큰 틀의 구조가 주는 주인공의 목적이 명확하고 단순하다는 점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건 오디세이다. 주인공이 온갖 고난을 겪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과 재회를 하는 영웅담이다. 그러나 보(Beau)가 겪는 시련들은 기본적으로는 다양한 공포증의 현실화다. 첫 장면에 나오는 분만실에서 아기를 바닥에 떨구는 공포, 길거리에서 미친 사람이 갑자기 자기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문을 잠그지 않으면 온갖 부랑자들이 집을 쑥대밭을 만들 것이라는 공포, 누군가 자기를 언제나 감시한다는 공포, 10대 아이들은 이유도 없이 자신을 변태로 몰아붙일 것이라는 공포, 가족을 구성해 봤자 천재지변이 일어나 풍비박산날 꺼라는 공포, 섹스를 오래 안 하면 정액이 고환에 꽉 차서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등등. 우리가 살면서 심약한 순간에 한 번쯤 머릿속에 찾아와 2초 이상 머물다 갔을 법한 근거 없는 공포들. 보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공포가 현실화되는 곳이다. 벌어질 법한 일은 언젠간 벌어진다는 머피의 법칙이 너무도 분별없이 실현되는 이 악몽 속에서 그 모든 비이성적 괴담들은 오디세이 속 재앙처럼 주인공의 귀향을 방해한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열심히 귀향의 여정을 하는 동안 그의 아내 페넬로페는 수많은 구혼자들에게 시달린다. 그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그녀가 내놓은 시험은 바로 오디세우스가 쓰던 (보통 사람은 당기기도 힘든) 강궁을 쏘아 진자처럼 좌우로 흔들리는 12개의 도끼머리의 자루 구멍을 통과시켜 과녁을 맞히는 것. 남자가 강력한 도구를 사용해 구멍에 넣는다는 것은 명백한 성행위를 암시하는 상징이다. 자기 자리를 되찾기 위해 영웅은 자신의 남성성이 여전히 강고하다는 걸 보여줘야만 한다. 고향에 도착한 보를 기다리고 있던 것도 이런 식의 서사적 성행위다. 복상사가 집안 내력일지도 모른다고 세뇌된 보에게는 섹스 자체가 목숨을 건 의식이자 시련이다. 그는 그 공포를 극복하고 팽팽하게 부풀어있던 고환의 모든 것을 영웅적으로 쏟아낸다. 그것은 그가 유일하게 보여준 주인공다운 업적이다. 그러나 보상으로 주어진 건 승리의 영광이 아닌 악몽의 심화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질 나쁜 농담과 극도로 진한 비극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파국이다. 신경정신과 교과서에 열거되었을 법한 다양한 종류의 전형적 가족 트라우마들이 주인공 위로 산사태처럼 떨어진다. 설핏한 해방감을 비추던 어머니 부고는 거짓으로 밝혀지고 어머니가 거세하고 감금해 놓은 아버지의 남성성은 그 포악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 남성성은 껍데기만 남았음에도 보가 경험하는 실존적 공포(부이 나이프 들고 쫓아오는 미친 군인)따위는 한 방에 보낼 정도의 존재감을 보인다. 이로 인해 보가 그때까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자립에 대한 의지는 철저하게 꺾인다. 그리고 벌어지는 보에 대한 재판.
알란 파커와 핑크플로이드(로저 워터스)가 공동으로 작업한 ‘더 월’의 마지막 부분에도 비슷한 재판 장면이 등장한다.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과보호로 인해 주인공이 정신적 문제를 겪는다는 배경도 동일하다. 자신이 박해받는다 착각하는 콤플렉스를 직사적으로 재현한 재판이란 모티브는 우울증에서 조현병에 이르는 다양한 정신질환에서 관찰되는 심상이기도 하다. 알란 파커 영화 속 엉덩이 판사는 주인공을 둘러싼 벽을 무너뜨리라는 난폭하긴해도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품은 판결을 내리지만 아리 애스터 영화에선 그저 자아의 소멸만이 기다린다. 보가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석은 커다란 연못에 떠있는 작은 보트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인공 호수 위, 한 뼘의 안식을 주는 공간이라는 대비는 공포로 가득한 세상 속 그의 초라한 아파트의 은유다. 그의 죄명은 자립을 꿈꿨다는 것. 그 벌로 보트 째로 접히고 찌그러져 물 밑으로 가라앉아버린다. 정신적 사형선고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믿을 수 없는 화자’ 중 ‘광인’이라는 기법을 쓴다. 대체로 주인공을 믿는 독자의 특성을 악용하는 기법으로 대체로 알고 보니 화자는 미친 사람이었다는 트릭이다. 척 폴라닉이 쓴 ‘파이트 클럽’의 경우 화자이자 주인공이 ‘타일러 더든’이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에게 휘둘려 미국 자본주의 체제 전복 시도라는 어마어마한 일에 말려드는데 사실 더든은 주인공의 다른 인격이었다는 것이 반전이다. 둘을 별개의 인물이라고 여긴 화자의 시각을 독자가 믿기 때문에 성립하는 트릭이다.
이와는 달리 화자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교적 초반부터 밝히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루쉰의 ‘광인일기’는 자신을 뺀 모든 사람들이 식인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느 피해 망상증 환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일인칭 소설이다. 혹시나 독자들이 진짜 식인귀 사이에 사는 사람을 다룬 공포물로 착각할지도 모르는 걸 방지하기 위해 도입 부분에 액자 형식으로 이 소설의 내용은 의학 발전을 위해 공개하는 ‘미친 사람의 일기’라고 명시하는 친절함도 잊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경우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든 화자의 ‘신뢰할 수 없음’을 밝히는 부분이 들어가는 게 주요한 특징이다. 앞의 예시 이외에도, 영화 ‘조커(2019)’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과 이웃 소피의 행복한 한 때와 실제 벌어진 일을 대비시켜 보여주는 연출이 그 좋은 예다. 그러나 아리 애스터의 영화는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이 미쳐서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대놓고 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런 일이었다는 설명도 없고 갑자기 주인공의 인식 밖으로 나가는 액자식 연출도 없다. 영화 시작 전에 배급사, 제작사 로고들 사이에 섞여 등장하는 주인공의 엄마, 모나 와서맨 회사의 엠블렘 MW만이 주인공의 인생처럼 이 영화도 철저히 그녀의 영향 아래 있음을 암시하는 유일한 장치다.
어디서부터가 환상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사건인지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를 비웃 듯 영화는 시종일관 폭력적인 속도와 예측불허의 전개로 질주한다. 사실성을 의도적으로 포기한 이런 난폭한 스토리 텔링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절망과 공포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며 진실되게 다가온다. 아리 애스터는 비이성적 환상의 연속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와 보편적 트라우마라는 동질감 느껴지는 요소들을 솜씨 좋게 섞어준다. 화면에 펼쳐지는 상황이 때로 불편할 수는 있지만 단 한순간도 늘어지는 부분 하나 없이 끝나는 순간까지 흥미진진하다. ‘믿을 수 없는 화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아주 참신한 영화 작법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찾는 관객에겐 무척이나 반가운 작품이다. 그러나 나름 원하는 걸 정해놓고 객석에 앉는 관객에겐 중간에 박차고 나가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경험일지 모른다. 영화사들은 옛날 영화를 흉내 내 만들고 관객들은 그 친숙함에 불필요할 정도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일이 반복되는 이 시절에 정말 단비와도 같다. 파격과 품격을 동시에 갖춘 이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비극에 마음이 부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