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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극작가J May 30. 2024

세 번째 회사에서 정신병원을 가다 2

버틸 필요 없는 놈이 이긴다.


팀장님의 신사업팀 이동 제안에 고민이 됐던 건 사실이다. 그러다 ‘어차피 한 달 만에 퇴사한다고 지른 마당에, 옮긴 팀도 안 맞으면 부적응자 취급받고 진짜 퇴사해 버리지 뭐‘ 하는 마음으로 수용했다. 그렇게 그 제안에 응한 게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마케터J에서 기획자J가 되었고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옮긴 직무와 팀은 더할 나위 없이 잘 맞았고, 연봉이 크게 올랐으며, 날 괴롭히던 이들은 모두 불명예스럽게 퇴사했다.


이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하루도 참을 필요가 없다는 것. 버틸 각오를 다른 곳에 쓰면 ‘버틸 필요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는 것.




올해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잡은 겁니다.


옮겨 간 신사업팀은 업무 특성상 자유와 책임이 동시에 주어졌다. 서로의 일은 온전히 믿고 맡긴 채 자신의 할 일에만 충실한 분위기였다.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신사업에는 좋은 레퍼런스탄탄한 자본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나는, 사무실을 벗어나 제휴처를 찾아다님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금들을 모두 따냈다. 신사업에 속도가 붙자, 사내에서도 평판이 좋게 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표님이 나를 불렀다.


- 사실 기획자J님이 한 달 만에 나간다고 했을 때, 잡는 게 맞는지 고민했어요. 옮긴 팀이라고 적응을 잘할까 싶었거든요.


- 대표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요.


- 그런데 요즘은 그때 기획자J님을 안 잡았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져요. 다른 사람들도 저한테 종종 그러더라고요. 잘 적응해 줘서, 그 이상의 것을 해 줘서 너무 고맙습니다. 올해 대표로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은 당신을 잡은 겁니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고 나갈 뻔했던 곳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더 기뻤다. 마치 한 달 만에 뛰쳐나간다고 했던 게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때 왜 그만둔다고 했어요?


대표님과의 면담이 있고 얼마 후, 이번엔 인사팀장님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당시 퇴사하려던 이유를 다시 물었다. 불필요한 논란에 휘말리기 싫어 업무 때문이라는 핑계를 댔었는데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된 듯했다.


- 솔직하게 말해줘요. 사람 때문이었어요?


내가 사라진 후 그 팀의 상황은 이랬다.


단체로 구워삶기 좋았던 내가 사라지자 지옥의 피드백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향했다. 그들에게 피드백이란 업무적 우위를 점하는 수단이자, ‘너의 업무에는 허점이 많고 난 너보다 꼼꼼해‘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였기 때문에.


서로 피드백을 빙자한 공격을 일삼다 보니 불화는 날로 깊어져만 갔고, 급기야 사무실에서 싸움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같은 층 타 부서 직원들의 업무 분위기에도 지장을 주기 시작했다.


- 사람 때문에 퇴사까지 결심하셨으면서 왜 사실대로 얘기 안 하셨어요?


- 당시 입사한 지 한 달이 안 됐어서 제 주장의 신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조직문화가 안 맞은 셈 치고 나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게 무슨 조직문화예요. 저희는 그런 조직문화 없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팀은 한 명 한 명 조용히 퇴사하더니, 원래 없던 팀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냥 열심히 일하다 보니, 날 괴롭히던 이들과 그걸 방관한 이들 모두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사라져 있었다.



버틸 필요 없는 놈이 이긴다.


‘버틴 놈이 이긴다’


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버티는 과정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었을 테니. 피하지 못한 스트레스, 스쳐 지나간 더 나은 기회들... 버틴 놈에게 남는 것은 상처 어린 시간과 그래도 다 지나갔다는 자조적 위로뿐이다.


그래서 난 버티면 이기는 것이 아니라, 버틸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이긴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상황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하루도 참을 필요가 없다. ’요즘 애들 참을성이 없어서~‘라는 말은 MZ에게 씌워진 프레임이 아니라 특권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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