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과 마카롱
고등학교 때, 유난 떨 것 없는 성적이지만 공부를 곧잘 했다. 남들보다 더 힘들었다고 말하긴 민망하고, 남들만큼 스트레스받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고3 시절이 비교적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건 그 한 해가 부모님의 묵묵한 사랑과 서포트를 가장 많이 받은 시기였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스트레스를 잘 받는 편이었다. 특히 중압감과 부담감에 취약했다. 그래서 고3 시절 과민성 대장증후군을 달고 살았고, 덕분에 야자를 못했다. 소음 없이 조용한 교실 안에서는 더 긴장이 되어서 배에서 꾸루룩- 꾸우욱- 하는 요상한 소리가 울려댔고, 친구들이 웃으면 함께 웃어넘기긴 했지만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교 후 집에서 밥을 먹고 집 앞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주말에는 한의원에 가서 침과 뱃가죽에 직접 놓는 유황 주사를 맞았다. 그래야 효과가 빠르다나. 아침마다 한약을 먹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보니 돈 덩어리 그 자체...
컨디션을 좋게 유지하니 성적도 점점 오르기 시작했다.그러나 수능 날이 점점 다가오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 친구들이랑 말을 섞는 것도, 점심시간에 매점을 가는 것도 다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긴 하지만, 야자하는 친구들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꾸룩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억지로 남아서 야자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자를 하는 날에는 아빠가 꼭 학교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스쿨버스는 여기저기 들르니 피곤하고, 택시나 버스는 위험하다며,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꼬박꼬박 데리러 오셨던 것이다.
아빠는 일부러 번화가와 관광지를 꼭 통과해서 천천히 지나가며 "00아, 여행 온 느낌으로 구경해 봐. 야경 예쁘지? 스트레스 풀리지?"라며 보여주곤 하셨다. 공부 힘든 거야 물어봐 봤자일 테고, 학생 때가 좋다는 말은 고3에겐 위로가 안 될 걸 알기에, 학교에서 책만 보고 온 딸에게 바깥세상(?) 구경이나 많이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집에 도착하면 엄마 아빠는 "냉동실에 뭐 있게?" 하며 내 반응을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셨다.
그렇다. 고3 시절 내내 우리 집 냉동실에는 마카롱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한창 마카롱에 빠져있었는데, 수능이 끝나는 그날까지 내가 독서실에 가져갈 마카롱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 여보, 마카롱 2개밖에 안 남았어
- 응, 내일 오는 길에 1박스 사 올게
이게 부모님의 주된 대화였을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저녁 먹고 독서실 가기 전 마카롱 무슨 맛을 가져갈까 고르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이다.
신기하게 수능이 끝나고 직장생활을 하게 된 지금은 마카롱을 먹지 않는다. 오히려 안 좋아하는 편이 됐다. 분명 고3 때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았는데. 당시 마카롱은 얇은 꼬끄에 얇은 버터크림 한 줄이 끝이었다. 지금은 뚱카롱이니 뭐니 하는 크고 화려한 예쁜 마카롱들이 많이 나왔는데 이상하게 먹어보면 맛은 예전만 못하다.
그때 아빠 차 뒤에서 '난 언제쯤 다 커서 공부도 안 하고 돈 벌어서 효도하며 살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소원대로 공부도 안 하고 부모님 모시고 오마카세도, 호캉스도 갔지만 그럼에도 효도를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은 아직도 '마카롱 사갈까? 너 마카롱 좋아했잖아'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추석을 맞아 연차 쓰고 하루 일찍 내려간다는 소리에는 펄쩍 뛰며 좋아하셨다.
본가로 내려가는 KTX 안에서 문득 든 생각은, 어쩌면 지금의 나보다, 고3 때 힘드니 데리러 오라고, 마카롱 사달라고 칭얼거리던 그때의 내가 더 효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엔 철없는 효녀였는데, 지금은 철든 불효녀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