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꽃놀이
아빠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다.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실 정도로 통증이 심하셨고, 매일 몇 시간씩 산을 오르내리며 땀범벅이 될 때까지 걸어 다녀야 그날 하루는 조금 괜찮아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내 7살의 기억 속에는 하교 후 집에 들어가면 아빠가 멋쩍은 웃음으로 반겨주시던 1년여 동안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러다 아빠는 본인 사업을 시작하셨고 허리도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내가 자전거를 타다 다치는 바람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하필이면 봄이라 여기저기 꽃놀이에 축제에 세상이 들떠 있는 시기였다. 깁스한 채로 마땅히 갈 곳도 없어 아빠 가게에 멍하니 앉아있는데, 아빠가 대뜸 물어보셨다.
- 00아, 꽃구경 갈까?
- 의사 선생님이 걷지 말라고 했는데...
- 아빠가 업고 가면 되지!
- 아빠 허리 안 좋잖아
- 에이~ 00이 업을 정도는 되지
아빠 허리 상태를 고려해 단박에 거절했어야 하는데 당시 8살 정도 되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꽃구경 가서 콧바람 쐬고 맛있는 거 먹고 올 생각에 이미 콧구멍이 벌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허리 디스크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빠와 다리 깁스한 딸의 꽃놀이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차에서 내려서부터 나를 업고 걸어 다니셨다. 이게 무슨 꽃이고, 저게 무슨 꽃이고... 30분 남짓 지났을까, 아빠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 00아, 잠깐 내릴래?
아빠는 조금 높은 턱 위에 나를 내려놓고 아픈 신음을 내며 허리를 때리셨다. 디스크 환자에게 8살 딸의 무게를 계속 감당하기란 역시나 무리였던 것이다. 아빠의 허리 상태를 알면서도 끝내 꽃놀이를 거절하지 못한 죄책감과 너무 아파 보이는 아빠의 표정에 어쩔 줄을 몰라하자, 아빠는 애써 웃으며
- 좀 쉬었더니 괜찮다. 이제 갈까?
라고 하셨다. 이왕 나온 거, 할 수 있는 데까지 가보자는 결연한 의지로 다시 나를 업고 다니셨다. 그렇게 점점 가다 쉬는 텀이 짧아질 때까지, 나중에는 거의 5분을 가지 못하실 때까지 고통의 꽃놀이는 계속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돌아온 그날 저녁, 아빠는 엄마에게 등짝(?)을 많이 맞으셨다. 그러니까 무슨 꽃놀이냐며, 이 허리 상태로 누굴 업고 다니냐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하냐며... 아빠는 며칠을 꼬박 앓아누우셨다. 죄책감에 차마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밖에서 부모님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그 순간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도 고통이 극심하다는 허리디스크 환자가 8살짜리(심지어 난 키가 큰 편이었다.) 딸을 업고 다녔다는 사실은 너무 무모하고 아찔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어딜 가나 내가 ‘귀한 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이런 큰 사랑을 받은 기억들은 생각보다 강해서, 굉장히 많은 상황 속에서 위기를 헤쳐나가는 힘을 준다.
아무리 열심히 효도하려 해도 평생 갚지 못할 은혜가 있다는 건 가슴 먹먹한 일이다. 올 설에는 본가에 오래 머물며 더 많이 웃게라도 해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