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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Mar 05. 2024

우문현답

<우리가 모르는 민주주의>

"어떠한 감언이설에도 여러분들은 현혹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인간들이, 인간과 동물은 공동의 이익을 갖고 있으며, 한쪽의 번영이 다른 쪽의 번영이 된다고 말하더라도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동물의 이익도 원치 않습니다. 그런 만큼 우리 동물들은 효과적이고 정당한 투쟁을 위해 완전한 단합과 철저한 동지애를 바탕으로 다시금 굳게 뭉쳐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우리의 적인 반면, 모든 동물들은 우리의 동지입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다른 동물들에게 가르쳐주는 지혜로운 돼지 '메이저 영감'


- '조지 오웰'이 쓴 책 <동물농장> 중에서 -




  이 책은 <1984>와 함께 조지 오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조지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공산주의 정권이 독재, 부패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오웰은 돼지들을 우회적 등장시켜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 등 초기 소련의 지도층을 표현했으며, 이를 통하여 러시아 혁명을 풍자하였다.




  얼마 전 일이다. 퇴근하여 집에 와보니 거실 테이블 위에 여러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지난 주말에 아내와 딸애가 같이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인가 보다.

천재들은 책상을 어지럽게 쓴다는 속설이 있다.


  요즘 딸애는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깊은 겨울방학중이라 마치 동면중인 새끼 곰인양 침대 이불속에서 스마트폰만 쥔 채 웅크리고 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의욕이 없으니 책이라도 읽으라고 시킨 모양이다.


  어지러운 테이블을 정리하는 중에 눈에 확 띄는 책 한 권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이었다. 나는 기특한 마음에 그 책을 손에 쥐고 딸애를 칭찬해 주었다.



  "와! 이 거 진짜 좋은 책인데, 니가 골랐어?"


  "책 표지에 동물들이 나오기에 그냥 빌려봤어."


  "읽어 봤어? 이 책 되게 재밌지?"


  "아직 읽어보진 않았는데 잘못 가져온 것 같기도 하고."


  "왜?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책이야.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실제는 인간 세상을 묘사한 책이지. 시사하는 바도 깊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훌륭한 책이야."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책 설명을 잠깐 봤는데 고리타분한 말들이 많더라고. 재미없을 것 같아."


  "아니야, 재미있다니까!"


  "아빠가 그렇게 강조하는 걸 보니 진짜 별로겠네. 난 아빠 스타일이랑 많이 다르거든."



  그 후에도 계속 그 책 재미있다고 살살 달래 봤지만 워낙 '청개구리' 같은 딸애인지라 오히려 더욱더 안 보겠다고 선을 그었다. 더 이상 얘기하면 반감만 더 살 것 같아 그만두었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조지 오웰의 책 '동물농장' 표지




  그러고서 며칠 뒤, 저녁식사를 하고 한가롭게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는데 딸애가 느샌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시위하듯 옆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모른 척하면서 곁눈으로 무슨 책인가 짝 보니 지난번 논쟁이 있었던 동물농장이었다.


  나와 딸애는 마치 책에서 눈을 떼면 지는 경기를 하듯 한참을 서로 책만 읽었다. 딸애는 평소 책 읽기를 귀찮아해서 그렇지 일단 책장을 열면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류의 독종이다. 어느덧 책을 다 읽었는지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아빠, 이 책 읽어봤지?"


  "몇 번 읽었지. 어때?"


  "생각보다는 재미있긴 한데, 이거 완전 우리나라 얘기하는 것 같지 않아?"


  "무슨 소리야. 그건 예전에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독재와 부패를 비판한 책이야. 우리는 민주주의고 그 책은 공산당 전체주의에 대한 얘기인데 그게 왜 우리나라 얘기야?"


  "내가 그렇다는데 왜 아빠가 '진지충'처럼 그래. 나는 내가 느낀 대로 생각할 거야."



  나는 딸애가 왜 그런 결론에 도달했는지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얼마 전 읽은 어느 책을 떠올리면서 딸애의 느낌을 언뜻 헤아릴 수 있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등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 정치철학 교수 '마이클 샌델'이 가장 최근에 펴낸 책 <당신이 모르는 민주주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샌델 교수의 주요 저작들


  이 책은 27년 전 출간한 <민주주의의 불만>이라는 책의 개정판 성격으로 책의 무대는 미국 중심이지만, 우리 한국의 현실에도 놀랄 만한 적용력을 갖고 있다.  


  샌델 교수에 따르면, 오랜 시간이 지나 펴낸 이 개정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은 그전보다 심각해지다 못해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코로나 시대가 갑자기 열리면서 드러난 미국의 무능과 혼란의 저변에는 '능력주의' 문화가 있었다.


  세계화와 금융화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경험한 개인적 좌절과 실패의 책임을 바로 본인에게 돌리고, 패배자의 '굴욕감'과 승자의 '오만'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능력주의>였다.


  그로 인해 점차 증가해 온 원한과 분노의 감정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를 이용한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그 직을 수행했으나 문제 해결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해결책을 얻지 못한 채 분노한 미국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임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연방의회당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몰려와 미 의사당 봉쇄…상하원 회의 전격 중단


  샌델 교수는 오늘의 문제가 세계화, 금융화, 그리고 능력주의라는 세 축으로 형성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우리의 사회적 삶을 감싸고 있는 자본의 힘에 대해 시민의 민주주의적 역량으로써 어떻게 대항하여 '모두가 바람직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선 또는 공동선을 창출할 것이냐'에 주목한다.


  이것이 샌델 교수가 이 책에서 집중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목표이며, '우리가 모르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크게 분류하면 '정치체제'로서는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경제체제'로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구별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조합인 자유민주주의를 취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형식상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이와 다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민주주의라고 주창하지만 거의 독재에 가까운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긴 북한의 정식 국호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그렇다면 딸애가 책 동물농장을 두고 우리나라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계기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앞에서 살펴본 샌델 교수의 지적처럼 정치체제인 민주주의가 경제체제인 자본주의의 폭주를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화, 금융화로 대변되는 지난 30여 년간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기형적인 괴물로 만들었다. 여기에 왜곡된 평등주의의 그림자는 능력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소수의 승자에게는 채찍을 휘두르게 허용했고 다수의 패자에게는 굴욕과 자괴감 속에서 살아가도록 시궁창으로 빵 한 조각을 던져 주었다.


  지금 우리 주변의 드라마나 영화, 각종 소셜미디어를 찬찬히 보라. '힘을 모아 열심히 노력하면 너도 성공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와 함께 승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걸 보는 우리들은 왜 굴욕감에 시달릴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성공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 어떤 대상보다 부족하다는 자괴심이 들 때 스스로를 비하한다. 과연 그것이 옳을까?


  똑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다'기회의 평등'이라고 곧잘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초등학생과 대학생을 같은 선상에서 뛰도록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것을 '공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답해야 할 '문제의 핵심'이다.


'기회의 평등'은 '공정'으로 가는 사다리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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