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어릴 때는 비를 싫어했다. 비가 오면 모든 것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좋았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싫었다. 벼도 심고 고추도 심고 담배도 심었던 시골에서 자랐다. 마당 한 평도 되지 않는 텃밭도 매일 일이 넘친다. 하물며 자식들 키워내야 하는 논과 밭이면 얼마나 일이 많았을까? 하지만 그 모든 일을 비가 오면 멈춘다. 비가 오면 집에서 밀린 일도 하고 낮잠도 늘어지게 잘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가진 사람들에게는 참 꿀 같은 휴식이겠으나 논 하나는커녕 집에 딸린 손바닥만 한 밭이 있는 집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에게 비는 쉼이 아니라 근심이 되어 버린다.
비는 소리도 없이 온다. 밤새 모두 잠든 사이에 오고 텔레비전 소리에 묻혀서 온다. 우산이 아이수만큼 있는 넉넉한 집에는 소리 없이 오는 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산이 항상 모자라는 우리 집은 문제가 달랐다. 일찍 일어나 비 오는 것을 본 언니들이 학교로 가고 나면 내 우산은 친구 우산이었다. 가끔 우산살이 고장 난 우산을 쓰는 날도 있었는데 어릴 때는 그게 그렇게 부끄럽고 싫었다.
비는 발자국 소리 하나하나 남기며 온다. 흙에 떨어지면 소리가 너무 작아서 신경 쓰이고 나무 잎 하나하나마다 미끄럼 타는 물방울을 보게 된다. 마루에 떨어지면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듣게 된다. 일정한 듯하면서 일정하지 않고 노래인 듯 노래 같지 않은 리듬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고 그런 날에는 어김없이 집에서 내가 해야 할 몫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비 오는 날 주로 많이 혼난 것 같다.
하지만 비를 제일 싫어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비는 학교 갈 때는 오지 않았는데 학교 끝나고 집에 가려고 할 때 오면 제일 싫었다. 우산이야 원래 없었지만 얻어 써야 할 친구들도 우산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아이들은 학교 앞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오면 엄마가 와서 하물며 할머니, 할아버지라도 와서 우산을 씌워 데리고 갔다. 그 속에 우리 엄마는 늘 없었다. 오빠에게도, 언니들에게도 가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해야겠지. 집으로 오는 길에 토란 잎 하나 꺾어서 머리에 쓰고 오다 보면 가방이며 옷은 다 젖었다. 토란잎은 죄가 없다. 원래 우산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 머리라도 가려준 것에 고마워해야겠지.
언제부터 비를 좋아하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춘기 시절 드라마에 나오는 한 장면 때문이다. 제목도 생각나지 않고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비가 오는 장면이었다. 건물에서 하나둘 나온 사람들은 저마다 우산을 쓰고 가거나 머리에 옷을 뒤집어쓰고 뛰어가는데 여주인공은 우산이 없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러다 어쩔 수 없이 비를 맞아야겠다 마음먹고 뛰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우산을 받쳐주는 남자 주인공이 나타났다. 잠시 화면 속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그 장면. 우산이 없어 낭만적이던 그 장면 덕분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비는 언제나 드라마 속 그 장면을 생각나게 해서 설레고 기대되었다. 그냥 설레기만 했다. 결국 비를 맞는 것은 어릴 때나 그때나 같았다.
지금 나는 비를 좋아한다. 지금 비는 나에게 쉼이고 노래이며 낭만이다. 이전에 가져보지 못했으므로 이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음악은 끄고 창문을 연다. 아직도 비 오는 날 걸어가다 보면 누군가 옷을 씌워줄지도, 우산을 씌워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설렌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언제나 설렐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