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는 특이경력자로
별도전형이 진행중입니다.

빈 이력서를 채워 넣는 무의식의 힘

by 천유

정말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무엇이 되는지,

되어 있는지, 되고 싶은지도 몰랐던 시절이지만 '무언가'를 향해, 혹은 '무엇'이라도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지와 열정이 있었다.


이제 오래된 일은 가물가물하다. 떠올리려면 사건의 단서처럼 추적해야 한다. 당시의 분위기와 상황, 기억하는 소품 등. 한번 떠올려 보겠다.





수많은 면접이 있었고, 별의 별일을 다 경험했지만


가장 이색적이고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단연코 국내 굴지의 컴퓨터 보안프로그램 회사의 서류전형 심사 얘기를 꺼내어 자랑하고 싶다.


사실 이 회사는 면접을 보지 못했지만, 특별한 경험들 사이에 주인공으로 꺼내어 서술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다들 들어보시라.


때는 2005? 2006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채용사이트를 이잡듯이 뒤져서 괜찮은 회사를 물색해서 입사지원서를 작성하고, 하루에도 몇 통씩, 그런 일을 매일 같이 반복하는 일상이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시원찮을 무렵이었다.


이유는 알고 있었다.

스펙이 변변찮은데 비해 눈이 높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놀았기에, 어느 대학생보다 열정적으로 놀았기에, 나는 당시 학점은 빵꾸나기 직전이었고, 영문과를 졸업하고도 토익점수가 없었고 그럴듯한 단기어학연수는 커녕 배낭여행 한번 못다녀온 4년제 대학졸업자였다.


신입 지원자에게 스펙은 얼마나 걸림돌이 되고, 장애물이 되는지 매일 돌파구가 없는 콘크리트 벽을 향해 힘껏 몸을 던지고, 부서진 몸을 일으켜 가고 싶지 않아도 다시 돌진하는 그런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해당 회사도 입사지원을 한 무수한 곳 중 한 곳이었고, 그렇게 지원은 했지만 기대를 하는 듯 하지 않는 듯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다.


결과는 불합격. 서류전형을 통과하지 못했다.


일상다반사였기에 실망은 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그런데 문자 한통이 도착했다.


눈이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귀하는
특이 경력자로 별도의 전형이 진행 중입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리며, 결과를 따로 통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내가 특이한 경력자라고?


"너는 알아보는구나,
나의 반짝이는 열정을"


가슴이 벅찼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그때,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으리라 믿었던 그때, 나를 관심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따로 신중히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다.


몇 일 뒤, 통보된 결과는 낙방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굴지의 보안프로그램 회사가 나에게 기사작위를 내리듯 따로 불러 말해준

"너는 특별해.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 후 신입으로 작은 회사에 입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은 아니지만 나름의 업종에서 굵직한 여러 곳에서 면접을 봤다. 또 몇 곳에서 이색적이고 파격적인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회상해 보면 자신감의 문제였기도 했지만

(자신감, 열정 같은 부분도 놀랍게도 자소서 등 입사지원서에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활자는 인쇄물을 넘어 타자를 치는 화자의 마음을 투영하고 그럴 때 진정성이 발휘된다고 믿는다.) 다들 공을 들이는 스펙은 아니지만, 엄청 특별하진 않아도, 평범해 보이는 지원자지만! 나름의 특징적인 경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일관성이 있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중요하다고 모두가 집중하고 있는 것에 무게를 두지 않는 반면,

(등한시한 것은 물론 당시에 천추의 한이었고, 충분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회자원봉사를 매년 했고 대학 방송국 등 학교내 동아리 활동은 물론 학교 밖 대학생들의 모임에 관심이 많았고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론사 명예기자단과 화장품회사 마케터 활동이었다. 이것을 이력서는 물론 자소서에 충분히 풀어썼고 거기에 담긴 진정성이 담당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큰 작용을 한 것 같다.


망나니처럼 술 퍼마시고 망아지처럼 막 놀았던 것 같아도 나름의 기준! 몇 가지 특징은 있다. 내가 지원할 회사는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있었고 이것에 집중했다는 점.






(내가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이자 특별한 점,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다이어리(수첩)에는 빈 이력서가 한장 들어있었다. 무려 대학교 1학년 입학할 무렵부터 세번째 회사를 다닐 무렵까지.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명사 초청강연이 있었다. 수천 명이 모인 강당에서 강단에 선 강사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부터 이력서 관리를 하시라"고 당부했다.


이 말이 왜 나에게 닿았는지, 어느새 어떻게 훅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문구점에서 파는 노랑 봉투가 함께 든 이력서를 샀다.

그리고 한 줄 손으로 또박또박 써 넣었다.


사진, 이름, 나이, 주소 그리고
- 00년 00월, 00여자 고등학교 졸업 (문과)
- 00년 00월, 000대학교 000000 입학


단지 이것. 이 흔한 두 줄.


아직 여백이 많은 이력서를 반듯하게 접어 수첩에 끼워둔 후, 나는 참새가 방앗간에 가듯 틈틈이 열어보았고 쓸만한 일이 생길 때마다 신이 나서 빈칸을 채워 넣고 혼자 흐뭇해 했다. (그런데 그 흔한 토익은 왜 안보고 딴짓만 했을까ᆢ너란 애. 참 수십년을 데리고 살아도 아직 모르겠다)



꿈은 글씨나 그림으로 그려 구체화시킬수록 명확해 진다고 한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의식보다는 무의식의 힘이 나를 내가 좋아하는 곳으로 기꺼이 이끌어 줬다고 믿는다. 고맙다, 정말


빈 이력서의 힘. 손으로 쓰는 꿈의 힘.

그 힘은 차곡차곡 빈 칸을 채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채워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