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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윰윰 Nov 03. 2023

내면에 '지옥'이 있어, 이젠 아이처럼 살아 볼래

사실 지옥은 밖에 있지 않다. 지옥은 우리 내면에 있다. 그런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제야 나는 알겠다.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은 아니었다. 내 내면이 바뀌지 않으면 늘 반복될 따름이다. 


상담을 받고 있다. 2주에 1번 정도 받는데 상담에서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어떠한 상태인지 객관적인 전문가의 제3자적 시선으로 보고, 내가 잘못 '인지'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1.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강박'을 멈춰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움직이게 한 동력은 '분노'였다. 나는 승부욕이 강한 편이었기에 무엇을 하든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게 강한 사람이었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내겐 '괄목할 만한 재능'이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하는 건 '무조건적인 노력'이었다. 11살 무렵에 나는 미술학원에 다녔고 진짜 그림을 좋아했는데 학교가 끝나면 미술학원으로 달려가 10시간 동안 꼼짝앉고 그림을 그렸다. 물통의 물을 갈 때나 잠시 화장실을 갈 때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스케치부터 채색까지 하루 안에 끝내는 시간이 쌓이자 여러 대회의 상을 휩쓸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기본적인 페이스는 '해야 한다'였고, '하지 않으면 낙오된다'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살았다. 상담을 받으면서 들은 말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나는 몸이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지가 않으면 스스로 일을 하지 않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는 건데 정말 맞았다. 지금도 정말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스스로는 일이 많지 않다고 여긴데 딱히 몸이 탈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면역력 저하로 사마귀에 시달림 ㅠㅠ)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2. 나는 언제나 '오버페이스'하며 살아왔기에 '적정한 페이스'를 찾아가야 한다. 


지금 상담하는 곳의 선생님은 나와 잘 맞는 편인데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내가 놓치고 있는 지점을 꼭 짚어서 이해하기 좋은 어휘로 '적확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상담을 몇 번 받으면서 실로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에 계속 다녀볼 생각이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 몸이 힘들거나 고단하거나 지칠 때 스스로의 말을 안 들어주고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거에요. 한계를 넘어서까지 스스로 몰아가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적정한 페이스가 무엇인지 모를 겁니다. 얼만큼 쉬는 게 좋고 얼만큼 했을 때 몸과 마음이 괜찮은지 계속 찾아가야 해요, 맞는 페이스를


진짜, 쉬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그러고 나서 혼자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적어봤는데 이미 많았다. 정리하자면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소설을 매일 최소 1시간씩 쓴다. (약 2주간 40페이지 정도의 초고를 뽑았다, 글쓰는 스피드가 빠르기도 하지만 몰입력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주 2-3회 운동을 하며 저번주까지는 2달간 주2회 영어 과외 수업을 들었다. 


월 1회 모임을 운영하는 진행자로 활동하는데(인원 약 12명) 이번달 부터 모임 1개를 더 늘려서 진행하는 모임이 월 2회가 될 예정이다. 그리고 철학 기반의 독서 스터디를 하고, 내 채널을 키우기 위해서 매일 1회씩 블로그 포스팅을 쓴다. (원래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번 달에는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1일 1포 챌린지 1달 스터디를 끊었고, 마케팅 관련 뉴스레터에서 진행하는 1주 1회 포스팅 챌린지도 다음주부터 진행할 예정이다. 곧, 1주에 포스팅 6개를 써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비정기적으로 이 브런치에도 계속 에세이를 쓸 건데... 포스팅은 좀 더 외면적 글쓰기(정보성 강조)라면 이곳은 나의 내면 글쓰기 공간이자 에세이를 연습해보는 공간이어서다. (조금 더 나의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담는다고 보면 되겠다) 


놀랍게도 여기서 끝이 아닌데, 나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출판사에서 운영)에서 추천 리뷰어로 활동 중이다. 매월 4개의 리뷰를 써야 하며, 그 중 1개는 꼭 장편 소설을 읽고 써야 한다. (400매 이상이면 괜찮다지만 요근래 나는 2000매가 넘는, 그러니까 약 3권에 달하는 장편 소설을 읽고 리뷰를 써왔다) 이 외에도 서평단을 비정기적으로 지원해서 서평을 써 왔기 때문에 매주 1권 이상의 책을 읽고 분석한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콘텐츠도 매주 1-2개 정도는 보고 있고, (지금은 시간에 쫓겨서 못 정리했지만) 러프하게나마 요약 리뷰한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내 친구들은 '미쳤다'라거나 '갓생'이라거나 '어떻게 그걸 다해'라고 부르짖는데 나는 한번도 내가 많은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모든 걸 정리하면서도 뭔가 더 해야하는데... 생각이 들었다. 왜냐, 몸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 아플 만큼 뭔갈 해서는 안 되는데 일을 벌려서 몸이 아픈 상태로 끝에 끝까지 하고 난 뒤에 '번아웃'되는 게 어쩌면 나에게 아주 익숙한 굴레였던 거다. 


이 굴레에서 나는 이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상담을 하며 스스로에게 '인지 치료'를 시도하고 있다. 나는 정말 많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쉼 없이 하고 있다. 이미 많이 했고, 잘하고 있다. 그러니까 더 이상의 일을 벌이지 말고 <내실>을 다질 때가 왔다. 숨이 턱턱 차오를 때까지 모든 에너지를 불사르지 말고, '재밌고 즐겁게' 나를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3. 마법의 단어, '병가'를 생각하며 내 내면을 다지고 치유하는 일에 힘쓰자. 


결론적으로 저 위의 많은 일을 하면서도 불안했던 이유를 다행히 상담을 통해 찾았다. 나는 온몸을 불사지르며 일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던 거다. 지금껏 일해왔던 환경을 떠올려보면 지하철 타고가다고 전화벨이 울리면 바로 자리에 앉아서 (지하철 바닥에 걍 철푸덕 앉았음) 노트북을 꺼내서 일을 쳐내서 보내야 한다거나, 친구랑 놀다가도 전화벨이 울리면 친구를 돌려보내고 사무실로 뛰어가는 <방송국> 환경이 최초의 기억이다. 


광고대행사 환경에 비교적 잘 적응했던 것도 약 1년 간의 방송국 생활을 끝낸 뒤 '주말에 쉬게라도 해주면' 매우 감사한 정도의 수준으로 기대치가 낮아서였다. 당시에 나는 저녁 8시 퇴근하면 행복했다. (정시 퇴근은 6시) 대체로 9-10시였고, 많이 바쁠 땐 자정 임박에 퇴근해서 막차 놓칠 새라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뒤에 이직한 회사에서는 정도가 심해져서 새벽 1시에 팀장님 차를 타고 귀가하는 일이 빈번했다. 


지금의 회사는 비교적 정시퇴근을 하고 그때만큼 바쁘지 않다. 그 말인 즉, 프로젝트가 크게 성공할 일도 드물다는 의미다. 그랬더니 아, 이러다가 경쟁력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증에 시달렸다. 그런데 사실... 내 꿈은 작가다. 마케팅, 광고 계에 한 획을 그을 생각이 없다는 말이다. 그저 최선을 다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뼈를 갈아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어서 미치게 일했던 거지....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병가라고 생각하면 어때요?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지금까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버텨왔고, 혼자서 해내다가 몸이 아파서 퇴사하길 반복해 왔으니. 이번의 여유로운 시간들을 "회사에서 돈 받으며 즐기는 병가라 생각하는 건 어떠냐"라는 말에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솔직히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하면 또 잘해내는데, 딱 하는 정도까지만 하고 더 이상의 <불안함>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걸 기억하기에 좋은 멘트다. 그래, 지금껏 오버페이스로 내달리면서 지쳐온 심신에 평화를 주고 동시에 멈춰 왔던 '내실을 다지기 좋은 시간'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이유는 단순한데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사람 관찰하는 것도, 대화나누는 것도,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때다. 내가 쓰는 소설의 핵심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볼것이 많은 세상에 왜 소설을 읽는가. 

소설이란 것이 주는 재미나 의미라면 바로 그거다. 


정말 지치고 힘든 순간, 혹은 쉬어가고 싶은 순간에 딱 읽으면서 <무언가>를 섬광처럼 깨닫게 하는 거 말이다. 주제 아니고, 교훈도 아니다. <아, 이대로도 괜찮구나 혹은 이러한 방향도 있구나>를 잠시 멈춰서 생각하는 것. 화려한 볼거리는 없지만 스스로 생각할 만한 여지를 주는 '공백'이 문장과 문장 사이사이에 있기 때문에. 


나는 10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20대에 또 한번 위기를 겪었던 시기에 다양한 장르의 소설과 책 그리고 영화를 보며 참 많이 느꼈고, 살아 남았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나는 결국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나와 같은 허망함이나 고민에 빠져 있는 (제각각의 이유로) 사람들에게 <그것도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세상은 아름다워 따위의 환상적인 말이 아니다. 


이 세상은 실로 버거울 수 있고, 때때로 지옥과도 같은 것이 분명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서진 잔해를 밟고서 피를 흘리며 서서 바라보는 '앞의 광경'은 그리 서글프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세상은 잔혹하지 않다는 것, 마냥 따스하진 않지만 또 마냥 섬뜩하지는 않은 이 세상... 저마다의 속도로 나아가자고 말하고 싶은 거 같다. 그냥 다 함께, 저마다의 속도로 걸어가도 좋다는 '이야기'를 그려내고 싶은 거 같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러니까. 


어릴 적 나는 이 세상을 <잔혹한 전장터>로 보았고 척박했다. 밟지 않으면 짓밟히는 세계관을 내가 설정하면 진짜 딱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20대 중후반에 심하게 앓고 난 이후에 (불과 최근까지도 엄청나게 아팠지만) 나의 세상을 보는 눈은 바뀌었다. 


세상은, 사람은, 나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치가 사라졌다. 완전히 나는, 붕괴되었다. (마치 <헤어질 결심>의 대사처럼. 나를 둘러싼 이상의 성과 기둥은 모두 무너지고 나는 엄청나게 앓았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다 무너진 이 세상은 생각보다 '척박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비교적 가벼워진 몸으로 나는 이제야, 내 안에 홀로 웅크려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본다. 


스스로를 몰아세우느라 단 한번도 보지 않았던 그 <어린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안의 어린 아이는 사실 생각보다 어리지 않다. 열두살 정도에 많이 아팠기에(심적으로) 그 아이만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 아이는 많이 치유되었고 남아 있는 건 열여덟의 아이다. 


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던 그 시기의 나를 나는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교권이었던 성적이 그 무렵에 수직하락했다. 여러 스트레스가 폭발하며 난독증세가 발현되었기 때문이었고, 당시 나는 글쓰기로 도피해서 <지금의 나>까지 서사가 이어졌다. 나는 그 당시의 나를 '실패한 존재'라 여겨 왔다.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글을 써서 내가 지금 이렇게 다채로운 백그라운드와 넉넉한 마음을 갖고 비교적 '잘' 살아 있는 셈이기도 하다. 거기서 더 갔으면 정말 미쳐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나는 끝없이 스스로를 증명하려 했다. 다름 아닌 나에게, 내가 그래도 꽤 괜찮다고 <나를 둘러싼 명사>와 <내가 해낸 성과>로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실은, 그러지 않아도 괜찮은 거였다. 그저 살아 있음으로, 나라는 고유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며 사고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 있는 걸음걸음이었다. 


그 걸음걸음이 모여 내 안에 있는 '창작의 씨앗'을 만나면 화사하게 개화하니까. 내겐 그것을 만들어낼 능력이 분명히 있다. 그저 조급함과 불안함에 가려 나만 보지 못했을 따름이다. 외면이 아니었다. 내 안에 이미 지옥이 함께했다. 내 속이 너무 버겁고 괴로워서 지금껏 너무도 여유 없이 살았다. 


바로 그래서, 나는 <외부>적인 일을 벌리는 형태로 <내부>적인 불안을 해결하려 했던 거 같다. 

오늘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여 본다. 


생계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내가 경쟁력이 떨어졌단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을 사람들한테 신경끄자, 어차피 다시 볼 사람도 아니다. 

내면에 집중하자- 

내면의 나와 이야기하자. 


내가 다한 최선을 인정해주자. 

나는 어떻게든, 버티면서 내달려 왔다. 

살려고, 그리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려고. 

근데 이건 납득의 문제는 아니다. 

스스로 생의 이유를 바꿔서 생각하자. 

나는 이미 살아 있고, 나의 <욕망>을 즐기면 그뿐이다. 

나는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고 싶어했다. 

나만의 세계를 소설과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내면 <충분>하다. 


이제는 외부가 아닌, 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다. 

철학과 심리학, 영성학 그리고 소설과 스토리에 대해 고찰하며 내면을 쌓아가자.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사실 여전히 쉬는 게 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별로 중요하진 않다. 


나는 늘 내가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질책해 왔는데, 실은 에너지가 강력하게 많은 사람이다. 내가 벌이는 무수한 일들을 다 해냈으니까. 그러니 이제 <적절한 템포>를 찾아가며 '병가의 시간'을 즐기자. 최소 2달의 병가는 필요하다 했으니 12월까지는 더 이상의 어떠한 이직 활동도 하지 않겠다. 


이제 나의 일상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겠다. 

나는 여행, 관찰, 하늘에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보는 일을 좋아한다. 

글쓰기에 있어서, 내면 소통에 있어서 나는 이제 막 뒤집기에 성공한 갓난아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차근차근 기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내가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맘껏 뛰놀게 해주면 그 아이가 곧 '예술적인 메시지'와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실은 아주 민감하고 예민했던 내가 이제 나의 그 측면을 인정해주기 시작하자, 대화하고 사람들을 대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고 즐거워진 것처럼. 




이야기가 길어져버렸는데 마무리는 내가 요즘 정말 좋아하는 노래 뮤비로 할까 한다. 

DPR IAN이라는 가수의 노래가 참 좋은데 그중에서 <No blueberries>가 참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E-8pyVBvCPQ


뮤비 영상 링크를 남겨본다. 이 뮤비 도입부에서 나는 어릴 적 좋아하던 영화 <펄프픽션>을 떠올렸다. 낮게 깔리는 비트감이 이어지는 사이, 거울을 향해 총을 겨누는 남자의 이미지가 나오는 게 좋다. 금방이라도 일이 일어날 듯한데, 진지한 분위기가 끝나고 나면 남자는 고작 '블루베리'를 튕기고 놀 뿐이다. 뒤이어지는 장면에서 텅 빈 가게 안에 홀로 남은 남자가 보이면 '노래'가 시작된다. 


내 안의 여러 자아가 서로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싸우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역동감'이 참 좋은데, 이 뮤비를 보며 영화 <펄프픽션>을 다시 봐야하겠다고 생각하곤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조만간 적어도 이번 달 안엔 볼 생각이다. 내가 좋아했던 컬트 영화, 스릴러, 추리, 오컬트, 미스터리에 대한 취향을 다시 불러 와야 한다. 


나는 위의  장르들을 참 좋아한다. 


인간의 내밀한, 때론 역겨운 욕망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장르여서. 인간은 욕망적이고, 때론 짐승적이다. 바로 그래서 재밌는 존재다. 우리 스스로가 '내 안의 야성성'과 '짐승'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편안해진다. 누구나 내면 안에 야수와 성자가 함께 살 것이다. 


내가 쓴 글을 통하여 누구는 제 안의 야수를, 누구는 제 안의 성자를 거울처럼 비춰보길 바란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은 <좀비 물>이다. 이번주 안으로 초고를 완성하고 1달간 퇴고를 해볼 생각이다. 이 작업이 마무리되면 나는 또 한번 성장할 것을 믿는다. 내 안의 어린아이가 휘파람을 불며, 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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