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눈깨비 흩어지는 거리에 도망치듯 멀어지는 네 뒷모습에..
여전히 추운 날씨에 몇 개 없는 제법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밖에 나오자마자 펼쳐지는 풍경은 온통 회색이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한 하늘은 잔뜩 찌푸린 회색이고 건물이며 도로며 온통 회색뿐이다.
심지어 공기도 회색을 띠고 잿빛 냄새 같은 것도 난다.
"아.. 날씨.. 아프다고 핑계 대고 그냥 집으로 들어갈까?"
중요한 고객이다. 이번 미팅을 잘 마무리하면 한 달은 걱정 없다. 준비도 잘 되어 있고 결과물도 괜찮다. 오늘 포기하고 집에 들어가면 내일모레 다시 지금까지 일을 겪어야 한다.
생각하며 자신을 달래고 이어폰을 꽂고 느릿한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미팅은 잘 되었다. 내향적인 성격이지만 10년 넘게 지속된 사회생활에 사회적 외향성 정도는 훌륭하게 갖추게 되었다. 작업물이 괜찮다며 호의적인 의견과 긍정적인 피드백이 대부분이었으며 지적받은 자잘한 수정 사항 정도는 내일 느지막이 일어나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제안받았다. 괜찮게 마무리된 미팅 덕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함께 한잔 할까 생각했지만 남자친구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선약이 있다며 거절하고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늦은 오후에 시작된 미팅이었기 때문에 지금 출발하면 그 의 퇴근 시간과 거의 맞아떨어질 시간이었다.
다시 회색 풍경으로 돌아간다.
어느 뮤직비디오에서 봤던가? 세상은 모두 흑백이고 나만 색을 갖춘 채 흑백 세상을 거니는 상상을 하면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적당히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적당히 괜찮은 음악을 들으며 적당한 기분으로 목적지를 향해 간다.
그저 적당하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그저 적당하다.
이 정도면 괜찮은 하루다. 마음의 동요 없이 나는 사회인답게 귀찮음을 이겨내고 주어진 일과 미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이제 남자친구와 적당한 저녁식사와 적당한 대화를 나누고 적당한 음주를 하고 난 후 적당한 섹스를 하고 나면 적당해서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약속 장소는 남자친구의 회사 근처의 종종 가던 간단한 식사와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는 작은 가게였다.
약속 시간보다 약간 일찍 도착한 그녀는 먼저 가게로 들어간다. 종종 가던 가게지만 아르바이트 생이 자주 바뀌는 탓에 단골집 같은 환대는 없다. 몇 분이냐는 질문 두 명이라는 답변, 술을 먹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아직 자리는 넉넉하다.
전에 앉았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아직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가게에 입장하느라 잠깐 빼놨던 이어폰을 다시 꼽는다. 가만히 물 잔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다.
가만히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가만히 음악을 듣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친구가 앞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느릿느릿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천천히 눈을 마주친다.
- 일찍 왔네? 오래 기다렸어?
- 아니 방금.. 앉아서 한 세곡 들었나? 금방이었어
요즘 무슨 프로젝트를 한다더니 많이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며칠 새 살도 좀 빠진 모양새고 표정도 그렇게 밝지는 않다. 약간 가볍게 생각했던 나 자신이 미안하게 느껴졌다.
자주 먹던 적당한 메뉴와 술을 시키고 별거 아닌 이야기들로 시간을 보냈다.
어느 정도 허기가 채워지고 취기도 올라올 무렵.
- 할 말 있다 하지 않았나?
하고 물었다.
- 아.. 응.. 할 말이 있어.
답한다.
..... 침묵..
- 할 말해~
하고 다그쳤다.
- 아.. 응.. 해야지..
답한다.
..... 침묵..
무슨 할 말이길래 할 말을 못 하고 침묵하나?
- 그게.. 요즘에 생각을 좀 해 봤는데..
- 생각? 뭐에 대해서?
- 우리 사이에 대해서..
- 우리 사이? 어떤?
- 그..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
- 깊어져? 그게 어떤?
- 음.. 우리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고 관계를 맺고 있으니까 더 깊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 먼... 소리..? 우리가 더 깊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충분히 깊어져 있지 않나?
-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깊은데 더 깊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고..
-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하네? 그래서 고민을 해봤는데.. 그래서? 이야기해봐
- 그래서 고민을 해 봤는데.. 나는 우리가 더 깊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 깊어질 수 없어? 응?
- 그게 지금만 해도 너는 이미 우리가 충분히 깊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아..
여기서부터 너와 나는 다르지 않나?
이런 차이가 내가 너와 깊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아..
-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그냥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이야기하면 안 될까?
- 그래... 그래.. 깊어질 수 없다는 것이 너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사실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야... 암튼 그래서 깊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나는 지금 너와 우리 관계를 그만하자고 말하려고.
..... 침묵..
아.. 지금 이 사람은 나한테 헤어지자고 말하고 있구나. 를 깨 닳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깊어질 수 없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한테 이별을 말하고 있는 거구나.
이 사람과의 이별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가끔 이상한 고집으로 짜증 나게 굴 때.. 가끔 더럽다고 느껴질 때, 내 기준에서 기품 없이 구는 모습이 지질해 보일 때 등등
몇 차례 그냥 헤어져버릴까 생각했었다. 그 생각 속에서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 생각 속에서 아무렇지 않았던 나는 실제로 이별을 통보받은 지금 아무렇지 않은가?
심장이 크게 뛰고 있나? 감정이 크게 요동치고 있나? 손이 떨리고 있나? 자신을 진단해 본다.
아무렇지 않네..
테이블 위의 손을 바라본다. 채워져 있는 잔을 들어 한잔 들이켠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창밖으로 옮긴다. 회색이었던 세상은 어느덧 컴컴해져 가로등 불빛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눈이 오네..? 아니 비..? 눈..?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풍경에 점을 찍 듯 하얀 것들이 날리고 있었다.
진눈깨비.. 아 진눈깨비다..
회색의 풍경이었던 오늘 하루의 마무리로 완벽하다. 가로등 불빛에 자리를 내주기 싫었던 회색은 진눈깨비로 나마 회색을 주장하고 있었다.
다시 술병으로 손을 가져가 잔을 채우고 또다시 한잔 마셨다.
그를 바라봤다. 무슨 죄라도 고백한 냥 안절부절못하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웃겼다. 나한테 지가 머라고.. 겨우 이별 통보한 것 가지고 죄지은 것처럼 굴어댄담?
다시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전히 진눈깨비...
그 새 회색이 힘을 더 얻었는지 점점 몰아치기 시작하는 모양새다.
술 한잔 더 마시고는 다시 창밖..
그러고 나서 말이 없는 그를 한번 더 바라보고 다시 창밖..
진눈깨비가 보이다가 무언가 물에 빠진 듯이 뭉툭해진다.
회색이 점점 번지듯이 내 눈 안에서 흐려지고 커진다.
'응? 이건.. 머지?'
마치 물속에서 힘겹게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 시야다.
볼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응? 이건.. 머지?'
울고 있었다. 울고 있다. 나 지금 울고 있다.
눈물이 나고 있었다.
인지하자 갑자기 왈칵 쏟아졌다.
나도 모르는 새 흘러내린 눈물은 그것을 알아채자 왜 이제 봐줬냐는 듯이 왈칵하고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질적인 감정이 들었다. 별일 아닌 일에 눈물이 흘렀고 눈물을 알아채자 별일 아닌 일이 슬픈 일이 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소리 없이 눈물이 났다.
휴지를 건네는 그가 보인다. 현실성이 떨어져 영화 속 스크린에서 나에게 휴지를 건네는 것 같았다.
휴지를 받아 들지 않았다.
헤어지자는 말에 눈물이 났고 눈물을 눈치채자 그것은 마음의 둑이 터진 듯 더 크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 나는 이 사람을 많이 좋아했구나..'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눈물이 나고 나니 깨 닳았다.
이 사람을 좋아했구나.. 하고..
- 싫어... 가지 마..
'응? 나 지금 뭐라고..?'
- 싫어.. 가지 말라고..
내가 이야기했다.
- 깊어질 수 없다는 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그런 애매모호함은 납득할 수 없어
애매모호함으로 헤어지는 건 나한테 부당해...
이상하잖아..
가지 마..
- 아.....
.. 한참의 침묵...
- 헤어진다는 것은.. 너를 설득시키는 과정이 아니야.. 애매모호함이던 아리송이던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은 내가 네게 그저 통보하는 것일 뿐이야..
내 생각에 우리는 깊어질 수 없는 것 같아서 그저 너에게 통보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게 다야..
논리적이다.
평소엔 볼 수 없던 완벽한 논리를 헤어짐을 통보할 때 발휘했다.
늘 대충대충 그저 유머로 웃어넘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논리로 무장한 채 타인이 되고자 통보하는 그가 있었다.
왠지 역겨워져서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꽤나 매달려 있던 모양이다.
- 가지 말라고 제발 가지 말라고..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 논리적이고 정리되었던 나는 엉망인 채 막무가내로 그를 붙잡았고
대충대충 유머와 센스로 웃어넘기던 그는 논리적이고 단호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눈물을 흘려서 인지 마음이 무너져서 인지 엉망이 된 채 결국 그래 그러마..로 대화는 마무리되었고 그것으로 그와의 만남도 마무리되었다.
술집을 나와 아직도 진눈깨비가 날리는 거리로 나왔다. 급하게 따라 나온 그는 정신이 없어 보이는 그녀를 부축하며 택시를 잡아주겠노라고 말했다.
그래.. 눈앞에 진눈깨비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 술집에서는 눈에만 보이던 진눈깨비들은 거리로 나오자 내 얼굴을 때리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자! 이제 집으로 가자. 어느 쪽이지? 어디로 가야 하지?
나를 부축하는 그를 바라봤다. 어느 쪽으로 가서 택시를 타지? 물으려다가 부축한 팔을 뿌리쳤다.
"놔 병신아 깊어질 수도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하고 쏘아붙였다.
어이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그를 내버려 두고서 걷기 시작했다.
어딘지는 모르겠다. 어느 곳으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부축받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냥 몇 분 걷다가 멈춰 서서 카카오택시를 불렀다.
그러면 될 일이다. 굳이 물어물어 집을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 후로 두어 달? 시간이 지났다.
가지 말라고 붙잡던 그날의 나는 다음날 바로 사라졌다.
그날 쏟아졌던 눈물은 그날 쏟아낸 게 그를 향한 눈물의 전부였는지 그 후로 한 번도 그를 생각하며 눈물짓지 않았고 필사적으로 붙잡던 나는 그저 이불킥 한두 번 하고 나면 사라질 기억이었다.
감정에 취했는지 회색에 취했는지 이별을 통보받은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 후로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왔고 그의 빈자리는 울고 불고 붙잡았던 그날의 나에 비하면 정말 협소했을 뿐이었다.
평온한 나날들이 지속됐다.
그를 처음 소개해 줬던 클라이언트와 업무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간단히 통화를 했다.
여러 가지 논의할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그가 뜬금없이 물었다.
- 괜찮아요?
뭐가 괜찮냐는 건지 몰랐으나 이 내 그와 관계가 있던 사람이었음을 기억해 내고
- 아.. 네 머..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
의례적으로 대답했다.
- 아.. 내가 미안해요 그런 놈인 줄 알았으며 그때 못 만나게 하는 건데..
그새 또 다른 여자를 만나 가지고 괜히 나까지 민망하게..
응? 다른 여자를 만나..?
- 암튼 내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만 미안해~ 담에 미팅 때 넘어오면 내가 좋은 걸로 한잔 살게요.
응? 미안해..?
- 아.. 네. 그래요. 그때 뵐게요.
통화를 마무리했다.
아... 다른 여자였구나.
바람이 난 거였어.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아서 바쁘다는 게 그거였구나..
웃겼다. 실제로 한참 웃었다.
갑자기 [깊어질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다시 한참 웃었다.
"깊어질 수 없다니... 진짜 개 웃기네.."
육성으로 내뱉었다.
오늘 할 일은 다 끝났다. 음악이나 듣고 책이나 보다가 드라마나 한편 보고 빈둥거려야지 하고 계획했다.
쉽게 잠들지 못하는 그녀는 연이어 드라마는 4회나 넘게 봤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서였을까?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
[... 자니..?]
그였다.
아.. 씨발 진짜....
화장실로 달려가 이번엔 진짜 침을 뱉었다.
개찌질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