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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알라 Nov 11. 2022

꽃물염색

 온 터전이 쿵쾅쿵쾅 매우 요란하다. 이맘때 터전에 오면 으레 들리는 소리다. 통합반 교실마다 한창 고무망치로 광목천을 두들기느라 십리 밖까지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꽃물 염색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소란을 견뎌야 한다. 사실 이렇게까지 요란할 일은 아니다. 아직 요령이 없는 아이들이 하는 일이라 모르는 사람이 보면 꽃물을 들인다기 보다는 책상을 부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꽃물 염색을 하기 위해서는 광목천 사이에 꽃을 넣고 고무망치로 꽃물이 나오도록 잘 찧어주어야 하는데, 이런 소란이라면 책상이 부서지는 것은 둘째치고 염색된 결과물들은 아마도 마구 짓이겨져 꽃인지 똥 인지도 구분할 수 없을 듯하다.


 꽃잎 염색은 가을 무렵 꽃들이 마지막 빛을 강렬하게 내뿜을 때 가장 하기 좋은 활동이다. 이 무렵의 꽃들은 각각의 색이 매우 진해 짓이기면 쉽게 물이 든다. 고무망치로 한참을 정성스럽게 두드리다 보면 꽃 모양이 그대로 찍혀 나와 아름답기도 하지만 자연의 색감이 고스란히 천에 스며들어 그 고운 빛깔을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온다. 꽃은 그대로 두면 언젠가는 시들지만 이렇게 염색을 하면 오랫동안 내 것이 될 수 있다. 적어도 2, 3년은 그대로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꽃물을 들여놓아도 천을 빨아버리면 금방 물이 빠져버린다. 그래서 굳이 빨 필요가 없는 용도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찻잔 받침용이라든가, 잘라서 계절 엽서에 붙인다든가 하는 용도 말이다.     


 아이들은 오늘 나들이 길도 각오가 남다르다. 며칠째 하는 꽃물 염색에 재미가 단단히 났기 때문이다. 오늘도 꽃들이 많은 곳을 찾아 교사를 채근한다. 아무래도 나팔꽃이 많이 피어있는 들판 쪽으로 나들이를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방향을 그쪽으로 잡았다.      


 꽃을 찾아 나선 나들이지만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온 계절을 밝히던 꽃들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꽃보다 더 아름다운 붉은 단풍의 기세에 절로 위세를 꺾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게 물든 빛깔 고운 나무들로 주변이 환하다. 아이들과 매일 나들이를 다니며 소담스레 피어있던 길가의 작은 들꽃들에게 위안을 받던 나로서는 이제부터 아쉬운 계절이 시작된 셈이다. 아직 조금이나마 남은 햇볕의 따스함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개망초가 대견하게 피어있다. 한쪽엔 수줍게 발그레 분홍빛 여뀌가 바람결에 살랑이는 모습이 우아해 보인다. 아무래도 오늘은 이녀석들을 교실로 데리고 가야 할 모양이다. 

 

 “우리 반 교실을 예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두 손을 모으고 허리 굽혀 절을 한다. 나들이길에 만나는 자연 속에서 가끔은 꽃도 꺾어오고, 열매도 따서 먹고 하지만 나와 아이들 모두 자연에게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부러 하는 의식이다. 어쩌면 이녀석들이 겨울 오기 전 마지막 꽃장식이 아닐까 싶다. 많이 꺾어올수록 교실은 화사하게 꾸며지겠지만 과하지 않게 필요한 만큼만 꺾었다. 나의 행동이 아이들에게도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들은 교사의 이런 모습을 보며 스스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기도 하고, 조심하지 않은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기도 한다. 근처에서 유홍초를 발견하고는 한 움큼씩 따서 꿀을 빨아먹는 아이들을 보며 꿀벌을 위해 조금 남겨둘 것을 당부하는 것 같은 일 말이다. 

 

 한참 유홍초를 따먹던 아이들이 마침 오늘 나들이 목적을 깨달았는지 유홍초로도 꽃물을 들일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유홍초는 봉선화처럼 주홍빛이 어여쁘지만 꽃물을 들이면 원래의 빛깔만큼 예쁘게 물이 나오지 않는다. 빛깔이 예쁘게 물드는 것은 나팔꽃만 한 것이 없다. 추워지기 전 나팔꽃의 색은 자줏빛을 띄거나 남빛을 띄어 빛깔도 강렬하고 물도 잘 든다. 원래 꽃물 염색은 초가을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의 조막만 한 열 손가락에 붉게 물들이고 남은 봉선화 꽃이 광목천에도 물이 잘 들어서이다. 가을날 지천에 핀 코스모스 꽃은 예쁘긴 하지만 물을 들이기 위해서는 섬세한 망치질이 필요하다. 레이스 달린 옷처럼 예쁜 메리골드는 막상 염색을 해놓으면 색은 예쁘게 나와도 결이 살지 않아 결과물은 실망스럽다. 내가 좋아하는 염색용 꽃은 달개비꽃인데 어떠한 꽃도 갖지 못한 고운 쪽빛을 가지고 있어 이 계절 빼놓지 않고 물을 들이는 꽃이다. 달개비꽃은 중앙부의 노란 꽃술이 화룡점정인데 이것도 매우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가을날 피는 수많은 꽃들로 광목천을 숱하게 물들여 봤지만 결국 아이들과 염색하기에 가장 좋은 꽃은 나팔꽃이다. 꽃잎이 매우 크고 펼쳐놨을 때 단일 무늬로서 가장 쓸만하고 색도 진해서 만족감이 높다.     


 “코알라! 내 거 완전 이쁘게 됐어요.”

 “정말 예쁘게 됐네. 이거 모아뒀다가 동생들 생일잔치 때 카드 만들어주자.”

 “에이~, 집에 가져가고 싶은데.”     


 무엇이든지 집에 가져가고 싶은 아이들을 살살 달래어 모든 염색 작품을 교실 한쪽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들은 여기저기 쓰일 데가 너무 많아 매일 만들어놓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카드 만들 때, 달력 만들 때, 교실 꾸밀 때, 선물 줄 때 등 어디에 내놓아도 예쁘고 주는 사람도 뿌듯하고, 받는 사람도 행복해진다.     

 세상 알록달록한 빛들이 사라져 가는 계절이다. 이 예쁜 빛깔들이 다 사라지기 전 곱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매일 뚝딱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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