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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해 한광일 Apr 19. 2024

아주 오만한 글, 명품학부모 안내서

6. 오늘 아이의 모습은 작년 부모가 먹인 것의 결과


  의료계에선 흔히 올해의 내 건강상태는 작년의 내 식습관, 생활습관의 결과라고 지적하는 모양이다

교육계의 눈으로도 동의되는 지적이다


  칭찬받으며 학교가 즐겁다는 아이. 친구와 또 다퉜다며 학교가 싫다는 아이. 아이의 오늘의 행, 불행에 대해 부모의 지분은 없을까? 밖으론 절대로 할 수 없는 말들이지만, 사실 선생님들은 입학 첫날부터 예쁜 아이는 저절로 눈에 띈다고들 한다. 어디부터 어떻게, 얼마나 가르쳐야 할지 막막한 느낌이 오는 아이 역시 절로 눈에 띈다고들 한다.


  바른 자세로, 똘망똘망한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 선생님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한 번에 알아듣는 아이. 듣는 대로, 받은 대로 가정통신문을 바르게 정리하여 가방에 예쁘게 챙겨 넣는 아이. 글씨 한 자도 바르게 쓰는 아이. 첫 생활지도도 하기 전에 사뿐사뿐 걷고, 복도에서 뛰지 않으며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아이. 말하기 전에 먼저 들을 줄 아는 아이. 항상 고운 말을 쓰는 아이. 가끔 순서를 양보하고, 자기 것을 나눠줄 줄 아는 아이. 누가 가르쳤을까? 당연하다. 아이의 대견스럽고 예쁜 행동에 대한 지분은 백 퍼센트 아이의 부모이다.


  끊임없이 장난감을 만지느라 선생님께 눈길을 주지 못하는 아이. 공부 시간이지만 장난기 많아 툭하면 옆의 아이를 자극하는 아이. 차례를 지키지 못하고 항상 먼저 하려고 하는 아이. 자기의 혹은 다른 아이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며 끝내 그것에 관심을 끊지 못해 다른 모든 것을 놓치는 아이. 친구를 건드리고 복도를 내달리는 아이.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아이.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은 잊고, 선생님과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사정이 있어 변경될 수밖에 없는 계획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아이. 말과 감정이 거친 아이. 손과 발, 행동으로 먼저 표현하는 아이. 그런 행동은 계속 허용되었거나, 억지를 부리거나 떼를 써 이겨 온 경험의 축적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아이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겠는가?

사회가 생각하는 학교교육에는 약간의 오해도 있는 것 같다. 흔히 사회는 시민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의, 공정 등의 가치를 학교가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학교는 정의로운 사회에서 더 나아가 아름다운 사회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지금 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그것만을 가르치진 않는다. 학교는 정의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현대를 살면서 우리에게 점점 잊혀 가는 말이 있다. '그릇이 큰 사람'이란 말도 그중 하나다. 신세대들은 '처음 듣는 묵은 낯선 말'이라며, 케케묵은 꼰대의 말이라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맞다. 묵은 말이다. 옛 위인전 등엔 '큰 그릇', '그릇이 큰 사람'이란 말이 종종 쓰이곤 했었다. 하지만 사실 요즘도 큰일을 한 사람들은 정말 그릇이 큰 사람들, 그들인 것 같다. 앞으로도 그릇이 큰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공경의 대상이 되거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사회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분필 쥔 사람으로서 감히 장담해 본다. 따라서 정말은, 학교가 꼭 길러내야 할 인물은, 학교가 꼭 길러내고 싶은 인물은, '그릇 큰 사람' 일 것이다.


  그릇이 남다른 아이가 있다. 아이는 남이 잘하는 것을 알아주고 인정한다. 자기를 이긴 아이까지 인정하고 축하할 줄 안다. 꼭 일등이 아니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자기 차례이지만 사정이 있는 다른 아이에게 차례를 양보할 줄 안다. 순서가 조금 바뀌었지만, 고집하지 않고 큰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억울하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을 들어주며 위로할 줄 안다. 자신에게 나쁘게 말한 친구에게도 크게 화내지 않으며, 그 친구가 옳은 장면에선 그가 옳다고 말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이가 가장 잘하는 것은 친구의 감정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이에 낀 이간질쟁이는 아니다. 내일이 아니지만 가끔은 그냥 돕기도 하고, 더욱이 친구가 늦으면 기꺼이 거든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든 순위의 중간 이하에 있진 않다. 아이의 그런 태도는 일상에 이미 상당히 누적되어 있어, 아이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지 말하지 않아도 친구들이 대부분 알고 있다. 자기 것이지만 기꺼이 빌려줄 줄 알며, 조금은 손해 보고도 굳이 밝히려 하지 않는 양보심도 있다. 종종 누구나 다 아는 친구의 잘못을 끝까지 밀어붙여 벌 받게 하는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친구를 용서하여 친구 스스로 깨닫게 하며 친구를 잃지 않는, 그릇이 정말 큰 아이도 가끔 눈에 띈다. 친구들 모두가 불공평을 보고 한 목소리를 낼 때, 아이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므로 굳이 자신도 함께 목소릴 드높이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취한다. 친구들보다 조금 작은 것을 받아도 정확하게 똑같이 나누긴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선생님께 불공평하다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런 작은 일엔 크게 속상해하지 않으며, 친구가 작은 것을 가졌다고 푸념할 땐 자기 것과 바꿔줄 줄도 안다. 자기가 떨어뜨린 것이 아니지만, 아이는 화장실을 가는 길에, 친구의 발 밑에 떨어진 빈 우유갑을 주워 우유상자에 툭 던져놓고 갈지도 모른다(물론 이런 경우는 극히 보기 힘들긴 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선생님이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과 공부에선 어느 과목에서도 아이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예쁘게 생긴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아이가 네댓 표를 더 얻어 학급자치회 임원으로 선출된 것은, 순전히 반 친구들을 거의 다 담아낸 아이의 남다른 '그릇 크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는 꼭 학급자치회 임원에 선출되지 못해도 상관없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아이가 좋은 친구라는 것을 반 친구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아이의 ‘그릇’에 대한 지분은 구십 퍼센트 이상 그 부모와 아이 자신에게 있다. 십 퍼센트쯤은 담임 선생님도 아니고, 그저 학교라는 공간과 그가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반 친구들에게 있을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있어 친구들이 있었고, 친구들이 있어 아이가 자신의 남다른 그릇을 내밀 수 있었다. 다행히 아이의 친구들이 그릇이 남다른 그 아이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웃어주고, 칭찬하고, 좋아해 주며, 아이의 그릇에 담긴 것이다. 이런 일은 흔히 선생님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므로, 아이를 이렇게 키워내는 데 있어 선생님의 지분은 없기 십상이다. 학교가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이유다. 사회가 학교를 어떻게 보든 학교가 여전히 가장 훌륭한 교육기관인 이유다. 아마 집에서도 그릇이 큰 아이와 아이의 부모는 오늘도 너그러운 웃음을 나누며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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