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병아리콩 Aug 24. 2022

데이빗 린치의 즐거운 인형놀이

영화 <블루 벨벳>


 분명 이전에 데이빗 린치 감독의 작품을 몇 편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항상 그의 작품을 생각할 때면 뿌연 안갯속에 스쳐 지나가는 불빛의 이미지만 떠오를 뿐이었다. 줄거리가 어땠는지 주제의식이 뭐였는지 도대체가 기억이 안나는 것이다. 기괴한 꿈같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 그게 내가 생각하던 데이빗 린치였다. 조금은 각오를 하고서 영화 <블루 벨벳>을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의 영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뇌가 내 정신건강을 위해 기억을 모두 지웠기 때문이다. 누군가 날 고문하고 싶다면 묶어놓고 데이빗 린치 영화를 틀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산책길에 떨어진 사람의 귀가 그렇다. 데이빗 린치의 영화가 그렇다.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왜? 나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사람이고 싶다. 때문에 이 글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와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마지막 시도가 될 것이다. <블루 벨벳>이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영화가 지니는 가치는 어떤 것일까?  


 룸버튼은 평화로운 마을이다. 화단은 정갈하고 거리는 깨끗하다. 아이들은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길을 건넌다. 잘 가꾸어진 정원에 물을 주던 버몬트 씨는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진다. 강아지는 흩뿌려지는 물줄기에 신이 나서 버몬트 씨의 중요부위를 아작아작 밟는다. 쓰러진 버몬트 씨의 시선에서 카메라는 잔디 속에 숨겨진 벌레들의 세상을 본다. 위치를 바꾸기 전에는 인식할 수 없지만 평화로운 룸 버튼과 공존하고 있는 또 다른 세상이다. 버몬트 씨의 아들 제프리 버몬트(카일 맥라클란)는 쓰러진 아버지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제프리는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는, 심지어 강아지에 의해 남성성이 거세된(...) 아버지를 본다. 이어지는 모든 제프리의 행동은 아버지의 부재로 잃어버린 본인의 남성성을 획득하기 위함으로 설명된다. 제프리는 평화로운 마을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고 파헤치기 시작한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제프리는 난데없이 잘린 사람의 귀를 발견한다. 그는 샌디 윌리엄스(로라 던)로부터 도로시 밸렌스 (이사벨라 로셀리니)라는 가수가 귀와 연관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는다. (영화 상에서 경찰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능력하다. 귀와 도로시가 연관이 있다는 걸 알면서 도로시의 남편과 아들이 납치되어 있는 건 모른다. 범인이 매일 집을 들락거리는데.) 제프리는 지가 코난이야 뭐야 갑자기 도로시의 집에 몰래 잠입하기로 한다. 도로시는 불법 가택침입 스토커인 제프리를 발견하고서 그를 벗겨 애무하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전혀 이해가 안 간다. 영상이 꿈같던 뭐던 간에 캐릭터의 행동 목적이 이해가 가야 할 게 아닌가. 여자가 자기 집에 잠입한 스토커를 성추행한다고? 심지어 도로시가 자기를 때려달라고 한다. 제프리 이 새끼는 그런다고 또 때린다! 데이빗 린치는 포르노를 너무 많이 본 게 틀림없다!  


 잠시 진정하고 도로시라는 캐릭터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납치당한 채 프랭크에게 협박받고 있다. 프랭크는 도로시를 때리고 폭언하며 강간한다. 얼마나 당해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다. 폭력의 피해자인 그녀가 잘 알지도 못하는 제프리를 유혹하고 때려달라고 매달린다. 분명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상황 속에서 나는 조금 익숙한 현대 사회의 일면을 발견하게 된다. 범죄의 포르노화. 


 제프리와 샌디는 반복해서 말한다. “정말 이상한 세상이야.” 1986년 데이빗 린치의 영화 속 세상은 현재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성범죄를 포르노로 즐기는 나라다. 포털사이트 뉴스에는 폭행 강간 기사가 자극적인 이미지와 타이틀을 달고 제공된다. 강간을 주제로 한 포르노가 한 장르로서 소비된다. 인터넷을 잠깐만 뒤지면 수많은 일반인 불법촬영물이 쏟아진다. 옷장에서 숨어 강간을 관음 하는 제프리와 일반인 불법 촬영물을 관음 하는 21세기 네티즌. 둘은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하고 싶다” 


 영화 <블루 벨벳>을 현대판으로 바꾼다면 어떨까? 강간당하는 동네 유부녀. avi? 도로시는 제프리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로 기능한다. 감독이 도로시를 소비하는 방식은 현대사회가 범죄 피해자를 소비하는 방식과 같다. 자기 호기심 혹은 알 권리를 이유로 피해자의 신상을 파헤치고 (ex. 성폭행 피해자 사진 유출) 피해자의 피해내용을 포르노처럼 관음 하고 (ex. 일반인 불법 촬영물 유출)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고 간다. (ex. 여자가 꽃뱀/창녀/걸레/미친년이야) 강간 피해자인 도로시가 정신이 나가서 불법침입자인 ‘나’를 유혹하는 건 데이빗 린치가 갖고 있는 범죄 포르노 판타지다. “나도 하고 싶다”는 욕망을 실현한 것이다. 범죄 피해자를 이따위로 소비하는 것. 이 영화가 내게 이토록 불쾌한 이유다.  


 제프리는 유독 프랭크라는 악인의 존재에 대해 분노한다. 왜? 도로시를 사랑해서? 정의로워서? 제프리는 애초에 ‘정의’나 ‘사랑’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호기심’ 때문이었다. 제프리가 프랭크에게 그렇게 화가 나있는 이유는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저 새끼만 하고 나는 못해서”다. 결국 제프리는 한다. 제프리는 도로시를 때리고 강간한다. (이 장면이 강간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소지가 없다. 여자가 “나가”라고 하는 것의 뜻은 “나가”라는 뜻이다. “섹스하자”가 아니고.) 프랭크는 악하고 제프리는 선한가? 사실 둘은 똑같다. 프랭크는 자기 욕망을 필터 없이 내뱉고 제프리에게는 약간의 필터가 있다는 것 정도가 차이일 거다.


 샌디는 그 필터의 역할을 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게 해주는 존재. 나를 사랑해주고 보듬어주는 존재. 샌디는 순수하고 밝고 사랑을 믿는다. 여기서 데이빗 린치의 두 번째 판타지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유부녀를 강간하고 다니던 불법 가택침입을 하고 스토킹을 하던 내 여자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판타지. 강간은 저기서 하고 용서는 여기서 받는다.


 <블루 벨벳>에는 두 가지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형사의 딸인 샌디와의 “애틋한 사랑놀이”와 잘린 귀에서 출발하는 “신나는 탐정놀이”가 그것이다. 이 두 이야기는 각각 샌디와 도로시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 빛과 어둠. 성녀와 창녀. 그 구도가 너무 명확해서 촌스러울 지경이다. 영화에서 남성이 남성성을 획득하는 방법 또한 두 가지다. 여성에게 사랑받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놈의 남성성을 꼭 획득해야 하냐?  


 프랭크의 가학적인 아기 역할극을 비롯해 여러 가지 부분에서 영화는 오이디푸스적 욕망을 내비친다. 마치 인물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이것 봐! 이건 모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이야!”라고 변명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애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것이 만인이 느끼는 흔한 감정인가? 남성은 모두 엄마랑 섹스하고 싶고 그런가? 정상적인 인간이면 그건 아닐 거다. 심지어 도로시는 프랭크의 엄마도 제프리의 엄마도 아니다. 제프리는 그냥 쌔끈한 유부녀랑 자고 싶었을 뿐이다. 영웅놀이는 덤이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감독이 깔아놓은 장치다. 유-명한 프로이트 님께서 남성에게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성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원초적 욕망이 있다고 하셨으니, "내가 이상한 놈이라서가 아니라 원초적 욕망이 날 이렇게 만드는 거야!”라고 변명할 빌미가 생기는 것이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샌디가 있지만 내가 도로시랑 자는 건 내 안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있기 때문이야! 남자는 원래 다 그래!" 아니다. 그냥 제프리가 쓰레기인 거다. 


 제프리는 오이디푸스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경험하고 성장하면서 남성성을 획득한다. 이를 위해 도구로 쓰이는 건 모두 여성이다. 성녀와 창녀, 단 두 가지 역할로 이분화되고 평면화되어버린 여성. 도로시와 샌디를 보면 감독이 가진 여성에 대한 편견을 알 수 있다. 프랭크가 미친놈처럼 도로시를 희롱할 때 잠깐씩 비치는 도로시의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그녀는 미소를 띠고 있다. 심지어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제프리에게 싸대기를 맞는 순간에도 감독은 기쁨에 찬 듯한 그녀의 미소를 클로즈업한다. 불타는 이미지를 오버랩하며 제프리의 강간 장면을 마치 열정적인 섹스! 정도로 연출한다. 여기서 관객이 얻을 수 있는 편견은 무엇일까? “여자는 맞고 강간당하는 걸 사실은 좋아한다.” 여기 더해서 “여자는 스토킹 당하는 것도 좋아하고 가택 침입하면 구강성교도 해준다!” 데이빗 린치의 성적 판타지가 그저 판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위험해질 수 있는 지점이다. 범죄와 범죄 피해자를 소재로 다루면서 이 정도로 비도덕적일 수 있을까. 영화가 포르노와 다르게 예술적 가치를 지니려면 최소한의 도덕적 장치를 해놓았어야 한다. 범죄를 표현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의 왜곡하지 말라는 거다. ‘강간을 즐기는 강간 피해자’에게 관객이 납득할만한 논리적/감정적 설명이 없다면 포르노와 무엇이 다른가? 


 도로시가 오이디푸스적 어머니(성적 대상)로서 기능한다면 샌디는 보편적인 어머니(무한한 모성)로서 기능한다. 샌디는 늘 제프리를 응원하고 돕는다. 지극히 수동적으로 제프리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세상 어떤 여자가 다른 여자 집에 몰래 침입하는 남자를 좋다고 만나냐. 하지만 샌디는 제프리를 사랑한단다. 제프리가 도대체 어떻게 변명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마지막에 그는 샌디에게로 돌아간다. 샌디는 그걸 또 받아준다. 순수하고 헌신적이며 멍청하다. 여기서 읽을 수 있는 여성상은? “내 여자는 마땅히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강간을 해도 폭행을 해도 바람을 펴도) 용서해줘야 한다.” 만약 샌디가 제프리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나쁜 년이 된다. 샌디는 성녀에서 창녀로 격하하는 거다. <블루 벨벳>의 세상에서 여자는 성녀 아니면 창녀 둘 뿐이니까. 


 두 여성 캐릭터의 행동 양식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녀들은 린치의 판타지 속 인물이니까. 왜 강간당하면서 쾌감을 느끼는지, 왜 변태 스토커를 사랑하는지 그런 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녀들의 역할은 남성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주고 남성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는데서 끝난 거다. 그렇게 여성에 대한 편견은 강화되고 왜곡된 여성상이 자리 잡는다. 


 감독에게 여성 캐릭터는 인형이었을 뿐이다. 인형들은 그냥 예쁘고 멍청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촬영 당시, 도로시 역의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촬영 스태프들과 수많은 구경꾼 앞에서 전신 나체 연기를 해야 했다.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본인의 자서전에서 그 씬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있어 짧은 영어 실력이나마 옮겨 본다. (Some of Me/Random House 출판)  


"People came out with blankets and picnic baskets, with their grandmothers and small children. I begged the assistant director to warn them it was going to be a tough scene, that I was going to be totally naked, but they stayed, anyway. I went out and talked to them myself, but they were already in the mood of an audience and just stared at me without reacting to my plea and warning."  


“사람들이 할머니와 아이들을 데리고 담요와 소풍 바구니를 들고서 왔어요. 저는 전신 나체로 연기하는 힘든 씬이니 구경꾼들에게 경고해달라고 조감독에게 빌었죠. 그래도 사람들이 계속 있더라고요. 결국 제가 직접 그들에게 얘기하러 갔어요. 하지만 그들은 이미 관객 모드였어요. 제가 간청을 하던 경고를 하던 아무 반응도 없이 그냥 저를 쳐다만 보고 있었어요.”


 데이빗 린치는 이사벨라 로셀리니의 나체를 말 그대로 “전시했다.” 배우를 '연기하는 인간'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도 감정도 없는 인형 취급을 한 것이다. <블루 벨벳>을 보는 관객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가 여성을 성추행하는 장면’을 관음 하게 된다. 감독은 왜 배우를 지켜주지 못했나?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일까? 감독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내 예쁜 인형(a.k.a 여배우)'을 벗겨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린치는 우쭐함을 느꼈을까?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 남성성을 획득하는 <블루 벨벳>의 남성 캐릭터들은 데이빗 린치 그 자체다.  


 나는 데이빗 린치가 이상한 세계를 비판하기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과 섹스로 이루어진 이상한 세계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제프리를 통해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현시대에도 수많은 제프리가 있다. "범죄는 나빠, 범죄자는 처단해야지, 엣 헴.”이라고 말하면서 뒤로는 일반인 불법 촬영물을 보고 강간 포르노를 소비하는 군상들. 평화로운 척 하지만 그 안에 벌레처럼 꿈틀대는 성적 욕망을 간직한 세상. 


 영화 초반부, 제프리가 샌디에게 말한다. "인생에는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그래서 제프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강간하면 여자가 좋아한다는 지식? 여자 패는 경험? 아버지가 쓰러진 동안 이 불효자 새끼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납치 강간 피해자 여성을 이용해 성욕을 채우고 재미로 위험한 사건을 들쑤시고 다니다가 결국 살인을 저지르지만(지가 굳-이 현장에 감) 순수하고 헌신적인 여자 친구한테 돌아와서는 사랑타령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제프리는 샌디와 함께 개똥지빠귀를 본다. 사랑을 뜻하는 개똥지빠귀가 어두운 세상의 벌레를 잡는다. 오, 정의롭고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 진짜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다. 역겹기 짝이 없는 시퀀스다.


 욕 안 먹으면서 사람 죽이고 싶고 욕 안 먹으면서 강간하고 싶고 욕 안 먹으면서 여자 패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블루 벨벳>을 만들었다. 감독은 관객을 제프리의 자리에 위치시키면서 ‘정의롭고 매력적인 청년’이 인간적으로 이해가 가는 선 안에서 폭력도 행하고 살인도 하고 강간도 하는 ‘안전하고 환상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몇몇 여성 관객들이 “저 새끼들 설마 진짜 저렇게 믿는 건 아니겠지?”라는 공포에 시달릴 동안 말이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을 영화로 만들면 안 된다는 법은 없다.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가 있으니까. 다만, 그 ‘표현의 자유’가 범죄 피해자를 왜곡하고 성적 대상화하기 위해 쓰인다는 게 문제다. 나는 그의 영화가 "기괴하지만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영화"로 추앙받는 게 불쾌하다. 내 관점에서 이 영화는 감독 본인의 폭력적/성적 판타지를 구체화한 결과물일 뿐이다. 그 판타지의 내부는 지극히 여성 혐오적인 편견으로 가득하다. 더욱이 불쾌한 것은 3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영화보다 2022년의 한국이 조금도 나은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 글을 쓰는 내내 속에서 올라오는 역겨움의 정체일 거다.  


 영화는 절대 인간보다 우선일 수 없다.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첫 번째로 “이 영화를 통해 누군가 상처받을 수도 있을까”를 고민한다. 내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미리 고민하고 예방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술은 생각만큼 위대한 게 아니며 만능열쇠도 아니다. 예술은 도덕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영화가 도덕성을 잃을 때 영화는 인간을 공격한다. “너도 즐긴 거 아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성폭행 피해자가 <블루 벨벳>을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나체로 대중 앞에 전시당해야 했던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데이빗 린치를 이해해보고자 한 나의 마지막 시도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영화에는 메세지도 없고 가치도 없다. 오직 더러운 욕망과 상처만 남았다. 샌디는 제프리에게 물었다. "탐정인 거야, 변태인 거야?” 나는 린치에게 묻는다. “변태인 거야, 개새끼인 거야?” 린치 개새끼야.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을 향한 추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