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
미자는 멋쟁이 할머니다. 꽃을 좋아하고 가끔 이상한 말을 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손자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의 감성을 가진 미자는 세상을 긍정하고 사람을 긍정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고통받는 인간의 아픔에도 깊이 공감할 줄 안다. 병원에서 나온 그녀는 딸을 잃은 엄마의 고통을 마주한다. 다른 이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할 때, 그녀만큼은 고통받는 이의 편에 서서 아픔을 공유한다. 슈퍼 주인에게 아이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아픔을 나누려 하고, 손자 종욱에게는 자살한 여학생의 이름을 묻는다. 하지만 그녀 주변의 누구도 그녀 같지 않다. 그녀에게는 자신과 같은 이들이 존재하는 세상이 필요하다. 미자는 시 문학강좌를 듣기 시작한다. 세상을 긍정하는 그녀의 본성에 따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나선다.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설거지통, 빨간 사과, 푸른 나무. 미자는 일상적인 것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미자에게 시의 세계는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향에 가깝다. 삶, 사랑, 정신, 자연, 아름다움 같은 것이 속한 세계다. 그녀는 시를 씀으로써 시의 세계로 완전히 편입되기를 원한다. 영화가 흘러가는 내내 미자는 줄곧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시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도는 자꾸만 현실의 사건들에 가로막힌다. 여학생 희진의 죽음이 사랑하는 손자의 폭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듣게 되고 그녀 자신의 스러져가는 육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기도 한다. 현실의 세계는 죽음, 고통, 물질, 육체, 폭력이 속한 세계다.
어느 식당에서 가해자 가족의 회동이 있던 날, 그녀는 시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끌어당겨진다. 가해자 아버지들은 사건에 대해 무덤덤하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피해자의 고통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볼지, 자식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따위에 집중한다. 그들에게는 사건이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일뿐이다. 그 해결의 방식 또한 오직 물질의 영역이다. 미자는 앞서 아이 엄마의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켰으나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진다. 식당 안은 현실의 세계 그 자체다. 미자는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나간다. 창 밖에서 그녀는 꽃을 바라보며 메모를 쓴다. 창 밖은 식당 안과 철저히 대비된다. 불의를 덮으려는 다섯 남자의 야합과 죽음을 애도하는 미자의 시구. 피같이 붉은 꽃.
영화 속에서 붉은 꽃은 여러 번 등장한다. 그녀가 처음 손자의 불의를 듣게 된 식당 앞의 맨드라미, 치매를 선고받는 진료실의 가짜 동백, 죽은 희진의 집 마당에 핀 이름 모를 붉은 꽃. 붉은 꽃은 고통이다. 그것은 그녀가 추구하는 구도(求道)의 길에 피어나는 장애물이다. 미자는 시의 세계의 경계에서 자꾸만 현실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다. 한 순간에 피해자의 옆에서 가해자의 옆으로 옮겨진 미자는 혼란스럽다. 그녀는 그 지독한 불의와 물질의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진의 자취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미자는 희진이 다니던 성당으로 가 희진, 아네스를 위한 기도를 듣는다. 희진의 친구로 보이는 여중생의 시선을 미자는 차마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다. 그녀는 비극이 벌어진 과학준비실을 둘러보고 희진이 몸을 던진 다리에 가보기도 한다. 바람에 날아간 미자의 모자는 마치 희진처럼 강물에 떨어진다. 희진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려는 미자의 시도들은 시 쓰기로 결부된다.
시 낭송회에서 누군가 시를 읽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허허한 창 모서리 혼신의 힘으로 버틴 밤새워 흔들리는 그것 잠재우는 일이다. 퍼내고 퍼내어도 차오르는 이끼 낀 물 아낌없이 비워내는 일이다. 여백의 숲 하나 만드는 일이다.” 미자에게 시를 쓰는 것은 이상향을 향해 수행하는 과정이다. 연민을 갖고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세상. 시가 존재하는 미자의 이상향은 그런 곳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처럼 그녀가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가 순수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녹록지 않다.
미자는 가해자 아버지들의 등쌀에 못 이겨 희진의 엄마와 대화를 나누러 간다. 그녀는 가해자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희진을 마주해야만 한다. 미자는 희진의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가 떨어진 살구에 대해 쓴 시구는 희진을 향한 애도 같기도 하다. “살구는 스스로 몸을 던진다. 깨어지고 발핀다. 다음 생을 위해.” 미자는 결국 목적을 잊고 희진의 엄마에게 그 애도의 시구를 남기고 떠난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본질, 자기 다운 모습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미자는 손자의 불의를 덮을 500만 원이 필요하다. 시를 쓰다가도 불쑥불쑥 소환되는 현실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그녀 답지 않은 선택을 한다. 자신이 돌보던 김 노인과 성관계를 하고 그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낸다. 그것은 그녀가 손자를 위해 행해야만 했던 폭력이다. 그러나 돈을 건네고 미자는 깨닫는다. 희진의 고통이 배제된 채 끝나버린 비극이 가장 큰 폭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결코 시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결국 그녀는 사랑하는 손자를 보내는 선택을 한다. 마침내 미자는 한 편의 시를 쓴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카메라는 그녀가 지나간 모든 길을 따라간다. 그것은 미자가 희진을 따라가던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시를 읽는 미자의 목소리는 어느 순간 앳된 소녀의 목소리로 변한다. 미자는 희진이고 희진은 미자다. 미자는 고통받는 이를 연민하고 삶을 사랑하는, 그리하여 정의를 세울 수 있는 시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녀는 비로소 세상을 “진짜로 보는 법”을 알게 된다. 희진의 고통과 자기 자신의 고통까지 끌어안으며 그 괴로움마저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희진이 떨어진 다리 위에서 살포시 미소 짓는다. 삶을 축복하면서, 다시 만나기를 꿈꾸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