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의 질문에 매료된다는 것, 나의 앞에 '나타난' 이미지의 문제에 매료된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출현, 출생, 발생, 뭐라고 부르던 그 이미지의 문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의심을 하던지 어떤 '나타남'은 '있다'. 이것이 존재의 문제와 현상의 문제를 뗄 수 없는 문제로 만들고 오히려 나타남을 존재에 앞선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 앞의 관찰자인 '나'는 언제나 그 이후에 있다
'나타남'보다도 존재 보다도 '지금'의 시간과 '여기'의 장소인 '몸'보다도 '나'는 늦는다. 솔직히 여기에 어떤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아니 아는 사람이 없는 것 보다도 철학 혹은 과학에서 의심에 특출 난 사람들이 그 확실성을 번번이 무너뜨린다. 그럼에도 그 나타남의 문제에 매료됨은 여기 내가 몸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으므로 그래도 살고자 함이다.
매료되었다는 것 자체가 나의 나타남과 존재를 넘어 삶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에 진실하게 매료된 적이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진실하다는 의미도 의심하는데 그 이상의 것을 바랄 수 있는가... 그래도 지금은 철학적 의심과 일상적 믿음을 구분해서 미숙하긴 하지만 나름대로 살길을 마련하고 있다... 누가 나는 살려고 책 읽고 공부한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안 해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다. 삶의 순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날이 오기를 아니면 의심의 겨를 없이 삶에 매료되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