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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Dec 26. 2023

폭설이 내리는 캐나다 도로에서 관리자가 돌아가라고 했다

겨울 동화 마을, 캐나다 밴프에서의 4박 5일

  계획 없이 떠난 밴프 여행이었지만 꼭 하고 싶은 것은 있었다. 김연아 선수가 스케이트를 타던 레이크루이스의 설경을 보는 것, 폭포로 유명한 존스턴 캐년 협곡의 얼어붙은 폭포를 보러 설산 하이킹을 하는 것이다. 여행 온 셋째날에는 밴프 다운타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레이크루이스에 갔다가, 다시 다운타운 방향으로 30분 돌아오면 있는 존스턴캐년 협곡에서 하이킹을 하려고 했다. 해는 4시에 지고 하이킹이 2시간 30분 걸릴 것을 생각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계란을 삶고 차를 내려 간식 도시락을 싸고, 아이젠과 등산스틱을 빌리러 다운타운 구경 중에 발견한 아웃도어용품 대여점에 갔다.

  우리가 여행하던 날에는 11월부터 영하 10도를 찍던 밴프가 이상 기온으로 영상 온도였다. 그래서 도로나 나무 위에 눈이 없었고 종종 비가 왔다. 그래서 사계절용 타이어가 달린 렌트카로 문제 없이 다니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는 진눈깨비 예보가 있었는데 심각한 상황인 예보는 아니었다. 아웃도어용품 대여점에서도 간혹 길이 슬러시 같을 수 있지만 괜찮을 거라고 했다. 오히려 다음날인 넷째날에 폭설 예보가 있어 셋째날에 다녀오는게 나을 것 같아서 설산 하이킹 장비를 빌려 길을 나섰다.

  다운타운을 지나서 레이크 루이스로 향하는 보우밸리 파크웨이에 들어섰다. 레이크루이스에는 고속도로로도 갈 수 있지만, 보우밸리 파크웨이는 고속도로 옆 침옆수가 가까이에 빼곡한 작은 길로, 야생동물이 많이 지나다녀서 시속 50km 정도로 느리게 다녀야 하는 길이기에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느릿 느릿 움직이고 있는데 진눈깨비가 심상치 않았다. 예보에 따르면 적설량이 많지 않아야 하는데 시야를 가릴 정도로 많은 진눈깨비가 질퍽하게 휘몰아쳤다.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오직 우리의 차만 30km의 속도로 느릿 느릿, 겁에 질린 채 이동할 뿐이었다. 일방통행인, 한 차선밖에 없는 길에서 우리는 돌아갈 수도 없고, 멈춰서 있을 수도 없었다. 돌아가려면 좀 더 가서 이 길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 때 갑자기 차가 기우뚱 흔들렸다. 남편이 긴장한 목소리로 핸들이 종종 흔들린다며, 진눈깨비가 너무 빨리 쌓여 길이 미끄럽다고 했다.

그 때 뒤에서 시설관리 트럭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우리 차 옆으로 옮겨오길래 차를 멈춰 창문을 내렸다. 도로 시설 관리자가 우리에게 겨울용 타이어가 아니라면 돌아갈 것을 권한다고 했다. "내가 권하지 않아도, 어차피 돌아가고 싶을걸?" 웃음기 있는 말투였기에 아주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조금쯤 안도했지만, 관리자의 조언에 따라 차를 돌릴 수 있는 곳까지 좀 더 가서 고속도로를 타고 돌아가기로 했다. 여행 중 아주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는 편이지만 변화무쌍한 밴프의 날씨라던가 겨울의 도로 상태에 대해 경험치가 부족했던 우리는 꽤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다운타운에 돌아왔다. 아침 7시 30분에 호텔을 나왔는데 다운타운에 다시 돌아오니 10시 30분이었다. 진이 다 빠진 우리는 일단 아웃도어 용품점에 돌아가서 혹시 장비 빌린 것이 환불이 되는지 물어봤다. 환불이 안되면 내일 날짜로 바꿀 수 있는지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직원은 아주 흔쾌히 환불도 되고, 내일 날짜로 바꿨다가 내일도 폭설로 장비를 쓰지 못하면 그 때도 환불이 된다고 했다. 우리는 내일이라도 꼭 얼음 폭포 하이킹을 하고 싶었기에, 고맙다며 내일로 장비 대여를 미루고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3시간 동안 너무 지쳤는데 친절한 직원 덕에 기분이 나아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밴프에서 일을 하면 저렇게 친절하고 여유있어지는 걸까? 사람들에게 좀 더 친절하자고 다짐하며 근처 카페에 들어가 핫초코와 모닝 샌드위치를 먹었다.


  따뜻하고 짭짤한 음식으로 기운을 차린 우리는 기념품 쇼핑을 미리 하기로 하고 캐스캐이드 산이 그림처럼 드리운 다운타운의 상점가를 돌아다녔다. 지난 여름 밴프에 왔던 가족들이 설퍼산이 그려진 캠핑용 잔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몇개를 더 고르고, 샐러드에 뿌려 먹을 발사믹 식초를 샀다.


  아침 일찍 나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힘들기만 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이 여행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꼭 하고싶긴 하지만 몇 달 동안 염원하며 꼭 하고싶었던 일은 아니고, 장비를 빌리는 장소도 밴프에 와서 확인하고, 셋째날 그 곳에 가기로 한 것도 밴프에 와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계획형인 나는 계획이 틀어지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딱히 열심히 계획하지 않은 상황에선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아 무엇하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크리스마스 무드가 가득한 상점들을 구경하며 기분이 좋아져서는 오후 2시 쯤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 저녁 6시에는 In search of christmas spirit이라는 조명 행사에 가는데 그 전에 좀 쉬고 싶었다. 남편은 일찍 일어나 한껏 긴장한 채 3시간을 운전해서인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뻗어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혼자서  야외 핫텁에 갔다. 어느새 진눈깨비는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모든 고민과 걱정이 사라지는 듯 했다. 눈이 초록 나무에 내려앉는 것을 한참을 바라보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는 어제 투 잭 호수 근처에서 보았던 풍경 속 엘크들을 그렸다. 숙소의 커다란 창 밖으로는 눈이 펑펑 내리고, 나는 아늑한 실내에서 낯선 풍경을 그리는 것. 이 자체로 비일상이 아닌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보니 남편이 깼다. 그 때쯤 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눈이 쌓인 침엽수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행사 시간 전에 숙소 근처를 산책하려고 남편과 함께 밖에 나갔다. 10센치 넘게 쌓인 눈을 밟으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나무가 많은 곳을 따라 가다보니 공터가 나왔고 피크닉 테이블들이 놓여있었다. 종종 캠핑카도 보였다. 우리 숙소 바로 옆이 밴프 터널마운틴 캠핑장이였다. 눈 덮인 고요한 캠핑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세 네대 정도의 캠핑카가 보였다. 자주 눈이 오는, 겨울 왕국 같은 밴프에서 캠핑하는 건 어떨까? 이렇게 고요한 눈 위를 저벅 저벅 걸으며 하얀 여백을 누릴 수 있겠지? 이 곳에서의 겨울 캠핑이, 해본 적도 없는데 그리웠다. 언젠가 우리가 이곳으로 캠핑올 수도 있지 않을까. 전에는 떠올려 본 적도 없는 삶을, 미래의 어느 날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게 실감이 났다.

 


  행사 시간에 맞춰 산책을 마치고 길을 나섰다. 이번엔 롬 버스를 타고 가느라 마음이 가벼웠다. 행사장은 다운타운에 있는 케스케이드 가든이었는데, 예약한 시간에 QR코드를 보여주자 전등을 주었다. 전등을 들고 조명으로 가득한 정원을 돌아다닌다니 너무 귀엽고 낭만적이었다. 별 다른 기대 없이 간 그 곳은 내가 평생  경험한 어떤 크리스마스 행사보다 즐겁고 행복했다. 행복함과 사랑이 가득한 크리스마스 정신을 잊은 상황에서 부엉이가 곰, 엘크, 청설모, 늑대 등 동물 친구들을 모아 크리스마스 정신을 되찾아 사람들에게 전해준다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길을 따라 걸으면 한 마리씩 나타나는 동물들, 배경 음악으로 들려오는 늑대의 울음소리나 새 소리, 물 소리 같은 것들이 신비로웠다. 오로라가 춤추는 하늘과 밴프에만 산다는 달팽이들이 이동하는 강물 같은 것들로 꾸며진 조명이라니, 야생 동물을 사랑하는 곳 다웠다. 사람도 많지 않게 예약을 받아서 한가롭게 정원을 거닐며 기쁨의 크리스마스를 한껏 만끽할 수 있었다. 걷다 보니 어떤 다리 위에서는 한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에게 청혼을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고개를 돌려 흥분한 듯 프로포즈라고 알려주었다. 누군가의 행복한 순간을 우연히 마주하고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진 우리는 박수 치고 환호하며 그들에게 축하의 마음을 건넸다. 그들의 앞날이 함께 다정했으면 좋겠다.

  한 시간동안 정원을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 아침의 고생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밴프에 오길 잘했다, 12월의 밴프는 반짝 반짝 연말 분위기에 기분이 너무 좋아지는 것 같다 생각하며 맛있는 화덕 피자를 먹고 캄캄한 밤 셋째날을 마무리 했다.

  

  촘촘한 계획을 짜고,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까봐 혹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자주 스트레스를 받던 나는 이번 여행 중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더라도 괜찮을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번 여행이 별다른 계획 없는 즉흥 여행이라서 금방 다른 즐거움들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캐나다에서 1년 반 사는 동안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겪으면서, 나쁜게 나쁜 것만은 아니고 좋은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걸 자주 느꼈기 때문이지 않을까? 오늘 하루만 해도, 예상치 못하게 많은 진눈깨비 덕에 일정을 포기하고 돌아왔지만 그 덕에 친절한 사람에게 감동하고, 혼자 고요히 누리는 야외 온천과 그림그리는 시간을 가졌다. 체력이 남은 덕에 저녁의 조명 행사를 기쁘게 즐겼다. 무엇보다, 진눈깨비가 하얀 눈으로 바뀌어 온 세상을 동화처럼 하얗게 바꾸어 놓았다. 그 덕분에 다음날 온통 아름다운 레이크루이스와 설산을 경험할 수 있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 낯선 곳에서 살고 여행하며 이런 마음가짐을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깨닫고 있는 덕에, 반 년 후면 한국에서 펼쳐질 많은 일들이 괜찮게 느껴진다. 한 때는 불안증이 있었던, 많은 것을 미리 걱정하느라 늦은 새벽까지 잠 못 들던 나는, 내 마음이 천천히 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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