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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의 폐허 위에 현상이 그려진다.

by 황금지기


정원을 망치는 잡초일 뿐인 예측을 꺾으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솎아내면서 넘을수록 비슷한 길이 이어지면서 쉬워지게 된다. 속도는 성급함과 욕심에 닿아있으므로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원칙을 지키면서 잘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이타심, 과정에서 한 권의 지식보다 내면에서 정제된 한 줄의 지혜가 인생을 바꾼다. 확률에서 전체를 먹고자 아님을 용납하지 않는 건 오만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정신은 예측할수록 탁해지고, 행할수록 맑아지게 된다.




물론 시장은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반영하지 않거나 잘못 해석하기도 하고, 모든 투자자가 합리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투자자들의 감정, 편견 그리고 오류가 숱하게 시장의 효율성을 저하하므로 행태 재무학 관점에서의 비합리적 행태가 지속되기에 투자 심리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시장을 바라보는 창으로 그려지는 파동이란 도구를 선택했다면 두 가지 가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산의 가격과 기대수익률은 이미 공개된 모든 정보를 반영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위험을 부담하지 않고서는 더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미 공개된 모든 정보를 반영한 것이기에 가격을 정확히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므로 가격 변동을 예측할 수 없다는 유진 파마의 「효율적 시장 가설」과 주식 가격의 변화는 술에 취한 사람이 걷는 모양과 마찬가지여서 예측할 수 없으며, 주가는 마치 동전 던지기처럼 무작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추세나 반전 신호를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허사이며 추세도 우연한 흐름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랜덤워크(random walk) 가설」에 따라 그려지는 파동을 바라보아야 한다. 즉 예측하는 마음이 죽어야 현상을 관조할 수 있고, 오랫동안 사색한 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예측의 폐허 위에 현상이 그려지게 된다. 파동을 그릴 때는 정원을 망치는 잡초일 뿐인 예측을 꺾으면서 생각을 끊임없이 솎아내야 한다. 그려지는 파동에 있어 최대의 적은 뉴스나 정보, 생각이나 판단으로 개입하려는 자기 생각이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올바른 투자자가 되려면 자꾸만 끼어드는 ‘예측’과 너무 자주 외면하게 되는 ‘순응’의 갈림길에서의 숱한 시행착오들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에서 현상에 순응하는 보물 의지를 캐내야 한다. 현상의, 현상을 위한, 현상에 의한 사고가 가고자 하는 궁극의 투자 심리다. 사람마다의 선택이겠지만, 파동이란 창을 확률적 도구로 선택했다면 확률적 우위 = 대수의 법칙 = 반복을 믿고, 파동을 그리면서 유리한 방향으로 저점이 높아지거나, 고점이 낮아지는 자리에서 (예측을 포기하고)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증명해 가야 한다.




대부분 투자자는 멀리 보이는 산을 기법으로 넘으려 달려들지만, 산 아래 길게 펼쳐진 감정의 골짜기가 너무 깊고 멀다. 눈 아래 걸어가야 할 골짜기에 집중해야 하지만, 대개의 눈은 멀찌감치 산만 쳐다보기에 넘어지기 다치고 깨지고 돌아서기 일쑤다. 익숙해지기 전에는 눈앞을 똑바로 직시하면서 하루하루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지만, (나아가다 보면 익숙해지지만) 성급함은 산을 향해 달음질치고 있고, 욕심에 눈이 멀어 감정의 골짜기에서 먼 길을 가지 못한 채 멀리 보이는 산은 결국 신기루가 되고 만다. 산 아래 골짜기는 지나는 이의 마음이 성급할수록 험해지고, 마음에 욕심이 더해질수록 안개가 더해져서 보이던 길도 보이지 않는 법인데 그 마음을 넘어서는 건 나중의 일이고, 이 자연스러운 이치를 깊이 깨치지 못하는 마음들이 더 많다. 한참을 간 것 같아도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걸 경험하면서 알게 되지만, 산 아래 골짜기의 형체가 비슷해서 (그려지는 파동들이 비슷해서) 몇 개의 골짜기를 천천히 또박또박, 지나다 보면 비록 목까지 숨이 차올라 유혹을 이겨내기 힘들지만 힘들어도 넘어가야 한다. 넘기만 하면 비슷한 길이 이어지면서 쉬워진다는 걸 이미 지나간 자들이나 마음을 다잡고 건너가는 자들은 알고 있다.




결과는 염 감독의 계산과 반대로 흘렀고 역전패로 돌아왔다. 염 감독은 "나로서는 높은 확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라면서 "야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책임은 감독이 지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LG트윈스의 염 감독은 "이제 이우찬에게도 시간이 많지 않다. 14년을 해왔는데 달라지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하다간 똑같지 않겠나"라며 "생각을 바꾸고 야구에 접근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고서는 그렇게 끝날 수 있는 확률이 높으므로 완전히 바꿔봐야 한다. 그래도 147㎞의 빠른 공을 갖고 있으니 해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야구도 그렇듯이 파동도 생각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깊이 이해해야 비로소 책임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게 되고, 책임이 전제되어야 게임을 지속하게 된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접근하는 방식을 뜯어고쳐야 내일을 논할 수 있게 된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있으니, 끈기는 변화를 의미하니 마음에도 조만간 새로운 싹이 트게 될 것이다.




책임의 무게를 알기 때문에 모든 선택과 집중이 두려웠다. 남의 합리적 선택을 무작정 따라 할까? 하다가도 완전히 같은 삶은 없기에 비슷한 상황에 놓인 사람의 선택도 참고서일 뿐, 정답지가 아니었다. 정답지가 없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오답이 없다는 것도 기쁜 일이었다. 채점자가 나라는 것도 다행인 일이었다. 그 어떤 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늘 최선을 다해 고민했고 그 선택에 책임지고 있으니까. 근저에는 늘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나는 틀릴 수 있다. 단박에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고 생각하고 있어야겠다. 다만 나아가야지. 가로막히거나 웅크리는 건 잠시일 뿐이다.

<무명의 감정들>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반복으로 이어지게 하는 건 지식이 지혜로 정제된 통찰이다. 아무 생각이 없거나 보잘것없는 감정들이 만들어 낸 생각만으로 꿈꾼다면 투기판이 되고, 도박꾼에 불과하겠지만, 흐름을 볼 줄 알고 흐름에 순응할 수 있으면 투자자다. 마르지 않는 큰 강의 수원지 옹달샘처럼 솟아나는 생각대로 매매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멈추지 않으면서 불쑥불쑥 개입하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흐름에 온몸을 맡기는 건, 자신과 흐름의 균형이라는 건 절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오직 내면에 다가서기 위해서라도 원칙을 지키면서 행해야 한다. 투자자는 항상 당장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이 정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걸 가장 경계해야 한다. 선을 일단 넘으면 좀처럼 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맞추는 것보다도 못 맞추었을 때 최악을 피하는 게, 감정을 추스르는 게, 빨리 끊어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




산책의 본질은 사색이다. 사색 과정에서 무아를 자주 만나게 된다. 무아 상태의 시간의 합만큼 영혼은 살찌고 인간은 성장한다. 건강을 위한 산책의 본질이 사색이듯, 부자가 되기 위한 투자의 본질도 자신 내면으로 향하는 사색이 되어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고, 복리의 마법을 즐길 수 있다. 네발짐승은 빠르게 달릴 수 있지만 빠르게 달리면서는 체온을 내릴 수 없어 오래 달릴 수가 없다. 네발짐승의 속도는 생존의 필수조건이지만, 자본주의를 사는 투자자는 속도만 배제하면 산책을, 투자를 끈기 있게 즐길 수 있다. 네발짐승에게 속도가 있다면 인간에게는 지구력이 있다. 엉덩이의 진짜 가치는 인간이 꾸준히 먼 거리를 달리게 해 주는 지구력이다. 인간은 엉덩이의 꾸준함이 주는 힘으로 세상을 살아감이 옳듯이, 투자자도 ‘똑똑함’에 의지한 속도보다는 ‘꾸준함’에 의지한 끈기로 승부를 보아야 한다. 속도는 성급함과 욕심에 닿아있지만, 끈기는 기다림과 대응에 닿아있다.




진입한다는 건 손실이면 짧게 자르고, 이익이면 길게 챙기면서 계단을 오르기 위한 과정이지만, 대개 성급함을 극복하는 훈련이 되지 않거나, 욕심의 무게에 눌러 주저앉아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를 소망하면서 기도하게 된다. 성공한 투자자의 우상향 곡선은 숱한 지그재그로 이루어져 있다. 큰 파동을 쪼개어 보면 순간순간 심리들이 부딪친 지그재그 등락으로 가득하듯이 말이다. 대부분 원칙의 공통 분모는 고점매도와 저점매수, 짧은 손실과 긴 이익이라는 두 가지 맥락일 것이다. 원칙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유로워지며, 자유로움이 더해진 시간은 그려지는 파동을 선명하게 만든다. 말수가 줄어들수록 글은 깊어지듯이, 뇌동과 추격이 줄어들수록 원칙의 깊이는 더해진다.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 똥을 스스로 치우는 게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을 지킨다는 건 자신의 자유의지가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책임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이기에 이타심(利他心)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건 좋은 것을 남기는 일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수많은 부정적인 것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중략) 세상에 타고난 좋은 작가는 별로 없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보다 자주 고쳐 쓸 뿐이다. 그래서 좋은 작가 중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매일 고쳐 쓰면서 자신의 일상에 존재하는 보기 싫은 부분도 함께 고치기 때문이다.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김종원>

투자 심리를 위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건 투자를 잘하기 위한 일이지만 반대로 자신도 몰랐던 자신 안의 수많은 부조리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투자는 인간의 본성과 대척점에 있는 행위이기에 타고난 투자자는 드물다. 성공한 투자자는 훌륭한 작가가 그러하듯 인문학적 소양으로 ‘진입하고, 자르고, 챙기고, 갈아타고’를 반복하면서 태생적으로 타고난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나간다. 투자에서 잘못된 습관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감정 즉 이기심(利己心)에서 비롯되므로 잘못된 습관들을 고쳐나가는 과정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 투자를 잘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이타심(利他心)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해외선물을 대상으로 10분봉을 기준으로 파동을 그리겠다고 가정한다면, 파동을 그릴 때 현재 주가가 모든 걸 담고 있으므로 예측할 가치는 없다는 관점이 명확해야 생각 없이 파동을 그릴 수 있다. 다만 비합리적인 참여자들 감정선의 충돌이기에 관성을 가지게 되므로 유리한 방향으로 본다는 건,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본다는 건 확률적 사고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아무리 좋아 보여도 몇 번을 연속해서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게 확률이기에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건 아무리 유리해도 추격해서는 안 되며, 역매매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런 자리가, 보내야 하는 자리가 많지만, 꽂힘과 보냄은 공존할 수 없다. 꽂힘은 끝장과 맥이 닿아있다. 예측은 꽂힘과 궤를 같이하고 꽂힘의 시간만큼 우하향하게 되기에 생각 없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심리가 전체를 좌우하게 된다. 인간은 대개 말을 많이, 잘하기 위해 지식을 욕심내지만, 말을 적게 할수록 정제되는 지혜의 순도는 높아진다. 한 권 분량의 지식이 아니라 각자의 안에서 고도로 정제된 한 줄의 지혜가 인생을 바꾸는 법이다. 지식을 지혜로 정제해 내기 위해 내면으로 다가서는 과정에서 원칙은 선명해지면서 지혜가 된다.




안다고 생각한다는 건 모른다는 증거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말 중 하나가 ‘안다’라는 표현이다.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걸 실천하기 위해 몰입하느냐 말할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입으로만 아는 사람이 거만하게 안다고 말하며 정작 실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아는 것이 거의 없을 때 정확하게 안다고 착각한다. 남과 다르게 또 깊이 있는 글을 쓰려면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의심의 대지에 올라서야 한다. 앎과 함께 의심이 늘어나는 이유는, 실천해서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곳이 보여서이다. 의심은 해 본 사람만 발견할 수 있는 실천의 부스러기다.

<글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조금만 매매해 보면 쉽게 알게 된다. 안다는 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어설픈 앎이 더해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어설프게 알기에 하는 것보다는 몰라서 못 하는 게 오히려 약인 경우가 시장에서는 훨씬 많다는 것을. 지금 존재하는 건 저 멀리 있는 이상이 아니라 오늘이라 영원을 사는 현재의 ‘나 자신’이다. 사람은 말을 아끼고 매일 세수하듯이 독서라는 행위로 머릿속을 씻어야 현명해진다. 말하고 싶은 것들을 참아내고 그냥 행하면서, 행동으로 내면으로 걸어가야 현명해진다. 정신은 말할수록 탁해지고, 행할수록 맑아지는 법이다. 세수하듯 책을 읽어야 글은 깊이를 더해가게 된다. 쓰인 글들이 실천으로 이어져야 글은 쓰임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있어야 공감을 얻게 된다. 즉 쓰기 위해 읽고, 쓰고 실천하면 공감을 주는 이야기가 된다.




전체 주식 계좌 중 수익이 나는 계좌는 1% 남짓이라고 한다. 감정을 극복하면서 원칙을 소신 있게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투자하는 이가 과연 1%나 될까? 사람은 각자가 다른 나무라고 여기고 있는 그대로 거리를 두는 게 현명한 건,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 바꿔 쓰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는 건 변화는 1%의 확률이기 때문이다. 1%를 보고 시간을 투자한다는 건 지극히 비상식적이지 않은가? 투자자 중 1%만이 본성을 극복하고 성공의 궤적을 그리지 않는가? 1%의 소수의 길이기에 투자는 어려운 것이지만, 5,000만 명의 1% 즉 50만 명 안에 들어가면 된다고 달리 보면 마음에 여유가 조금은 생기게 된다. 원칙을 지킨다는 건 만족하는 법을 안다는 의미다. 전체를 아우르면서 담고자 할수록, 아님을 용납하지 못할수록 오히려 원칙을 지킬 여지는 적어진다. 확률을 다루면서 전체를 먹고자 아님을 용납하지 않는 건 오만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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