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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는 지키면서 탐구하는 행위다.

by 황금지기

실천은 망설임이 아니라 행동이며 실수를 되풀이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면서 탐구하는 그것이 투자 행위다. 우리의 뇌는 일단 모험을 감행해서 적응하게 되면 여유로워지므로 잃지 않는 시작점에서 올바른 매매에 관성을 붙여가면 된다. 진실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 너머로 그저 원칙을 지켜보는 그 마음과 다르지 않으므로 투자 잘하는 사람은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다. ‘원칙의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면 많이 틀리고, 자주 실수하는 걸 참아내야겠지.’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어려웠다.’ 이것이 투자다.




양귀자 작가는 「모순」 1장 ‘생의 외침’을 이렇게 시작했다. '이런 것이 운명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찌 되돌릴 수 있으랴. 인생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 (중략) 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리고 작가는 마지막 17장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영원회귀는 인생은 짧지만, 순간은 영원하다는 의미이지 않겠는가! 순간은 무한히 반복될 영원의 시간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반복되는 순간마다 순간을 맞이하는 자신을 부수고 새로운 순간을 창조하는 주인이 되라는 게 니체의 망치이지 않겠는가! 지금과 여기 그리고 현상을 마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또다시 무한히 반복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래의 순간들은 지금의 매번의 선택이나 의지로 변하지 않겠는가! 지금껏 시장에서 꿈꾸면서, 사색하면서 또 그렇게 실수하거나 실패의 연속인 건 실패는 성공을 위한 서사이기 때문이다. 투자에서 원칙을 지킨다는 것 역시 탐구하면서 지키려고 애쓰는 대상이 아니다. 투자는 원칙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키면서 탐구하는 행위다. 실수가 끝없이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이 투자 행위다.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 네가 하는 박사 공부는 그렇게 단순한지 모르겠지만, 네가 살아보는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어. 나도 아직 잘 모르지만.”

<모순 – 양귀자>

돌이켜보면 그동안의 파동이 늘 그랬다. 파동이 등락하는 건 바라보는 누군가의 바람에 따라 ‘좋았다가 나빴다’를 반복할 뿐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질 것이 있다면 그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다르게 행동하는 것, 그 실천만이 달라짐이다. 당연히 아주 자주 생각처럼 되지 않을 것이며, 시장이 도와줘서 화창한 날도, 틀리거나 아니어서 비 오는 날도 엇비슷할 것이다. 비가 오는 그런 날이어도 이미 비 맞을 각오를 하지 않았는가! 그런 빗속에서도 똑같은 속도로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먹구름 사이의 햇살이 비칠 것이다. 실천은, 변화는 망설임이 아니라 행동이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두 가지가 있어요.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관성.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이유는 이 두 가지밖에 없어요. 천성과 관성.”

<삼식이 삼촌>

인생에서 익숙한 것들에서 벗어나기란 절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천성은 각자의 인생 디폴트값이기에 천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지만 후천적인 경험들과 어우러지게 되고 후천적 경험은 관성을 가지게 된다. 지금까지의 삶을 보면, 오늘의 행동을 보면 앞으로의 궤적을 대략 짐작하게 되는 것도 이것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의 뇌에도 관성이 작용하므로 일단 시작하면 그 일을 계속하게 된다. 천성에 따라 이미 관성이 붙은 돈이 되지 않는 (앞으로도 돈을 벌기는커녕 잃어버리기 일쑤인) 투자 행태들을 올바른 습관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금의 관성을 일단 멈추어 세워야 한다. 투자자가 인간 본성에 기인한, 나쁜 습관들로 거듭되었던 매매를 멈춘다는 것 그 자체로 본성을 이겨내는 위대한 성장이며 창대한 시작점이자 잃지 않는 투자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잃지 않는 그 시작점에서 다시 올바른 매매에 관성을 붙여가면 된다. 인생은 짧지만, 투자자에게 있어 찬란한 원칙을 지키는 하루하루라면 누적을 쌓아갈 시간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누구도 지금 마음속 간절함의 크기나 지속 시간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최선은 그저 시간과 확률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원칙을 다룸에 있어 최선 중의 최선은 손실이라는 불편함을 받아들이면서 반복하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에 지는 것이다.’ 투자에 있어 불안과 고통, 슬픔을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은 red zone(손실 상태)으로 들어가면 그 매매에서 빨리 지는 것이다. 여력이 있음에도 패배를 받아들인다는 게 어찌 쉽겠냐마는 투자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손실을 끊어내야만 반복할 수 있고 원칙이 살아 꿈틀거리면서 성장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항상 편한 길을 찾게 되지만 일단 모험을 감행해서 적응하게 되면 여유로워지게 된다. 본성을 거슬리면서 불편한 행위를 지속하기가 물론 어렵겠지만, 뇌가 새로운 상황이나 습관에 적응하기만 하면 더는 많은 에너지를 할애하지 않아도 되므로 쉽게 이어갈 수 있게 된다.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그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 준 주리였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모순> 밀도는 무게에 비례하고 부피에 반비례한다. 각자의 삶에서의 밀도는 (자기에게로 향한 깊이는) 경험에, 지혜에 비례할 것이다. 인생에서의 자기에게로 향한 깊이만큼 진중함에 비례하게 되고, 인생의 필연적 가벼움과 반비례하게 될 것이다. 투자자의 실력의 부피를 늘려주는 건 행복한 상황(수익이 났을 때)보다는 자주 맞닥뜨리는 불행한 상황(손실이 났을 때)에서 행한 행위들이다. 양귀자 작가는 「모순」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투자자의 원칙에 대한 사랑 또한 손실 상태에서의 붉은 신호등이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모순>

어려운 줄 알면서도 자꾸만 파고드는 이 모순, 이 모순을 견뎌내면서 우리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이를 것이다. 시장은 복잡계이기에 단순할수록 투자에 유리하다. 단순하다는 건 명확하다는 것이고, 명확하다는 건 이해하기 쉽다는 의미다. 이해하기 쉬워야 행동으로 옮기기 쉽고, 원칙은 행동의 반복으로 단단해지게 된다. 시장에서 단순하다는 건 복잡계인 시장을 자신의 잣대로 명확하게 정리하고 핵심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에 닿았음과 맥을 같이하게 된다. 간결하고 명확한 지침을 자신에게 전달할수록, 단순하고 명료하게 이해할수록 행동할, 지속할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게 된다. 투자 잘하는 사람은 본질에,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다. 확률의 본질은 반복에 있기에 시장에서 말하는 기본 중의 기본은 원칙을 지키는 단순함이다. 복잡함과 단순함 그 사이의 모순을 채워가는 게 실천이다.




양귀자 작가는 모순 – 생의 비밀을 찾아서라는 「작가 노트」에서 모순을 이해할 때 본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조언한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러운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중략)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을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며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이 본질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투자자의 일생은 투자하는 마음속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여정이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감정이 수긍하지 않으면, 감정을 설득할 수 없다면 절대로 실천도 없기 때문이며 투자의 어려움은 기법을 제대로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모르는 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듯, 투자자가 시장의 흐름 즉 파동과 친해지기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한 법이지만 대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자기 안에서 솟구치는 게 앞서기만 하기에 좀처럼 파동과 나란히, 다정하게 걷지 못한다. 자기에게로의 여정을 오랫동안, 끝까지 함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자신이 정한 원칙을, 그려지는 파동을 믿어야 하지만 탐욕이 믿음을 앞서기에 믿는 마음에 안개가 자주 끼게 되면서 흩어지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은 바라는 것들 너머로 그저 자신의 마음을, 원칙을, 현상을 지켜보는 그 마음이다.




자주 가던 건재상의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사장은 늘 HTS를 통해 매매하고 있었고 그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원칙에 관한 것이었고 ‘아직도 가끔 어기지만, 잃지는 않아요.’ 그의 말은 분명히 옳다. 대부분은 가끔 지키는 게 원칙이지 않은가! 대부분이 행복하거나 기분 좋을 때 가끔, 정서적으로 상상할 때 자주 지키는 게 원칙이지 않은가? 투자라는 도구를 통해 생의 원칙을 지키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원칙의 원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면 많이 틀리고, 자주 실수하는 걸 참아내야겠지. 틀림이나 실수가 원 안에서 일상처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응원해야겠지. 반복이 가져다줄 것들을 기대하면서, 원칙을 지켜가는 시간이 해내는 일들을 기대하면서 말이지.’ 노자 「도덕경」의 말씀처럼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세상의 큰일은 작은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꽃인 자본시장의 돈을 다룸보다 자본주의에서 더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그러기에 투자자로서 노력하는 가치는 충분하다.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어려웠다.’ 투자 행위를 선명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요행을 바라면서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돈을 탐하는 게 도박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위험을 안전으로 바꾸어가는 과정에서 도박으로서의, 투기로서의 행위와 투자로서의 행위 그 갈림길이 있다. 원칙을 지키느냐! 흐름에 순응하느냐! 반복하느냐! 이 답은 오롯이 현상에 있다. 어리석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뜻하는 사자성어인 우문현답(愚問賢答)을 달리 ‘우리의, 투자자의 문제는 현장에, 현상에 답이 있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투자에서 파동을 그리면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에 와닿는 좋은 단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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