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의 두께만큼 돈도, 인생도 두툼해진다. 자리를 아는 게 지식이라면 원칙을 지키면서 그 자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게 지혜다. 매번의 결과라는 인연을 덤덤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 확률은 딱 부러지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지혜의 벤치에 앉아 큰 흐름을 보면서 계속 지속하는 게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닿는 유일한 길이다. 본성이 때를 만나지도, 여물지도 못해서 현상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한다. 똑똑함은 성급함에 치우쳐 있지만, 기다림에 기댄 꾸준함은 기대수익 ≥ 위험 공식으로 향한다.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과정에서 숱한 선인들의 선례를 귀담아들어 보면 결국 투자는 기본에 수렴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기본이란 기업의 실적이나 금리 등과 같은 경제나 상품 자체의 기초체력이 한 축이 되고 나머지 한 축은 사고파는 자신의 심리가 될 것이다. 먼저 앎을 발품 팔아 구해야 하지만, 결국에 앎의 쓸모를 결정하는 건 심리다. 그러므로 돈 = 추세 – 심리 = 관성의 법칙 – 편향의 극복 = 대범함 – 무모함 = 원칙을 지키는 기술 공식으로 돈 버는 방법을 정의할 수 있다. 움직이는 모든 물체는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을 파동도 따르기에 추세는 곧 관성을 의미하며, 확률의 세계에서 관성을 그대로 따르기 위한 필수조건은 투자하는 마음이 타고난 장애물인 편향의 극복이다. 태반의 투자자가 대범함과 무모함을 가르는 선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무모함에 많이 치우치기에 대부분 계좌는 마이너스 상태로 쭉 이어지게 된다. 정답이 없는 시장에서 옳음과 그름을 가르는 잣대가, 대범함과 무모함을 선명하게 가르는 선이 원칙이며 그 선의 두께만큼 돈도, 인생도 두툼해지게 된다. 결국 원칙을 지키는 기술을 섬세하게 감각적으로 다져가는 게 투자자의 공부다.
시도한다는 건 불확실성과 맞서 싸우는 과정이다. 무모하지 않도록 체계적인 훈련 과정을 통해 위험을 줄이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면서 길을 모색하는 숱한 과정에서 시도는 진솔함을 가지게 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해 보지 않았으니 불안이란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니 언제나 최선은 실천하면서 무게를 줄여가는 것이다.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안 된다는 걸 증명하기란 불가능하지 않은가! 실천은 마음속 불안을 퍼내는 삽이다. 불안하기에 두렵고, 망설이다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다. 실천하지 않으면 길은 끝까지 보이지 않는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꿈꿀 뿐이다. 해외선물 데이트레이딩이 대상이라면 매일 시도는 거듭된다. 고만고만한 자리에서 많이 시도한들 제자리걸음일 뿐, 확률 높은 자리를 알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자리를 아는 게 지식이라면, 그 자리를 기다릴 줄 아는 게 지혜다. 지식은 요란해서 군중이 알 수는 있지만, 지혜는 고요해서 그 깊이를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지혜는 삶의, 투자의 숱한 난관들에 대한 두려움을 뚫고 나가게 하는, 난관이란 닫힌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다. 지혜는 감정의 높고 낮음의 편차를 적게 유지하는 통찰이자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진중함을 더해주는 무언가다. 여기서 진중함이란 자기 통제가 뛰어나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결국 진중함이란 결과를 인연으로 맺으면서, 지혜를 더해가는 것이다. 인연(因緣)에서 ‘인(因)’은 원인을, ‘연(緣)’은 조건을 의미한다. 결과 = 인연 = 원인 + 조건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며, 여기서 원인은 내적, 직접적 원인이 되고, 조건은 외적, 간접적 원인이 된다. 내적 원인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고,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심리이고, 외적 원인은 통제 불가능한 현상이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조건이 있기 마련이고, 원인은 씨앗이고, 조건은 물과 햇볕, 영양분 등의 주변 환경이다. 시장에서 끊임없이 거듭되는 매매란 이름의 인연들, 결국 결과는 인연의 연속일 뿐, 수긍의 대상일 뿐, 니체의 말처럼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대상일 뿐이어야 한다. 다만 자신을 알아가면서 내적 요인들을 조금씩 변화시키는 치열함과 더불어 말이다. 결론적으로 결과 = 치열함 + 덤덤함의 합이어야 한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치열해야 한다. 덤덤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인연을 이어가야 할 대상이 매번의 결과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
세상사 호사다마(好事多魔)다. 시장에서 탐구하는 투자자에게 딱 맞는 명언이지만, 그럼에도 사색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손실을 더 짧게, 횟수를 더 적게 하기 위함이고, 이익을 더 길게, 더욱더 길게 가져가기 위함이자 선인들의 지혜로 좀 더 지혜로워지기 위함이다. 선인들의 선례가 주식시장만큼 말씀 그대로 지금까지, 앞으로도 이어질 곳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자신에게로 다가서는 도구로써 투자만 한 게 자본주의에서 또 어디 있겠는가! 그대가 마음만 다잡으면 온 천지가 지혜로 가득한, 찬란한 햇빛이 눈부시게 빛나는 해변으로 이끌어 줄 도구가 또 있겠는가! 일상의 선택이 쌓이면 습관이 되고, 인생의 선택이 쌓이면 결국 그게 현재의, 미래의 자신이지 않겠는가! 확률적 선택의 반복인 투자에서는 오늘의 책임이 쌓이면 습관이 되고, 매번의 책임이 쌓여 결국 투자하는 마음이 되고, 투자의 목적 즉 부(富)로 시간을 사는 선순환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확률을 다룸은 딱 부러지지 않기에 필연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선택을 책임지지 않는 그것이 노력이 부족하다는, 방황을 방종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삶이란, 투자란 결국 그렇게 변주되는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며 통찰하는 과정이, 침잠하면서 올곧게 나아가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주변 상황과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병세를 악화시킴을, 따라서 불쾌한 사건에는 신경을 꺼야 함을 그도 분명히 알았을 터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스스로 자기에게는 안정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면서 그 안정을 파괴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주고 그래서 안정이 조금이라도 파괴되면 다시 신경질을 냈다. 의학서를 읽고, 의사와 상담하다 보면 병세는 더욱 악화했다. 그럼에도 악화하는 속도가 워낙 완만해서 자신을 속일 수 있었고, 하루하루 비교해 봐도 병세의 차이는 미미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 톨스토이>
뻔히 알면서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게 인간이고, 병듦이나 나이가 듦으로 시간을 빠르게 체감하면서 종착역으로 향하는 게 인생이기에 거듭되는 순간에서 스스로 가치를 찾아가야 한다. 인생도, 투자도 자신을 극복하는 자, 건너가는 자, 자신과 벗하는 자, 고독을 즐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올려다보던 생각의 우물에서 나와 지혜의 벤치에 앉아 큰 흐름을 내려다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저 어린 시절에는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정말로 기꺼이 더불어 살 수 있을 만한, 뭔가 유쾌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유쾌한 것을 누리던 사람은 이미 없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에 관한 추억 같았다. 지금의 그, 즉 오늘날의 이반 일리치를 만들어 준 것들이 떠오르자마자 당시의 기쁨으로 여겨지던 모든 것이 이젠 그의 눈앞에서 싹 녹아 버리며 뭔가 하찮은 것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바뀌는 경우도 잦았다. 어린 시절에서 멀어질수록, 그리하여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그 기쁨들은 더 하찮고 의심쩍게 변했다. (중략) 결혼이란……. 그토록 무심코 한 결혼은 환멸과 아내의 입 냄새, 관능과 가식뿐이었다! 저 죽음 같은 업무와 돈 걱정, 그렇게 일 년, 이 년, 또 십 년, 이십 년, 모든 것이 한결같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죽음 같다. 산을 오른다고 상상하지만, 사실은 꾸준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랬다. 사회 통념으로 보기에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정확히 그만큼 삶은 내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여보시게! 치고받아서는 결국 적은 돈뿐이라네. 치고받음의 목적은 살아갈 돈을 벌기 위한, 원칙을 지키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것이어야 하네. 치고받으면서도 큰돈을 탐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니 늘 엇박자 인생이지 않은가? 호미 쥔 손으로 얻는 건 작아야 마땅한 법, 아닌 도구로 아닌 걸 탐하는 길을 걸으면 결과는 뻔하지 않겠는가? 큰돈은 강물이 바다를 만나듯 시간이 만드는 법일세. (순간순간 욕심의 안개를 걷어내면서, 마치 저축하듯이) 치고받으면서 누적하는 기술이 큰돈을 만드는 쓸모가 될걸세. 치고받으면서, 그렇게 원칙을 지키면서 쓸모를 만드시게. 그 쓸모를 믿어보시게. 치고받는 기교는 적은 돈을 위함이고, 큰돈은 시간이 만드는 법일세.’
시장에서 삶을 캐고 싶다면, 가치를 찾기를 원한다면, 선명하기를 소망한다면 천천히 또박또박 깨달음의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감정의 거의 모두를 배제해야 지속할 수 있다. 계속 지속하는 게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닿는 유일한 길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우물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
파동은 등락한다는 관점 아래 편안한 벤치에 앉아 흔들리지 않고 파동을 그리면서 마디를 취할 수만 있다면 그곳이 사막의 아름다운 오아시스다. ‘파동은 등락한다’라는 것에, 유리한 방향이 확률적이라는 전제를 취했기에 오늘도 정해진 시간에, 아님도 기꺼이 인정하면서 마디를 취하면 그뿐이다. 나름의 각고로 적은 글들도 번호로 저장되면 내 손을 떠나듯 매매도 마디를 떠나 새로운 마디가 완성되면 내 손을 떠나지만, 마디와 마디 사이에서 그렇게 쌓여가다 보면 언젠가 크게 꿈틀거릴 때가 있을 것이다. 똑똑함은 일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똑똑함과 자만심, 그 둘은 죽마고우와도 같기에 투자에서는 똑똑함의 칼끝이 자신에게로 향할 위험이 너무나도 크다. 시간의 가속도를 체감할수록 (깊이가 더해갈수록)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힘이나 열정과 결합한 끈기를 의미하는 grit이란 단어가 참 좋다. 똑똑함은 성급함에 치우쳐 있지만, 기다림에 기댄 꾸준함은 시간을 이해한 자의 영역이다.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 있을 뿐, 논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때 육조 혜능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문관 제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흔들리는 건 바람도, 깃발도 아닌 바라보는 그 마음이다. 지각하는 마음이다. 지각(知覺)은 감각 기관을 통하여 주변에 있는 대상 등을 의식하는 작용 및 이에서 얻어지는 표상(表象)을 의미한다. 혜능 스님의 말은 지각은 대상에 있지 않고, 각자의 마음 즉 필요와 배제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에 표상이 치우치면 현상은 사라지게 되므로 현상에 집중하면서 마음을 다잡아가는 게 투자자의 공부다. 성숙해진다는 건 지각 너머의 현상을 보는 것이고, 지혜로워진다는 것 역시 마음 너머의 현상을 본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무엇인가를 표상한다는 것이 행동의 척도가 되므로 투자자의 뇌동은 표상하는 자신의 문제다. 투자자가 현상을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는 건 본성이 때를 만나지도, 여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위험 감수성은 그만큼의 안정을 포기하면서 경험이나 도전을 선택하려는 성향으로 여기에는 반드시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 즉 현실적인 자기 인식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식 능력이 취약할수록 위험에 취약해지게 된다. 투자하면 할수록 과녁은 심리로 향하게 되고, 선인들의 선례 대부분도 심리로 귀결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다. 시장이 노력과 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복잡계이자 맞음과 틀림의 연속인 확률의 세계이기에 다수의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고, 군중은 절망의 계곡에서 헤맬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자기 인식 능력의 부족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의 깊이만큼 투자 행위는 기대수익 ≥ 위험 공식으로 향하게 된다. 향할수록 안정적 토대는 더욱더 굳건해지게 된다. 지피지기(知彼知己). 투자자에게 있어 지피(知彼) 즉 시장을 이해하는 건 넓이의 영역으로 지식에 가깝지만, 지기(知己) 즉 자신을 아는 건 깊이의 영역으로 지혜에 속한다. 지식이 자기 안에서 지혜로 승화되는 만큼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하게 되고 위험은 비례해서 감소하고 반복은 자연스러움이 더해지게 된다. 몸에 때가 끼듯 (안개가 끼는 것처럼) 마음에도 때가 끼는 건 (그것도 자주) 당연하기에 지식의 폭이 아무리 넓은들 안개가 자주 자욱하기에 자신에게로 파고 들어간 지혜의 깊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투자자가 시장의 흔들림에, 감정의 유혹에 흔들리고 실수하는 건 때가 끼는 것처럼 흔한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실수의 여지를 줄여가기 위해서 속도를, 양을 줄이면서 천천히 또박또박 그렇게 계속되는 오늘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힘들면 쉬어가더라도 지혜의 깊이를 더하는 찬란한 오늘을 살아가는 걸음은 멈춰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