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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금지기 Jul 12. 2024

’ 이타적(利他的) 마음‘이 투자의 토양이다.

현상과 좌뇌의 지껄임 그리고 내면과의 치정의 삼각관계

’ 이타적(利他的) 마음‘이 투자의 토양이다.     


- 부제 : 이상의 깨짐, 좌뇌의 지껄임, 현상과 좌뇌의 지껄임 그리고 내면과의 치정의 삼각관계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행위를 반드시 하는 것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투자는 흐르는 물을 막아서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인간은 평범함 속에서는 이타적(利他的) 존재일 수 있지만, 사랑의 환상에서 깨어날 때처럼 이상이 깨지는 순간 이기적 존재로 돌변하게 되고 좌뇌의 치명적 속삭임의 포로가 된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사랑에 대한 환상도 깨지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 안에 있을 때는 지적인 사람일수록 보다 이타적(利他的)일 수 있지만, 이상이 깨지는 순간 ’ 지성의 배신‘ 그 틈으로 좌뇌의 지껄임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고개를 쳐들고 끊임없이 존재를 알리면서 사랑을 속삭이게 시작한다.     




이상의 깨짐이 주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감정도 흐르는 물과 같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그 순간을 기다려주는 것과 아닐 때 좌뇌가 지껄이든 말든 일단은 짧게 대응함으로써 물이 흐르게 두는 것이다. 이상이 깨질 때 이성은 갈대가 되고 아니라는 좌뇌의 지껄임 그 달콤함에 쉽게 넘어가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란 동물이 지닌 이성의 이중적 구조다.     




우리는 투자라는 행위를 하고 투자는 확률로만 존재하는 파동이다. 확률적 이상은 깨지게 되어 있고, 아쉬워하면서 후회하게 되는 구조다. 이상이 깨질 때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사람도 현상도 흐르는 물과 같은 법, 이기의 늪은 기다리면 사라지는 법, 이상의 깨짐이 삶의 당연한 과정임을 받아들이고 짧게 물이 흐르도록 두는 게 유일한 지혜다.     




우리는 지성을 쌓을 수는 있지만, 지성은 절대 혼자 오지 않는다. 선입견과 편견이란 두 마리를 개와 함께 온다. 그래서 어설픈 지식은 독에 불과하다. 지성이 설명하지 못하거나, 사랑의 환상처럼 깨질 때마다 자기합리화라는 온건한 방법을 택하거나, 화를 내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좌뇌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그 지껄임에 귀 기울이는 순간 교만으로 눈이 멀게 된다.     




우리가 투자를 통해 배워야 하는 궁극은 이상이 깨졌을 때 이기의 늪으로 깊게 발을 담그지 않고 다시 흐르는 물처럼 기다리는 법과 좌뇌의 지껄임을 웃어넘기고 짧게 대응하고 다시 물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는 법이다. 이것은 배워야만 하는 문제이고, 인간의 본성이 타고날 수 없기에 변화시켜야 하는 대상이다. 이상이 깨지지 않은 평범의 상태에서 기다리는 처음의 단계는 배움을 통해 짧은 시간에도 이를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파동을 보는 수준은 비슷하게 되기 때문이다. 파동대로 대응하면서 아쉬움에 헛웃음 짓고 그보다 더한 후회에 한바탕 크게 웃고 후회를 그 웃음에 담아내는 과정이 진정한 배움이고 변화다.     




성공을 논한다는 것은 이상이 깨졌을 때 좌뇌의 지껄임에 대응하고 물처럼 끊임없이 흐를 수 있느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파동은 묵묵히 제 갈 길을 가는 흐르는 물이기에 말이다. 파동 앞에 섰을 때 다짐하고, 그 다짐들이 만들 꿈들이 좋기만 하지만, 결국에 또 맞닥뜨리는 이상의 깨짐과 좌뇌의 지껄임 그러한 반복의 수레바퀴. 우리의 몫은 물과 같이 흐르는 파동에 맞춰 내가 흐를 수 있도록 해주는 기다림과 대응이다.      




물이 흐르기만 하면 인간에게는 최대의 축복인 망각이 있다. 우리가 배우고 훈련해야 할 것은 이기의 늪에 빠지지 않고 망각의 단계로 이끄는 법이고, 끊임없이 파동처럼 자신도 흘러가게 하는 법이다. 평범의 상태가 아닌 이상이 깨진 상태에서, 이기의 상태에서 파동과 같이 흐를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답이 바로 이타적(利他的) 마음이다. 투자한다는 것은 이타적(利他的) 마음을 배우는 과정이고, 인간이 가진 이기를 토해내는 과정이다. 운명적 사랑의 환상이 조금씩 깨질 때마다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받아들임을 배우는 과정이다.      



투자는 태생이 자본주의가 만든 탐욕 덩어리이고 기형아다. 그는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꿈꾸는 만큼 현상을 받아들이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평범한 일상을 내어놓아야 한다고, 그게 꿈의 대가라고, 아니면 자신과 같은 괴물이 될 것이라고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 하지만 늘 맞닥뜨리는 이기의 늪에 빠지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게 인간이다.     




투자에서 상수란 잘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 되어 주어야 하고, 이상이 깨졌을 때 이기의 늪에서 빨리 발을 빼는 사람이다.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이 주체가 되도록 두는 사람이고, 삼인칭 관찰자 시점을 항상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체가 언제 어디서 자리를 내어줄 때 어떻게 하겠다는 원칙대로 그 원칙이 물처럼 흐를 수 있도록 두는 사람이고, 좌뇌의 지껄임이 물의 흐름을 막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다. 우리의 몫은 파동처럼 마음이 흐르도록 두는 것이 전부다.     




상수는 이타적(利他的) 도를 깨친 사람을 말한다. 고수(高手)라기보다는 귀자(貴子)라 함이 옳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는 많이 아는 식자(識者)가 되려고만 하고 있었다. 최소한 현상만 보는 견자(見者)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현자(賢者)는 결과를 대하는 태도가 이타적(利他的) 토양 위에서 굳건한 사람을 말하고 그를 고수(高手)라고 부른다. 잘났다고 지껄이는 다수가 기껏해야 식자(識者)에 불과하고, 견자(見者)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현자(賢者)는 잘난 척할 필요도, 아는 척함은 이미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님을, 결과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임을 알기에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행위를 반드시 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일 뿐이다.     




올바른 매매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기다려주고, 대응해 줌으로써 스스로 항상 흐르는 물과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매일 깨진 이상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이타적(利他的) 마음이다. 기형아의 질투도 매력으로 보여야 비로소 그와 나란히 걸을 수 있게 된다. 지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이리 가면 될 것 같고, 저리 가라고 지껄이고 아우성치지만, 헛웃음 짓을 수 있을 때쯤 맞닥뜨리는 이상의 깨짐이 비로소 아무렇지 않고 자연스럽게 된다.     




그때야 파동의 확률이라는 위대함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게 과정이고 성공은 이상의 깨짐을 극복한 자에게 주어진 평범한 선물에 불과하다. 그는 신이 주신 선물인 이타적(利他的) 마음을 얻었고, 이미 더 큰 성숙이란 선물을 받았다. 운명적 사랑을 만났을 때처럼 파동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 아는 것이 적을 때는 쉬워 보이는 것, 알아가는 크기만큼 좌뇌의 지껄임도 이상의 깨짐도 많아지는 것, 이타적(利他的) 마음을 배우면서, 깨지면서 깨치는 것이 과정이다.     




인간은 모를 때 혼자 있을 때는 이타적(利他的) 존재일 수 있지만, 알았고 그 앎이란 게 부딪치면서 이상이 깨질 때 이기적 존재로 변한다. 이 이상의 깨짐을 깨치고 극복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이타적(利他的) 마음을 가지게 된다. 파동을 그리면서 굽이치는 물의 흐름을 보면서 원칙대로 기다려주고 잠시 올라탔다 변하는 방향대로 대응해주고 흐르는 물에 다시 몸을 맡기는 이 마음이 바로 이타적(利他的) 마음이다.      




인간의 탐욕의 합이 만든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스스로 거슬리겠다는 이게 좌뇌의 지껄임이다. 이것은 돈키호테가 풍차와 싸우는 것과 같고, 일상 속이라면 적어도 로맨티시스트는 되겠지만, 이곳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의 꽃으로 치장된 전쟁터이고, 곧바로 지껄임의 크기만큼 고통을 받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 만든 기형아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손을 내민다. 그가 꽃으로 보였을 때 그는 비로소 내게로 와 꽃이 된다. 사랑의 환상이 깨어지듯이 늘 맞닥뜨리는 이상의 깨짐도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는 나를 지켜주면서 나와 걸음을 맞춰준다.     




기형아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나를 따라오라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대한 고마움도 모르고 화내고 짜증 내지 말고 감사하면서 그냥 내가 보이는 현상대로 따라오라는 것이다. 지금 당신이 가진 것을 느끼고 이타적(利他的) 자세를 배우라는 것이다. 물이 어떻게 흐르는지를 배우는 건 좌뇌의 몫이고, 타인에 의해 가능하지만,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는 건 우뇌의 몫이고 온전히 내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타적(利他的) 마음에서만 가능하고 그 마음이 무아다. 내가 없는 게 아니라 타인을 현상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면서 받아들이는 게 무아다.     




조금 미숙할 수도 있고, 조급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문제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결과를 바르게 받아들이려면 이타적(利他的)이어야 한다. 이 태도라는 나무는 오직 이타적(利他的) 토양에서만 자랄 수 있다. 동그라미를 그리라는 말을 끝까지 기다리지 않았지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곡선을 조급하거나 미숙하게 그렸다면 얼마든지 수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게 직선을 긋지 않으면 말이다.     




인간은 대상이 없을 때 잠시 이타(利他)적 존재가 될 수 있지만, 대상이 주는 이상의 깨짐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온전히 이기적 존재가 되고 마는 한계를 매번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깨짐‘ ’좌뇌의 지껄임‘ ’이기의 발현‘ 이 과정이 뇌동이고, 이것은 이타(利他)적 토양에 서기 전에는 극복할 수 없다. 이것은 극복의 문제이지만,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문제이다.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적 태도의 문제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재가 본질을 우선한다. 본질은 바라보는 시선 안에서만 존재한다. 사물은 현상이 본질을 우선한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현자다. 투자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게 최소한의 과정이다. 세상 어디에도 본질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시선에서만 존재한다. 이것은 주관의 영역일 뿐이고 깨져야 할 대상이다. 사물은 현상으로만 존재한다. 현상을 본질로 왜곡하는 게 각자의 시선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존재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상이 답이다.     




각자의 시선이 만드는 본질로 소설을 쓰는 것이고,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주관의 영역으로 한참 들어온 사람에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타(利他)의 마음을 가져야 가질 수 있다. 그동안 그는 시선 안에서 본질을 끊임없이 판단하면서, 선입견과 편견으로 전혀 팔리지도 않는 소설을 쓰고 있었다. 진정한 성공은 이타(利他)의 마음을 얻은 것이다. 투자는 이타(利他)적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기의 토양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의 '사람이란 나무와 같소. 당신도 버찌가 열리지 않는대서 무화과나무와 싸우지는 않겠지.'라는 호통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존재하는 세계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삶을 살아온 것에 뼈저린 반성을 했다. ‘현상도 나무와 같다네. 넓적한 입이 무성하면 따스하다는 것이고, 길쭉한 가지만 남으면 춥다는 거야. 춥다고 가지에 입을 그리지는 않겠지.’ 오류투성이 좌뇌의 해석 장치로 현상을 바라보았던 세월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반성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본질이 존재를 앞설 수 없고, 사물은 지금 존재하는 현상이 오롯이 본질이다. 현상을 마주하고, 현상으로 결과를 도출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미래를 결정한다. 지금 존재하는 현상이 본질이고, 물이 흐르듯이 변하는 게 현상이다. ‘그냥 해. 익숙해지면 익어갈 거야‘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꼭꼭 씹어먹는 마음은 이타(利他)의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존재가 우선하기에 진심으로 존중할 수 있는 이타(利他)의 마음이 익숙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현상을 현상대로만 바라볼 수 있다.     




인간은 언제든지 이타(利他)적일 수 있다. 인간은 이상의 깨짐에 익숙하지 못하기에 이기적 존재가 되고 이것이 뇌동이다. 알아감이 많아질수록 지성이란 게 아이러니하게도 이상의 깨짐에 더 빨리 반응하게 만든다. 이것이 어설픈 지식의 위험성이고, 배움의 과정에서 필연이다.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이타(利他)의 토양에서만 가능하다. 뇌동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행위이며, 인문학적 소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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