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투자도 사실 별것 없고, 그리 별다르지도 않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읊조리면 실제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들이 삶에 스며들고, 먼저 웃으면 웃을 일들이 생기는 법이다. 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키는 것이 인간 뇌의 정해진 이치이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한방과 기도, 뇌동과 추격’이라는 자의식을 해체하는 데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듯, 관계 속에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다.
원칙을 지팡이 삼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듯 하루하루 묵묵히 나아가야 한다. 원칙으로 정한 선을 따라가다 보면, 별것도 아닌 것에서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얻고 별다르지 않은 것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된다. 결국 투자하는 것도 별것 아니다. 그저 오늘 정해진 길을 꾸준히 걷다 보면, 자신만의 고유한 별에 닿게 될 것이다.
‘별것 없다’라는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원칙을 견고하게 지켜준다. 감사와 긍정으로 뇌를 선명하게 닦아준다. 기대가 클수록 뇌는 긴장하면서 오작동한다. 단순한 반복이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당신만의 별로 데려다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법을 파헤쳐 봐도 그 종착역은 결국 지난 이후에야 덧붙여지는 사후적 해석일 뿐이다. 이 허무한 진실 앞에서 대다수는 실망하며 떠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티며 시장을 견뎌낸 소수만이 깨지면서 깨치는 과정 끝에 자신만의 감각이라는 정답에 도달한다.
이 경지에 도달한 자들은 시장에서 오히려 독이 될 뿐인 ‘얄팍한 똑똑함’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이들이다. 화려한 논리로 세상을 이기려 들기보다, 차오르는 말을 혀끝으로 삼키며 침묵의 무게를 아는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한 이들이다. 그들은 깨달음이라는 가파른 비탈길을 ‘꾸준함’이라는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올랐으며, 영롱한 감각 하나를 얻기 위해 숱한 실패의 파편들을 탑처럼 높이 쌓아 올린 수행자들이다.
투자는 깊은 상처가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가는 생존의 예술이다. 머리로만 이해한 기법은 시장의 거대한 파도가 덮치면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가지만, 수천 번 깨지고 부딪히며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감각은 위기의 순간 당신을 단단히 붙잡아줄 것이다. 상수는 기법으로 말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감각의 지휘를 따를 뿐이다.
우리는 시장의 변동성과 불확실성 앞에 돈과 심리가 하나로 묶일 때, ‘심리적 흔들림’이라는 바이러스에 속수무책으로 감염되곤 한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를 뇌동과 추격의 늪으로 밀어 넣으며 실패의 경험을 반복하게 한다. 슬프게도 이 바이러스를 단번에 해결해 줄 백신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치유책이 있다면, 그것은 시장에 깨지고 깨지면서 돈과 심리의 본질을 향해 끊임없이 내뱉는 독백의 과정뿐이다.
흔들리는 마음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독여 나갈 뿐이다. 인간의 뇌는 진화의 과정에서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의 뇌, 그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본능과 감정, 이성이라는 세 가지 감정이 위태롭게 공존하는 구조다. 결국 인문학에서 답을 찾은 이유는, 이 복잡한 뇌의 구조로 인해 인간 본성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심리의 흔들림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심리적 흔들림이라는 바이러스에 백신은 없다. 백신을 찾아 헤매지 말고 마음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 뇌동매매는 의지의 부족에 더해 뇌 속에 깊이 박힌 파충류와 포유류의 본능이 시장의 공포와 탐욕에 반응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 본능을 억누르려 하기보다, 인문학적 고찰을 통해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전반적으로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믿게 되고, 독선적인 확신 속에 불끈 화를 내기까지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잘 기억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부당하게 이익을 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만약 우리의 자료 표본(곧 우리의 기억)이 제한된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모두 훨씬 관대해질 것이다.”
<개리 마커스, 클루지>
우리는 자신의 수고는 과대평가하고 타인의 노력은 쉽게 잊는 기억의 클루지 속에 살아간다. 뇌는 가장 최근의 경험이나 자기 경험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설계되어 있어, 누구나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독선적인 확신에 빠지기 쉽다. 제한된 기억의 표본이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관용을 잃고 끝없는 원망의 늪으로 침잠하게 된다.
대표적인 편협과 편향이 바로 타인과의 비교다. 비교는 이기심의 시작점이며, 비교 우위에 서려는 어리석음은 우리를 '잘난 척'과 '잘하는 척'이라는 허상에 자신을 가두어 버린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결국 증오를 낳고, 자신을 편협한 유전자의 오작동 속에 고립시킬 뿐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안의 세계에 충실할 때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투자의 영역에서도 자기 원칙의 궤적에 집중할 때, 비로소 유전자의 오작동을 넘어선 진정한 성장이 시작된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는 자신만의 선명한 궤적을 그릴 수 없다. 비교하는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조급함과 분노를 생산하는 것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클루지일 뿐이다.
심리학에는 '높은 인센티브의 함정'이 존재한다. 기대수익이 지나치게 높으면 뇌는 조급함에 압도되어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지고 실수의 여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된다. 따라서 투자자는 자본금의 크기보다 자신의 심리 상태를 먼저 살피고, 이에 맞춘 적절한 기대수익을 설정해야 한다. 이것은 시장이라는 게임판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한 제1의 생존 규칙이다.
기법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시장에 오래 머물 수만 있다면, 시간은 8할의 비중을 차지하는 심리를 단단하게 단련해 준다. 파산하지 않고, 억지로 맞추려는 예측을 단념한 채 그저 시장의 흐름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쌓인 값진 시간은 조금씩 덜 흔들리지 않는 내공을 선물한다. 결국 시간은 '이겨놓고 치는' 상태, 즉 시장의 결대로 세워 놓고 치는 자신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방향을 본다는 것은, 탐욕의 속도를 늦추는 일이다. 높은 기대수익은 뇌를 마비시키는 독이다. 적절해야 시간이 흐를수록 기법은 단순해지고 심리는 고요해질 것이다.
“우리가 지닌 선조 체계가 무의식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매우 강력한 것이어서 때로는 우리가 상황을 의식적으로 통제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역효과가 생기기도 한다. 게다가 더욱 위험한 사실은 진화를 통해 생겨난 추론 능력이 맥락적으로 조직된 기억의 꼭대기에 위치하기 때문에 객관성의 환상이 생긴다는 점이다. 진화는 우리에게 신중한 사고를 위한 도구를 주었지만, 이것을 아무 간섭 없이 사용할 수 있다고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개리 마커스, 클루지>
책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의 본능적 선조 체계는 결코 균형 잡힌 자료를 건네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스트레스에 노출되거나 피로할 때, 가장 정교해야 할 이성적 숙고 체계가 가장 먼저 가동을 멈춘다는 사실이다. 결국 정교한 이성이 가장 절실한 위기의 순간에, 가장 저급한 반사 체계에 판단을 맡겨 버리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인간의 뇌 구조가 이토록 취약하기에, 투자자에게 최고의 양분은 충분한 잠과 휴식이다. 건강한 육체에서만 여유롭고 덤덤한 마음이 자라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투자에 부적합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뇌동과 추격이라는 본능적 유혹을 줄어가기 위해서는, 의지력을 믿기보다 매매 횟수와 매매 시간을 물리적으로 줄여버리는 환경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의지보다는 환경을 바꾸는 것이 유익하다. 뇌의 취약한 구조에 피로가 더해지면 이성이 본능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가깝다. 의지로 극복하기에 앞서 뇌에 피로를 더하는 매매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신념의 오염, 확증 편향, 동기에 의한 추론을 다 합치면 결국 우리 인간은 거의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종이라 하겠다. 진화를 통해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도록 자신을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리 마커스, 클루지>
진화의 과정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조립된 뇌는, 정교한 논리 회로보다는 생존과 쾌락에 최적화된 서툰 ‘클루지’에 가깝다. 입술을 위로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짜 행복을 유발할 만큼 속기 쉬운 존재가 바로 우리다. 이러한 불완전한 시스템에 올바른 습관이라는 필터링 없이 쓰레기를 투입한다면, 그 결과물 또한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하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추론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전에 형성된 신념의 짙은 안개 속에서 편견을 진실로 착각하는 데 익숙하다. 뇌는 숫자로 표기되는 미래의 ‘돈’보다 눈앞에 놓인 ‘먹을 것’에 더 탐닉하며, ‘가격’과 본질적인 ‘가치’를 혼동하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한다. 경제적 합리성과는 동떨어진 채,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선택지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투자자를 퇴출하게 시키는 주범이다.
투자자는 매우 속기 쉬운 존재다, 뇌는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조립된 불완전한 '클루지'다. 뇌가 가진 이 근본적인 설계 결함을 인정하지 않는 자만이야말로 투자의 가장 큰 적이다.
선인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천천히 또박또박’ 멀리 보며 나아가야 한다. 지치지 않는 반복과 철저한 복기를 통해 스스로 깨치며, 지속가능성의 고원을 향해 각자의 보폭으로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상관없다. 양손에 망치와 정을 들고 거친 돌을 깎아 자신만의 석탑을 한 층씩 쌓아 올린다는 각오로, 온 정성을 다해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게 버티고 인내하는 시간 속에서 비로소 원칙이 바로 서고, 그 원칙은 자신만의 규범이 된다.
교과서에서 마주하는 오래된 석탑들을 보라. 다보탑도, 석가탑도 결코 1~2층이 아닌 ‘4층 석탑’이지 않은가! 조급함에 못 이겨 대충 쌓은 탑은 사라질 수밖에 없지만, 정성을 다한 원칙의 탑은 유산이 될 것이다. 석탑을 쌓는 장인이 돌 하나를 깎을 때마다 정성을 쏟듯, 매매 한 번과 복기 한 줄에도 망치질과 정질이 담겨야 한다.
투자는 거친 돌을 깎아 석탑을 쌓는 장인의 길이다. 노력이 배신하지 않듯, 정성 또한 배신하지 않는 가장 신뢰할 만한 자산이다. 1층(생존)을 지나 2층(수익)에 도달했다면 이제 시작이다. 원칙이 4층 석탑으로 완성될 때까지 천천히 또박또박 나아가는 정성은 당신만의 역사를 쓸 것이다.
에너지가 수렴하는 구간에서 성급함을 버린다는 것은, 싼 가격에만 집착하던 하수의 티를 벗어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 안에서 헛된 희망까지 걷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동평균선들이 하나로 모이며 에너지를 응축하는 과정은 마치 어릴 적 오락실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이 좁아지는 압박감과 비슷하다. 차분히 기다려 기회를 포착하고 탈출에 성공하면, 수익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오래전 오락실의 인기 게임 ‘보글보글’에서는 한 판에서 시간이 지체되면 무서운 ‘흰고래’가 나타나 게임을 강제로 끝내버리곤 했다. 하지만 시장이라는 거대한 게임판은 다르다. 아무리 길게 기다려도 시장은 결코 먼저 흰고래를 보내 게임을 종료시키지 않는다. 에너지의 수렴과 발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등락을 묵묵히 견뎌내며, 오직 개인투자자만이 가질 수 있는 ‘기다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사용하는 자가 바로 상수다.
기다림이 곧 투자의 여유로움이다. 시장은 기다리는 당신을 퇴장시키지 않는다, 언제나 조급함으로 스스로 벤치로 물러날 뿐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고 해석하며 판단하는 동물이지만, 그 생각의 밑바닥에는 늘 감정과 휴리스틱, 그리고 고장 나기 쉬운 애물단지 같은 '클루지'가 도사리고 있다. 비합리적인 감정에 치우쳐 서투른 해결책을 내놓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에, 시장의 성공 공식에서 ‘기계적’이라는 단어는 결코 빠질 수 없는 핵심이다. 하지만 투자자가 도달해야 할 가장 기계적인 상태는 차가운 연산이 아니다.
투자자에게 ‘기계적’은 영어단어 ‘mechanical’보다는 무아지경으로 가는 길이자 아무런 사심 없이 행한다는 의미의 ‘Just’에 가깝다. “있는 그대로 그냥 두세요(Let it be).” 이는 투자를 넘어 인간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진리다. 복잡한 해석과 판단을 내려놓고, 시장의 흐름 앞에 ‘그냥’ 반응하고 ‘그냥’ 원칙을 지켜가야 한다.
'그냥'이라는 평범한 단어 속에 모든 비법이 있다. 정교하게 해석하려다 함정에 빠지고, 논리적이고 해결하려다 클루지를 작동시킨다. 자리가 오면 그냥 진입하고, 선을 이탈하면 그냥 자르며, 수익이 나면 그냥 챙겨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