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함을 극복하면 투자가 선명해진다.

by 황금지기


성급함을 극복하는 것은 곧 막연한 희망을 이겨내는 일이며, 삶을 관통하는 시간에 대한 깊은 이해이자 궁극의 자기 극복이다. 시장에서 성급함과 희망은 다른 이름의 같은 존재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기에 성급해지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이 성급함을 극복할 때 비로소 마음의 들뜸이 가라앉고 세월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성급함을 버리는 만큼 우리는 ‘기다림과 느림의 미학’을 깨닫게 되며, 이기심과 성냄, 탐욕의 물결도 차츰 옅어지게 된다.


삶의 본질을 의미하는 단어 ‘Just’는 바로 이 성급함의 극복과 궤를 같이한다. 성급함은 적자생존의 사바나에서 진화한 파충류와 포유류의 뇌가 하층부를 이루는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흔히 투자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말할 때, 그 싸움의 실체는 바로 성급함과 그것이 탐하는 탐욕이다.


성급함은 희망이라는 가면을 쓴 본능의 오작동이다. 성급함은 잠자던 파충류의 뇌를 깨워 세운 원칙의 탑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카잔차키스가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고 외치며 성급함과 서두름을 극복했듯, 성급함의 극복은 곧 자기 극복이며 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처신하고 있다는 우리의 주관적 인상은 객관적 현실과 좀처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사고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인간의 신념은 기억으로 매개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어렴풋이 의식하는 사소한 것들의 영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중략) 우리는 정신을 딴 데 두거나 일을 뒤로 미루거나 우리 자신을 속인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 통제의 산에 오르기 위한 평생의 투쟁이다.”

<개리 마커스, 클루지>


진화는 우리에게 분별 있는 목표를 세울 충분한 지적 능력을 선물했지만, 비극적이게도 그것을 실천할 충분한 의지력은 주지 않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아침과 저녁이 다른 마음의 심술은 인간의 숙명이다. 뇌동과 추격, 한방과 기도가 해로운 줄 뻔히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투자자들의 모습은 술이나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가 존 치버는 이 무력한 지적 능력을 서글프게 고백했다. 새벽 3시에는 술이 역겨워 보이는 엄격한 금주 주의자로 눈을 뜨지만,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위스키병을 향해 손을 뻗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새벽의 원칙이 장이 열리면 탐욕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일이 잦다.


인간의 의지는 설계부터 결함이 있는 클루지다. 나약한 인간의 의지에 소중한 자산과 운명을 맡기는 것 자체가 위험한 도박이다. 나를 믿지 말고 실수의 여지를 줄이는 시스템을 믿어야 한다. 위험을 피하는 구조를 짜는 것이 자기 통제의 산을 넘는 유일한 길이다.




“제 전략은 항상 똑같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실패해 버리자는 거죠.” 애니메이션의 거장 앤드류 스탠튼의 고백이다. 우리 삶과 투자의 여정에서 ‘망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다. 투자는 어느 쪽이 절대적인 정답인가를 맞히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의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가를 가늠하는 선택의 연속일 뿐이다. 제아무리 높은 확률의 자리를 선택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가능성일 뿐, 시장은 언제든 예상을 비웃으며 틀리게 만들 수 있다. 그럼에도 묵묵히 그 행위를 반복하는 것, 즉 확률 게임의 본질은 바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본질적으로 시도의 절반은 틀릴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시장 앞에서 확신에 찬 주장이나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침묵하며 대응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 현명함에 훨씬 가깝다. 시세의 거대한 추세조차 두 칸을 오르면 한 칸을 내어주며 전진한다. 추세라 할지라도 그 절반은 언제든 깨질 수 있음을 알기에, 수익을 챙길 때 챙기고 다시 기다릴 줄 아는 절제가 현명함이다.


빨리 틀리기를 자처하면, 대신 적게 깨지는 보상을 받는다. 틀릴 수 있음을 미리 인정하고 타석에 서면, 예상치 못한 공이 날아와도 분노는 사그라들고 유연하게 대처할 심리적 여유가 생겨난다.




“죽는 법을 배워두라. 빗속을 나체로 달려보라. 일어나야 할 모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엘런 코트의 조언처럼, 시장의 거친 폭풍우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 줄 피난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원칙으로 정해둔 자리라면 결과의 성패에 연연하지 말고 과감하게 자신을 던져라. 던지고, 또 던져라. 오늘 마주한 작은 실패는 시장이 선사하는 필연적인 교훈이며, 그 고통의 한복판에서 빠르게 깨지며 차곡차곡 쌓아가는 '올바른 실패'의 경험이야말로 실력을 키울 가장 비옥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억지로 끼워 넣지 말고 기다리고 기다려라. 시장은 내일도 어김없이 열릴 것이며, 그 기다림 속에서 원칙을 지켜낸 시간의 총합이 당신의 실력이 된다. 줄 때 감사히 챙기고 또 챙겨라. 기회는 계속 찾아올 것이며, 그렇게 쌓여가는 누적이 실력을 증명할 것이다. 머리로 계산하는 이론이 아닌, 몸으로 깨지면서 깨치는 경험만이 진실로 진실한 것이다.


생각은 허상일 뿐, 오직 경험만이 실체다. 원칙의 선 위에서 기꺼이 빗속을 달리듯 매매하라. 수익이어야만 한다는 강박은 마음을 경직시킨다. '반은 틀릴 수 있다'라는 경험주의자의 태도는 당신을 유연하게 만들 것이다.



‘일단 작은 성공 하나를 성취하면 그다음 작은 성공을 얻기 위한 태도가 저절로 갖춰진다.’ 각각의 작은 성공은 현실을 바꿔 놓는다. 동지를 만날 수도 있고 모르던 자원을 발견할 수도 있으며 새로운 기회들도 생겨난다. 작은 성공은 분명 끊임없는 흐름을 일으킨다. 따라서 목표가 정해진 하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 작은 성공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될지, 당신을 어디로 데려다 놓을지 예측할 수 없다. 도착점에 이르고 나서야 그동안 걸어온 길을 깨닫게 될 뿐이다.

<존 크럼볼츠, 빠르게 실패하기>


실패를 피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마음을 구속하고, 새로운 경험과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차단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실패를 피하려는 그 두려움이 오히려 확실한 실패의 원인이 된다. 삶과 시장에서 비록 실패하더라도 충분한 경험을 겪으며 임계점에 도달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어떤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는 근력이 생기며, 그 내면은 희망과 감사함으로 가득 찬다. 수많은 작은 실패를 빠르게 통과하며 얻은 극복의 경험들은, 눈앞에 놓인 기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뛰어들게 할 것이다. 성공은 거대한 한 번의 도약이 아니라, 실패라는 징검다리를 딛고 건너온 자들만이 마주하는 도착지다.


극복한 실패는 회복탄력성으로 치환된다. 완벽한 성공을 계획하느라 멈춰 서 있는 것보다, 열 번의 작은 실패를 통해 그다음 기회를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원칙으로 정한 선 위에서 자리가 만들어진다면, ‘Es muss sein(그래야만 한다)’의 시간이다. 어떤 망설임이나 타협 없이, 진중하고 기계적으로 진입해야만 하는 무거움이다. 그렇게 원칙을 지켰음에도 손실이 발생한다면, ‘Einmal ist keinmal(한 번은 중요치 않다)’의 철학이 필요하다. 확률 게임의 긴 여정에서 단 한 번의 결과는 없었던 것과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 버릴 수 있는 자신만의 가벼움이다.


원칙은 거대한 폭풍우를 대하듯 무거운 책임감으로 지켜내고, 손실은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를 대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흘려보내야 한다. 청산은 아는 것보다 적게 말하며 묵직하게 살라 하고, 창공은 막연한 기대치를 버린 채 티 없이 살다가 가라 한다.


원칙을 가볍게 여기고 손실을 무겁게 짊어지면 내리막길이다. 무거워야 할 곳에서 무겁고, 가벼워야 할 곳에서 가벼워야 한다. 원칙을 어기는 것을 죽기보다 무겁게 여기고, 원칙을 지킨 뒤의 손실은 먼지처럼 가볍게 여겨야 할 것이다.




너무 애쓰지 마라. 다만 인연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가야 삶도 투자도 편안해진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감정과 휴리스틱, 그리고 클루지와 영원히 함께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실전에서 마주하는 지금의 불안과 혼돈은, 내면 깊숙이에서 꿈틀거리는 ‘다 맞추고 싶어 하는 탐욕’에서 기인한다. 인간의 본성인 ‘맞추려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시장은 끝날 때까지 애매하고 어려운 곳으로 남을 뿐이다.


아무리 애를 쓰고 원칙을 사수해도 많이 틀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정답은 없다’라고 귀결시킨 선인들의 준엄한 가르침이다. 투자의 진정한 정답은 예측의 성공이 아니라, 자신만의 대응에 있다. 손실이 발생해도 상관없는 상태, 확률 게임임을 알기에 틀려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며 반복할 때 반드시 이기는 구조 그 자체가 정답이다. 시장의 파동은 결국 자기 그릇만큼의 마디만을 허락한다.


맞추려는 탐욕이 불안을 만든다. ‘맞춰야 한다’라는 강박에는 언제나 불안의 그림자가 가득하다. "시도의 절반은 틀려도 상관없다. 그다음을 실행할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당당한 기개를 품을 때, 불안은 더 이상 당신의 마음속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각자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득이 되면 좋은 사람이라 부르고, 기분을 상하게 하면 나쁜 사람이라 단정 짓는다. 이는 진화를 거듭하기 전까지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원초적 본성이다. 나에게 도움을 준 자나 상처를 준 자 모두를 ‘그렇게 좋지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타적 마음은, 본성을 한참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경지다. 매번 마음먹기가 고난의 연속이겠지만, 투자자는 시장의 흐름을 이토록 덤덤하게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생이란 결국 죽을 때까지 선택의 기로 앞에 서는 과정이다.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는 수많은 선택 속에서 끊임없는 후회와 조롱을 마주하는 것은 삶의 불가결한 요소다. 사람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묵묵히 다음 선택을 내리며 나이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그릇에 맞는 대상에 온전히 집중하는 삶이라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인생도, 투자도 결국 선택의 연속일 뿐이며, ‘책임’과 ‘집중’이라는 두 기둥만 견고하다면 성공은 자연히 보장되는 결과물이다.


감정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을 선택하는 것이다. 타인을 내 기준에 맞춰 재단하고 시장을 내 기대에 맞춰 평가하면 본능의 노예가 되어 괴로움에 빠질 뿐이다. 상대를 좋고 나쁨으로 나누지 않는 마음이 곧 시장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다.




가을날 부는 바람에 따라 뒹구는 낙엽을 보라. 주가의 움직임 또한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는 낙엽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낙엽이 뒹구는 방향을 누가 예측하는가? 예측을 단념해야 하는 이유다. 짧게 이익을 챙기면 시세가 길게 뻗어나가고, 길게 가져가면 짧은 수익만 남긴 채 되돌아오는 시장의 끝없는 조롱에 흔들리지 마라. 짧은 손실을 시장에 주고 원칙의 자리에서 큰 수익으로 받아내는 것이 투자의 셈법이다.


이 정직한 과정을 ‘누적’이라 부르며, 그 티끌 같은 시간이 모여 마침내 태산을 이룬다. 자본주의 최고의 비즈니스 모델을 제대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쁜 상황을 견뎌내는 면역력을 키우는 혹독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작은 실패들은 자산을 누적시키는 가장 단단한 디딤돌이다. 수익과 행운은 오직 시장의 몫이기에, 시장이 요구할 때면 몇 번이고 기꺼이 손실을 내어주어야 한다.


시장이 요구할 때 기꺼이 내어주어야 반복할 수 있다. 손실을 아까워하는 마음은 낙엽의 방향을 바꾸려는 헛된 시도와 같다. 타고난 천성을 성찰하고, 그 위에 쉼 없는 노력을 곱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대상의 본질을 꿰뚫는 힘인 통찰력은 인문학적 소양을 양분 삼아 내면 깊숙이 뿌리를 내린다. 투자의 길은 결국 끊임없는 인격 수양의 과정이기에, 인문학적 소양이란 투자자가 성공이라는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과도 같다. 수많은 이들이 시장에서 돈을 잃고 도태되는 이유, 그리고 수익 없이 헤매는 세월이 길어지는 이유는 결국 자신의 내면 깊은 곳까지 통찰해 내는 데에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자는 결코 성급하거나 초조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아야 하는 ‘느림의 미학’이다. 또한 시장이 보여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에게 주어지는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는 ‘수긍의 예술’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통해 다져진 단단한 내면은 시장의 파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잡아주며, 수익이 온전한 내 것이 되게 한다.


투자는 인문학적 토양 위에 지어지는 인격 수양의 집이다. 흐름을 읽는 예리한 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쉼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일이다. 인문학은 당신에게 '무엇을 살 것인가'를 말해 주지 않지만, '어떻게 견디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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