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닫게 해 주려고.
‘영원히 계속되는 겨울은 없습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밤은 없습니다.
영원히 내리는 비도 없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상쾌하 마음으로
그런 시절도 있었지
그때는 괴로웠지 하며
웃는 얼굴로 이야기할 날이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이께다 다이사쿠
지난 월요일은 회복이 빠른 남편이 금방이라도 일반병실로 갈 거 같아 기대에 부풀었고, 빨리 얼굴을 보기 원하는 주변 가족들에게도 바로 갈 거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러다 시티 촬영 결과를 바로 말해주지 않고 담당의사가 바쁘다, 며칠 후에 소견 있을 거다라는 간호사의 말이 왠지 불안하게 했다. 화요일 오후가 돼서야 검사 결과 더 치료해야 하고 아직 일반병실은 무리다. 라는 소견을 듣고 답답함과 실망감이 밀려왔다. 감정은 비슷한 감정을 끌어들인다. 시댁식구들이나 회원들 남편회사 직원들에 비해 거의 무신경에 가까운 친정식구들의 모습이 엄청나게 서운한 감정으로 몰려왔다. 큰언니는 자주 전화해서 안부를 묻긴 했지만 늘 바쁜 거 같고 바쁜데 틈을 타서 전화한다는 느낌을 주고 내가 혼자 지내는 적적함을 말할라 치면 얼마든지 글 쓰고 기원하면 되겠네 등 뭐가 문제냐는 식의 가르치려고만 하는 차갑고 딱딱한 모습이 낯설고 위로가 되지 않았다. 바로 아래 동생은 몇 번 걱정스러운 전화를 걸었지만 작은 언니와 막내 남동생은 전화 한 통 화가 없었다. 오늘은 하겠지 할 거야. 하는 동안 일주일이 넘어갔다. 내가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혼자 우두커니 지내는 게 너무 싫어졌다. 수요일 면회를 마치고 무작정 집으로 향했다. 집이 그리웠다. 두 시간 반이상 걸리는 거리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집에 들어와 씻고 누우니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든다. 스르르 잠이 왔다. 남편이 숙소생활하다가 집에 오면 ‘숙소에서는 깊은 잠이 안 와’라고 말하는 게 조금 이해가 됐다. 작은 아들이 열심히 집을 치우고 있다고 했지만 설거지 통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혼자 지내온 거에 감사한 마음이다. 그날 저녁 드디어 작은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 언니는 내가 바쁠까 봐 배려하는 차원으로 신경만 쓰다가 시간이 이렇게 지나버렸다고 했다. 나는 그 시간이 일주일이나 지났다. 이건 배려가 아니고 무관심이다. 섭섭하다.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 생각하고 있던 말들을 쏟아냈다. 눈물이 나려던 걸 간신히 참았다. 언니는 그러게 미안하게 됐다는 등의 사과를 하며 주말에는 엄마가 오셔서 예약해 놓은 펜션에 가기로 돼있어서 다음 주나 가겠다는 둥의 말을 했다. 나는 놀러 가는 건 가면서 동생한테는 전화 한 통화가 없냐 등 더 화가 나서 말했다. 이제야 언제 오겠다는 둥 했지만 필요 없다고 했다. 엄마한테서도 전화가 와서 형제들한테 서운하다 하니 엄만 내 마음을 어루만지면서도 다른 형제들한테 그런 마음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해 더 화가 났다. 연이어 막내 남동생이 소식을 들었는지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내가 형제들을 너무 의지하며 믿고 있었던 거 같다.
춘천에서의 8일 동안 깨달은 여러 감정 중 하나는 ‘인간은 결국 혼자다’라는 거다. 가족에 둘러싸여 있고 주변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지만 홀로 살아가는 독립된 존재다. 다음날 우울한 마음으로 회관에 갔다. 오히려 회원들은 나를 보고 달려와 손을 잡고 안아주었다. 또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느라 혼났다. 그날 오후 작년에 도서관 독서모임에서 알던 지인이 나를 찾아왔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가 언제 우울했냐 하며 나의 오지랖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딱한 그녀의 사정에 용기를 주고 싶어 여러 이야기를 했다. 힘든 표정이었던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재밌어하고 좋아했다. 그러면서 한 달에 한번 나와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며 내 시간에 맞추겠다 한다. 거절할 수 없어 시간을 조절해 보자 했다. 그러고 집에 오는데 또 다른 지인이 전화를 걸어 치킨집에 가서 여덟 마리 치킨을 포장해 달라고 부탁해 흔쾌히 수락했다. 몇 번 가지 않아 쑥스러워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치킨집 사장과 직원에게 농담도 했다. 그때 큰언니에게 문자가 와있었다.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잘 해내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툭툭 말한 거 미안하다는 문자였다. 불편한 감정을 오래 담아두는 걸 싫어해서 다음날까지 사색을 거듭했다.
금요일 아침 8시 40분 춘천 가는 버스를 탔는데 경유하는 곳이 많아 춘천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어도 병원에 도착하니 면회시간인 12시 15분이 지나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게 와 3층으로 뛰어올라가니 21분이었다. 헐레벌떡 남편에게 다가가 자초지종을 말하고 있는데 입맛이 없어 밥을 안 먹고 있다 했다. 머리는 며칠 동안 감지 못해 기름이 가득했다. 하루도 머리를 안 감는 날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는 사이 담당의사가 다가왔다. 좀 어떤지 물으니 예상범위 안에서 일어나는 부분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말하고 일반병실은 아직이다라고 했다. 힘이 빠졌다. 남편에게는 주말에는 집에 가고 월요일 오겠다고 말하고 중환자실을 나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데 차가 밀려서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온몸이 뒤틀렸다. 음악을 듣다가 그것도 질려서 그만두고 오디오북도 집중이 안되고 차창밖 풍경도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도 청해봤지만 15분을 넘지 않았다. 머릿속 상상의 질서가 제멋대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남편에게 차갑게 대했던 모습들, 소통 안되어 친정식구들에게 더 의지했던 모습들, 남편과 아이들한테 힘들게 느껴지는 모습을 친정식구들에게 한탄하던 모습들, 그렇게 믿었던 친정식구들이 이 상황에서 보여준 모습등 미안하고 서운하고 속상하고 답답한 감정들이 눈물 나게 했다. 나의 중심이 너무 어긋나 있고 비뚤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에게 너무 부모님과 시동생들에게 연연한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나야말로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심은 결국 나와 우리 네 식구였는데 양발을 어설프게 걸치고 있었구나. 소용돌이치던 생각은 차츰 정리가 되고 있었다.
남편의 병고로 나는 늦게, 늦게라도 깨닫는 중이다. 그러고 나니 친정식구들에게 서운할 것도 없었다. 내 기대심리가 너무 큰 거뿐이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지만 집에 오니 생각이 명료해진다. 형제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섭섭한 거 이제 괜찮다고. 진짜 괜찮아졌다. 일요일 큰아들이 오니 안심이 된다. 형제는 나란히 회관을 들렀다가 밥을 먹으러 나간다. 형제데이트란다. 나는 지인과 만나서 볼 일을 보고 머리를 다듬으러 갔다. 집에 와서 세 식구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앉아 아빠를 위해 기원했다. 말할 수 없는 든든함이 차오른다. 아! 이 시련이 나를 이제야, 이제서라도 중심을 세우게 하는구나. 아들들과 따듯한 포옹을 한다.
오늘 아침 5시에 눈이 떠졌다. 어제까지 다시 춘천 갈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다. 유발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예전에는 가족과 공동체가 하던 일을 지금은 사회와 국가가 맡아서 일을 처리해 주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그렇다. 남편의 병을 병원이라는 사회시스템이 맡아서 치료해주고 있다. 의사는 돈을 받아서 일하는 것도 있겠지만 사명감으로 환자를 보고 있다. 안 그랬으면 가족이 이 모든 걸 떠맡아야 하고 괴로움에 한탄만 하고 있었을 일이다. 갑자기 감사한 생각이 든다. 불평할 일이 없다. 춘천까지 멀다고 불평할 일도 아니다. 숙소 얻을 돈도 있다. 기원해 주고 걱정해 주는 가족들과 주변사람들도 있다. 내가 조금 불편하고 쓸쓸한 거는 그냥 감수하고도 남을 일이다.
지금 가장 힘든 건 남편이다. 회복하려고 투쟁하는 남편에게 감사하고 의사와 간호사 병원에게 감사하고 옆에서 든든하게 있어주는 아들들에게 감사하고 걱정해 주는 주변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마음의 장막이 걷히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걸 깨닫게 하려고 남편이 고생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제 춘천으로 갈 준비를 해야겠다. 밖은 안개로 가득하다. 춘천에 도착하면 밝은 해가 비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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