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방스를 무대로
코로나가 한창일 때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연스레 책이나 영화에 관심이 갔다. 그중 중세 시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머나먼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무서운 전염병의 현실과 마주하니, 그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알고 싶어 관련된 책과 영화를 찾아보았다.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를 읽고는 충격을 받았다. 현실과 너무 똑같은 모습에 소름이 끼쳤고, 작가가 마지막에 써놓은 예언이 적중했음을 알고 예리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로는 19세기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에 콜레라가 창궐했던 시기가 배경인 ‘지붕 위의 기병’(1996년)을 보았다. 기병 출신인 ‘앙젤로’와 귀부인 ‘폴린’이 주인공으로 아름다운 프로방스를 배경으로 다이내믹하고 스펙터클한 스토리가 펼쳐진다.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가 빠른 속도로 사람들을 쓰러트리는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콜레라로 사람들이 쓰러져 나가는데 프로방스의 자연 풍광은 너무 아름다워 대조를 보여 인상적이었다. 나는 스토리에 빠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나중에는 대사를 외울 정도였다. 원작자는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이다.
오스트리아에 짓밟힌 이탈리아를 빠져나간 애국자들은 가까운 프랑스에 근거지를 두고 혁명자금을 모금해 국내로 보냈다. 기병 대령 앙젤로도 본국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애국자로 오스트리아 첩자들에게 쫓기다 프로방스에서 콜레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하는 의사를 만나 치료법을 배우지만 아무도 구해내지 못한다. 그는 샘에 독을 탄 자로 오해를 받고 지붕 위로 피신해서 숨어있다가 들어간 저택에서 폴린을 만난다. 앙젤로는 군자금을 전하기 위해 가는 도중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폴린과 길에서 재회하고 격류를 헤치며 동행한다. 그 모험으로 둘은 서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앙젤로는 기사도적인 존중에 마음을 다하려 한다. 스토리는 역사적인 배경 속에 두 주인공의 사랑이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때는 장 지오노라는 작가의 이름만 선명하게 기억한 채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장 지오노의 이름이 적힌 얇은 책이 눈에 띄었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장편소설을 쓴 작가가 쓴 단편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71쪽밖에 안 되고 그 안에 판화로 된 삽화도 있어 실제로 내용은 훨씬 더 짧다. 짧으니 언제든 금방 읽겠지 하고 사놓고 한참 놔두었다가 오늘에서야 무언가에 끌려 읽게 되었다. 그리고 감동이라는 말로는 절대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글의 길고 짧음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단단한 아름다움과 숭고함으로 만들어진 거센 파도가 흰 포말로 되어 해안으로 거침없이 밀려오는 거대함과 위대함에 압도되어 꼼짝 못 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휘젓다가 편안하게 어루만지는 클래식을 듣는 거 같기도 했다. 책을 읽은 후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어 잠시 외출해 그들과 대화하면서 얼마나 우리는 작은 일을 크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느꼈다. 작가 장 지오노와 그의 작품을 생각하며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다. 후기를 읽으며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다는 걸 알고 찾아보았다. 30분짜리로 주인공 '부피에'의 거룩한 삶에 감명을 받은 세계적인 화가 프레데릭 바크가 그림을 그리고 캐나다 국영방송(CBC)이 제작을 했다. 그는 5년 반 동안에 2만 장의 그림을 그려 ‘나무를 심은 사람’을 완성했다. 제60회 아카데미상에서 단편상과 여러 상을 휩쓸었다. 책의 감동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니 몇 배의 행복감으로 충만해진다. 위대한 사람을 알아보고 책으로 쓴 작가 장 지오노의 위대한 생애에도 존경심을 품게 된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1953년에 발표됐다. 작가가 젊은 시절 프로방스를 여행하다 만난 양치기인 ‘엘제아르 부피에’는 혼자 살고 있다. 부피에는 황폐한 산에 삼 년 전부터 도토리를 10만 개 심어왔다. 그중 2만 그루에서 싹이 나왔고 그중 절반이 죽어버릴 수도 있어도 1만 그루가 살아남아 자라게 될 거라 믿는다. 가족이 죽고 가축들과 살아가면서 나무가 없어 죽어 가는 땅의 상태를 바꿔보기로 결심한다. 너도밤나무 재배법도 연구해 어린 묘목도 기르고 있다. 그리고 자작나무도 심는다. 작가는 전쟁에 참전한 후 다시 그를 만난다. 열 살이 된 떡갈나무들이 크게 자라 있고 '부피에'는 계속 나무를 심고 있다.
라고 작가는 말한다. 전쟁의 파괴와 참혹함을 피부로 느낀 작가는 더더욱 숲의 소생이 생명으로 와닿았을 것이다. 부피에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나도 마음을 쓰지 않고 자기 일을 계속했다. 팔십이 넘을 때까지 나무를 심고 가꾸어 숲을 일구었다. 평화롭고 규칙적인 일, 고산지대의 살아 있는 공기, 소박한 음식, 무엇보다 마음의 평화가 노인에게 놀라우리만큼 훌륭한 건강을 가져다주었다. 1913년 황폐한 땅에 세 사람만이 살았고 난폭하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선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마을이었다. 그랬던 곳이 향긋한 냄새가 나는 곳으로 변했다. 숲이 생기고 샘이 넘쳐흐르고 마을이 들어서고 농작물을 심고 사람들이 모여들며 웃음소리가 들리게 되었다.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부피에 덕분에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나도 산에 오르거나 차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산들의 나무들이 누가 심은 걸까? 아니면 저절로 자란 건가? 생각한 적이 있다. 새삼 숲을 가꾸고 보호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지 깨닫는다. 이 책은 문학작품으로서만 아니라 환경 생태 교육자료로 많이 읽히고 있다고 한다. 나무의 남벌에 따른 지구 생태계의 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대 도시 문명을 철저히 비판하고 자연을 사랑한 작가 장 지오노의 사상이 투영되어 있다. 나는 지금 당면한 심각한 기후 위기도 중요하지만 한 양치기 노인이 철저한 고독 속에서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행복해지는 길을 걸어간 일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 그 길이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행복하게 했고 세월이 지나면서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임에 틀림없다. 문득 나는 이제까지 몇 명의 사람을 행복하게 했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양치기는 계산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묵묵히 했을 뿐이다. 나무를 심어 땅을 소생시키고 숲을 만들고 숲의 동물과 사람들을 살리고 지구까지도 살리는 일로 이어졌다. 누가 보든 알아주든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얼굴은 충실감과 행복감으로 가득 찼다. 타인을 위한 길이 자신도 살렸다. 기후 위기가 심각한 지금의 현실에서 소생을 향한 한 사람의 집념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아직 좌절은 이르고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일을 실천하면 된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 지오노는 앞으로 기후위기가 올 거라 생각하고 경고하듯 이 글을 쓴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자연을 사랑한 그가 만난 위대한 사람의 숭고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썼을 것이다. 이 짧은 소설을 구상하고 완전히 나올 때까지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인간의 생애는 짧다. 그러나 한 양치기가 묵묵히 일군 숲은 수 백 년 동안 더 울창해질 것이고, 장 지오노가 담담히 쓴 글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과 행복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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