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가의 삶과 작품
어린 시절 티브이에서 보여주는 드라마를 꼬박꼬박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그중 1987년에 KBS 티브이 드라마 ‘토지’가 있었다. 주인공 최서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대하드라마로 스토리와 역사적 스케일에 감탄하며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2004년 SBS에서 새롭게 제작한 ‘토지’도 재밌게 봤다.
주말에 강원도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만나러 원주에 다녀왔다. 일요일 헤어질 때 남편은 주말이라 차가 막히니 일찍 귀가하라 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오래전 지인이 다녀왔다고 소개한 ‘박경리문학공원’을 혼자 가보기로 했다. 한 달 전 줄기차게 다니면서 감탄하며 보았던 강원도의 아름다운 단풍산들은 이제 숱이 빠져버려 듬성듬성해진 노인의 머리처럼 변해있었다.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밤에 숙소로 갈 때 창문을 여니 맑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과 머리로 사정없이 불어온다. 어두운 산들 위로 올려다본 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큼지막한 별들 사이로 은하수처럼 흩뿌려진 작은 알갱이 겨울철 별들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어 절로 환호가 나왔다. 새벽 일찍 숙소를 빠져나와 6시쯤 남편 일터로 가는데 아직도 캄캄하다. 푸름과 잿빛 안개가 높고 낮은 첩첩이 산들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숨어 버린다. 그러다 겨우 7시가 다되어 동쪽 하늘에 발그레하고 수줍은 빛이 산아래 보인다. 산과 들판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하나하나에 서리가 내려있다. 해가 뜨니 늦가을과 초겨울의 풍경이 보인다.
박경리 문학공원은 원주시립도서관에서 가까웠다. 겨울을 아쉬워하는 붉디붉은 단풍나무가 작가가 살았던 마당 한가운데 선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의 옛집은 작가가 1980년부터 원주에 살면서 ‘토지’ 4부와 5부를 집필해 1994년 8월 15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곳이라고 한다. 작가가 가꾸던 텃밭과 나무가 그대로 보존돼있고 대지면적이 이천 제곱미터가 넘는 꽤 넓은 곳이었다. 앞 쪽으로 박경리 문학의 집이 2010년에 개관해 작가의 일상과 삶의 자취 그리고 거대한 문학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문학의 집 앞에 생명의 나무를 거대한 두 손으로 안아주는 모양이 있었다. 공원 중간중간에 작가의 시가 보인다. 시구 하나하나 대작가의 깊은 울림이 전해온다. 소설가로만 알고 있었지, 이렇게 시를 많이 쓴 줄은 몰랐다.
물은 어떠한 불도 다 꺼 버리고
불은 어떠한 물도 다 말려 버린다.
절대적 이 상극의 틈새에서
절대적인 이 상극으로 말미암아
생명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절묘한 질서인가.
(일부분)
물과 불이라는 상극을 통해 무수한 모순 속에 살아가는 우주만물의 모습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했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일부분)
혼자 외로이 살면서 사마천을 생각하며 글을 쓴 작가의 심정이 절절하게 전해져 온다. 작가에게는 사마천이 스승이었나 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일부분)
깊은 통찰력으로 감탄하게 되는 시다.
작가 독서챌린지도 하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얼마나 작가의 세계와 가까워지겠는가. 뜰을 돌아보고 박경리 문학의 집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토지의 육필원고가 보인다. 원고지를 가로가 아닌 세로로 쓴 모양이 인상적이다. 작가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쓴 산더미 같은 토지의 필사본도 눈에 띈다. 작가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남편과 일찍 사별한다. 아들 역시 사고로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1969년 9월부터 대하소설 ’ 토지‘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다. 2년 후 유방암 수술을 받고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를 다시 쓰기 시작해 1부 연재를 마친다. 이렇게 해서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위대한 작품을 완성한다. 토지는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등장인물 집계만 600명이 넘는다. 2008년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에세이, 시집, 소설 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내가 아는 작품은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정도이다. 시를 많이 썼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작가가 창조한 '토지'의 세계와 작가의 일생을 보더라도 인간의 가능성 앞에 숙연해진다. 불행한 일에 절망하지 않고 글로 상상적 질서를 만들어내면서 작가는 매일 자기의 분신인 최서희로 직접 역사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삶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작가가 창조한 평행우주에서 아직도 최서희는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베개에 머리 얹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것 다 바느질이 아니었던가
개미 쳇바퀴 돌 듯
한 땀 한 땀 기워 나간 흔적들이
글줄로 남은 게 아니었을까.
(일부분)
글줄로 남은 게 한국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작가는 이렇듯 그저 묵묵히 외로이 자신과 싸우면서 쓰고 싶을 때도, 쓰고 싶지 않을 때도 그저 펜을 쥐었다.
작가가 살고 머무르며 새로운 삶을 창조했던 공간에서 고뇌하고 신음하며 치열하게 쓰고 투쟁하는 마음이 시간을 뛰어넘어 파도처럼 밀려온다. 잠깐의 몇 시간이지만 마음은 이미 작가의 삶과 문학의 깊이에 풍덩 빠졌다. 책으로 천천히 그 세계로 다시 들어가 볼 것을 생각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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