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성공학'을 읽고 드는 생각
‘절제’의 이면
-밤마다 라면을 먹는 아이
코로나 시국에 낮과 밤을 바꾸어 게임하던 아이는 몇 년째 습관을 바꾸지 못하고 방은 밤새 불이 켜있다. 게임하다 배가 고프니 그 밤에 라면을 먹는다. 다른 음식을 먹으라 해도 라면을 절제하지 못한다. 빨리 자라며 혼내고 라면 금지령을 내린다. 물론 먹히지 않고 싸움만 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가는 게 엄청 힘들다. 지각이 늘 아슬아슬하다. 절제하지 못해 몸이 고되다.
-피아노에 몰입하는 아이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한다.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피아노도 좋아한다. 몰입한다. ‘재즈’에 ‘재’자도 모르던 아이가 삼 개월 음악학원에 다니면서 낮이고 밤이고 미친 듯이 연습하더니 높은 경쟁률을 뚫고 예고에 들어간다. 다시 예대를 목표로 학교와 학원에서 버스가 끊기면 컴컴하고 인적 없는 길을 삼십 분 동안 걸어 집으로 오는 날이 부지기수다. 실기시험을 앞두고 초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퍼붓고 병원신세까지 진다.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연습실로 향한다. 게임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던 부모는 어디 가고 안쓰럽지만 잘 참아내 주길 바라는 부모만 있다. 모순이다. 정시 끝자락에 마침내 합격이라는 열매를 딴다.
미즈노 남보쿠의 ‘절제의 성공학’에서 마음과 음식과 돈과 물건에 대한 절제가 인생을 성공으로 데려간다는 원리가 설파돼 있다. 운명을 만들고 운명을 바꾸어 성공으로 이끄는 내용이 논리 정연하게 쓰여있다. 과연 그러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반성하며 명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절제가 안돼서 아이는 낮과 밤이 바뀌고 라면을 먹고 자기 몸과 주변사람을 힘들게도 하지만, 피아노 연습에 절제를 했다면 예고와 예대 근처도 못 갔을 테고 꿈도 갖지 않았을 거다. 살이 없어서 등과 어깨가 굽어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피아노를 꽝꽝 쳐대고 빨리 치는 연습을 하느라 건반과 건반에 손톱이 껴 부서져 피가 날 정도로 몰입을 했기에 뭔가를 이룰 수 있었다.
사랑에 절제가 되었다면 결혼은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불륜도 생기지 않겠지만. 사랑에 절제가 되면 문학과 영화는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가 글 쓰는 걸 절제한다면 위대한 문학은 나오기 어렵다. 돈에 절제가 된다면 자본주의는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미에 절제를 갖다 대면 예술은 탄생하지도 못한다. 예술가의 미친듯한 영감과 노력으로 예술이 생겨나고 인생은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욕망의 절제가 안되어 싸움이 일어나고 분쟁이 커지고 나아가 전쟁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정복욕과 증오의 감정이 무수한 살상무기를 만들고 마침내 절제가 도저히 안되어 인류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는 핵무기까지 만들어졌다. 그 버튼 앞에서 절제 못하면 마침내 인류는 사라질 수 도 있다. 고통에 대한 절제가 안되어 신약과 의학이 계속 발전한다. 그러고 보면 절제만 해서는, 그렇다고 무절제만 해서도 살아가기 어렵다. 사람이 음식을 절제하고 아침의 양기를 받으려 새벽 일찍 일어나는 사람만 있다면 밤새 영업하는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한다. 매일 운동하고 절제해서 몸을 잘 가꾸는 사람만 있다면 헬스장과 병원은 사라질 수도 있다.
어제 엘림아트센터 개관 8주년 기념 콘서트에 다녀왔다. 에스클래식 챔버 앙상블과 우용기 피아니스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 2, 3악장 연주를 들었다. 앳된 소년티가 남아서 수줍은 듯 인사를 하던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 앉자마자 신세계로 나를 데려간다. 피아노와 일체가 되어 건반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폭풍과 천둥처럼 옥타브를 넘나들며 꽝꽝 두들겨 댄다. 피아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에 입을 다물수 없고 온몸은 전율에 빠진다. 땀이 범벅이 되어 악장과 악장사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친다. 피아니스트의 모습에서 광기를 본다. 조각가가 흙 앞에서 마구 주무르는 거 같다. 피아노가 줄어났다 늘어졌다 하는 고무줄 같다. 피아니스트에게 거대한 그랜드피아노가 손안에 들어가 있다. 마음의 광휘가 한동안 나를 감싼다. 피아니스트 덕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해 보인다.
만약 그가 연습에 절제를 했다면 이런 감동은 절대 줄 수 없다. 물론 사람들은 그런 걸 무절제라고 하지 않고 몰입이라는 멋진 말을 붙인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절제란 말도 맞다.
결국 세상은 절제와 무절제가 어우러져 굴러간다. 영화 제목대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처럼 폭주하며 굴러가기도 한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감정의 절제는 어렵지만 정말 필요하다. 우리는 가족이나 주변사람에게 멋대로 기대한다. 이렇게 해주고 저렇게 해주길. 그러다 그게 안되면 사랑이 금세 미움과 증오로 변해 공격하느라 바쁘다. 감정에 절제가 안되어 힘들다. 인상을 찌그러트리고 소리는 커지고 몸은 경직된다. 건강에도 물론 악영향을 미친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늘 요동치는 감정이 자신의 실체라고 생각하지만 실체가 아니다. 변화무쌍한 생물과 같은 존재다. 그 생물을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의 스승이 필요하다. 이는 절제보다 상위개념이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역사에 정의는 없다’라고 한 거처럼 ‘절제에도 정의는 없다’ 다만 자신과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며 조율을 할 뿐이다. 조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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