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일 어린 줄
현순과 은지를 태운 미니버스가 수도 싱가포르에서 조금 떨어져 외곽에 위치한 학교 운동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시원한 하늘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산뜻한 건물은 수업하는 곳과 기숙사 두 개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녀는 천천히 둘러보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중 나오기로 한 한국인 유학 관계자가 모녀를 원장실로 데려갔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형식적인 미소를 띤 현지 원장에게 대강 설명을 들었다. 이곳은 싱가포르 국립 중학교를 목표로 많은 양의 공부를 시키는 시설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하고 우선 최대한 영어를 빨리 마스터하는 걸 목표로 한다고 했다. 사설 국제중학교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지만 학비가 상당히 비싸고 국립 중학교에 가면 학비도 저렴하고 질 좋은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원장이 하고 한국인 관계자가 통역했다. 현순은 은지를 힐끗 쳐다보았다. 학교성적도 좋고 독서도 많이 하고 호기심 많은 은지가 이제는 한국어가 아닌 모든 일상을 영어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걱정이 스멀스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인 유학관계자는 모녀를 은지가 머물 기숙사로 안내했다. 겉에서 보기엔 산뜻한 건물이지만 안에 들어오니 낡은 시설이 눈에 띄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가니 두 개의 침대와 책상이 놓여있었다. 푹푹 찌는 열대 날씨라 관계자는 얼른 에어컨을 틀었다. 낡고 오래되어 색이 바랜 에어컨에서 덜덜덜 거리며 조금 퀴퀴한 냄새와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와 여기가 내가 살 집이네요."
은지는 침대에 누워보고 책상 앞 의자에도 앉아 빙그르르 돌아보기도 했다. 현순은 관계자에게 허리를 구십 도로 연신 숙여가며 부탁의 인사를 하고는 은지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은지야 엄마는 사실 많이 걱정이 돼. 앞으로 네가 알아서 공부도 하고 밥도 먹고 낯선 곳에서 지내야 되는 게 마음이 안 놓여. 그렇지만 네가 원한 거고 우리 딸은 해낼 수 있으니 여기에 온 거야. 알았지? 저녁 9시 안에 엄마한테 꼭 전화해서 목소리 들려줘. 그렇게 할 수 있지? "
"응 알았어요.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엄마도 서울에 도착하면 전화 주세요 "
현순은 설레는 표정의 은지를 한번 꼭 껴안고는 발길을 돌렸다. 낯선 싱가포르 시내의 풍경도 현순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달리다 이륙하자 현순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둠이 현순의 마음에 스며들면서 모녀의 첫 작별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은지는 건물 안팎을 둘러보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수프와 빵과 소시지가 나와 맛나게 먹고 숙소로 들어오니 왠 낯선 소녀가 은지 건너편 침대에 앉아 있었다. 룸메이트였다. 은지는 쑥스럽지만 먼저 인사했다.
"안녕"
"안녕? 너 한국인이야? "
"응"
"와 반가워 나는 신핑이라고 해. 나 한국 연예인 너무 좋아해서 한국말 조금 배웠어"
"아! 반가워 난 은지야"
어설프지만 한국말을 하는 중국인 룸메이트가 어쩐지 낯설면서도 반갑기도 했다. 신핑은 한 달 전에 이곳에 왔으며 여기 교육이 얼마나 힘든지 너도 곧 체험하면 놀랄 거다라는 등 모든 일상이 영어로 시작해서 영어로 끝나니 엄청 열심히 쫓아가야 할 거라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은지는 힘들다고 하는 말은 흘려듣고 친절히 설명해 주는 룸메이트가 있어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시작된 엄청난 수업량에 파묻히게 되면서 그런 편안한 마음은 금방 산산조각 났다. 아침 7시에 기상해서 운동하고 식사하고 9시 되기 전에 초급자 교실로 들어가면 학교 선생님들은 쉬운 영어를 천천히 가르친다고는 해도 은지가 따라가기에는 도통 알아듣기 어려웠다. 은지는 철이 일찍 들어 자기를 믿어주고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쓸쓸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은지는 의지를 불태우고 싶었다.
언어는 무슨 말인지 모르니 선생의 표정이나 제스처를 눈여겨보았다. 어림잡아 무슨 말인지 눈치로 때려 맞춰보기도 했다. 그리고 짧은 말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수업은 오후 5시까지 진행됐다. 너무 길어 피곤했다. 반에는 30명 정도 되는 은지 또래 아이들이 모여있었고 한국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일본인 등의 아이들이 있었다. 매일 은지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애들만 보다 남아시아 애들을 보니 많이 낯설었다. 그중 8살 정도의 어린 여자아이가 있었다. 은지는 유독 어린아이에게 눈길이 갔다. 선생님의 수업방식은 질문을 많이 하는 거였다. 대답을 잘 못하더라도 질문을 했다. 어린아이가 질문을 받아 일어났다. 영어로 더듬더듬 하는데 코리안이란 말이 은지 귀에 들렸다.
'나와 같은 한국인이잖아?' 은지는 놀랬다.
‘뭐야 나보다 더 어린애가 왔다니. 세상에'
숙소에서 쉬다가 시간을 보니 밤 9시가 지나고 있었다. 은지는 복도로 나와 국제전화를 걸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수화기 너머로 너무나 반가워하는 애정 어린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지야. 어떻게 오늘 잘 지냈어? 별일 없지?”
은지는 궁금해하는 엄마의 말에는 대답 하지 않고 딱 한마디만 했다.
“엄마. 여기 8살짜리 애도 왔어. 나 좀 더 일찍 올걸 그랬어.”
“...”
*그림은 백영수화백의 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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