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11화)
▲ 코메르시우 광장과 닿아 있는 테주 강.
ⓒ 김연순
리스본(리스보아)에 머무는 동안 하루의 일정을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시작해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마무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리스보아의 모든 길은 이 광장으로 통한다고 보면 된다. 트램도 버스도 그리고 테주 강을 헤치며 들어오는 페리도 이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다.
코메르시우 광장은 ㄷ자형 노란색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나머지 한 면은 테주 강과 닿아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커다란 기마상이 당당하게 서 있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호세 1세다.
호세 1세는 1755년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폼발 후작과 함께 재건한 왕이다. 광장 북쪽 아우구스타 거리로 통하는 길목에 흰색 대리석 아치가 있는데 '승리의 아치'라 불린다. 아치 맨 위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이 눈을 사로잡는다. 마리아 1세가 폼발 후작과 바스쿠 다 가마에게 월계관을 씌어주고 있다.
▲ 레이저쇼가 펼쳐지는 코메르시우 광장
ⓒ 김연순
숙소와 가까운 이곳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들렀다. 저녁 무렵의 코메르시우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날 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많았다. 전날과는 달리 색색의 불빛도 비추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까이 가보니 레이저 쇼를 한다. 초록빛, 붉은빛, 보랏빛 각양각색의 불빛이 광장의 바닥부터 흰색 '승리의 아치'까지 비춘다.
낭만 흐르는 거리... 10여년 전 그때가 생각났다
건축물에 음악과 함께 불빛이 흐르니 보는 내내 낭만에 취하게 된다. 광장의 한쪽 부스에 한자가 있어 확인해 보니 포르투갈과 역사적 관계가 있는 마카오 관광청 주최로 펼쳐진 행사다.
광장과 닿아 있는 테주 강 강변으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도 강변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잠시 쉬려고 강변의 둑에 앉았다. 강가에는 거리의 예술작품들이 즐비해 있다. 모래로 만든 악어는 비늘과 이빨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페인트로 색칠된 다양한 색깔의 돌들이 쌓여 작은 탑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들 보며 감사의 뜻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 준다.
▲ 테주 강변에서 돌을 쌓아 만드는 거리의 예술가
ⓒ 김연순
강변의 둑에 앉아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흔들해 보았다. 바람이 더 가까이 느껴진다. 눈을 떠보니 앞에는 대서양이 펼쳐져 있다.
문득 십여 년 전 생각이 났다. 큰 아이와 둘이서 쿠바의 아바나를 여행한 적이 있다. 5월이어도 한낮에 거리를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찌는 듯한 더위였다. 숙소에 들어가 쉬다가 해 질 무렵이면 밖으로 나왔다.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걷다가 말레꼰의 강가에 이르렀다. 길게 뻗은 강변으로 둑이 있고 그 둑 위로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 있었다. 아기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가족으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다.
십여 년 전이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내내 한국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쿠바의 청년을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쿠바에 대한 궁금증을 그에게 쏟아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집집마다 TV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한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으니 저녁이면 사람들이 골목으로, 강가로 나온다고 한다.
강가에 나와 웃고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데,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서적으로는 풍요로워 보였다. 나란히 강가에 앉아 있는 동양인 둘이 신기했는지 열두어 살 된 아이들이 다가왔다. 어디서 왔는지 묻더니 코레아, 아는 나라라고 반가워한다. 가족들까지 소개해 주어 인사를 나누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정겨운 환대로 느꼈다. 헤어지며 가지고 있던 부채 두 개를 주었더니 아이들이 좋아하며 서로 갖겠다고 난리다. 장난치는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여행 마치고 돌아와서도 쿠바 하면 떠오르는 따뜻한 장면이었다.
테주 강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는데 문득 아바나의 말레꼰이 떠올랐다. 그 당시의 정겨움이 다시 되살아온다. 생각해 보니 상당히 떨어진 서로 먼 지역이지만 아바나의 말레꼰도, 리스보아의 테주 강도 대서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지도상으로는 다른 대륙이지만 강으로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자연도 사람도 이렇게 연결되어 사는 게 아닌가 싶다. 마음 한편에 뭔가 찡한 울림이 지나간다.
카몽이스 광장, 아주다 궁정에 트램을 타고 다녔다. 아줄레주 박물관까지 둘러보고 저녁이 되어 다시 트램을 타고 타임아웃 마켓으로 갔다. 타임아웃 마켓은 매우 깔끔했고 무엇보다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이 많았다. 식사도 커피도 술도 마실 수 있는 공간들이 즐비했다.
▲ 타임아웃 마켓에서 먹은 뽈뽀와 와인
ⓒ 김연순
천천히 둘러보다가 토닉이 들어간 와인과 감자 퓌레를 곁들인 뽈뽀를 주문했다. 뽈뽀는 문어 요리다. 바칼로우(대구)와 함께 포르투갈의 대표적 요리라 할 수 있다. 뽈뽀는 말캉하면서 부드러웠고 간도 적당했다. 감자 퓌레는 달콤함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와인과도 궁합이 딱 맞았다.
독재정권에 맞선 이들 기념하는 축제, 카네이션 혁명
4월 25일은 포르투갈 혁명기념일이다. 1932년부터 40여 년간 국민들을 총칼로 억압하며 두려움에 떨게 한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맞서 쿠데타가 일어난 날이다. 살라자르 정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혁명군들에게 거리의 시민들이 카네이션을 건넸고, 혁명군들은 그 꽃을 총구에 꽂아 핏빛보다 선명한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갈 혁명을 카네이션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4월 25일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테주 강에는 '4월 25일 다리'가 있을 정도다.
▲ 4월 25일에 열리는 카네이션혁명 축제
ⓒ 김연순
하루 종일 거리에서 축제가 열렸다. 가는 곳마다 광장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빨간 카네이션을 들고 있거나 머리 혹은 옷깃에 꽂고 있다. 나도 카네이션 하나 얻고 싶었으나 말할 기회를 놓치며 결국 얻지 못했다. 거리는 음악과 춤, 노래로 들썩인다. 흥겨운 음악과 함께 사람들이 잔뜩 둘러싼 곳이 있어 사이사이 헤치고 들어가 보았다.
두 사람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냥 예사 춤이 아니다. 둘이 춤을 추는데 마치 겨루기를 하는 것 같다. 우리의 전통무술 택견처럼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동작이 이어진다. 알고 보니 이 춤은 '까뽀에이라'라는 전통 춤이었다. 브라질 흑인들의 전통 춤과 무술이 결합한 것인데, 예전 아프리카 노예들의 무술 연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노예들에게 무술 연습은 금지되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그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춤 동작을 변형해 무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까뽀에이라'는 이 무술연습에서 유래된 것이다. 억압에 맞서고자 한 절실함이 묻어 나오는 이 춤을 보고 있자니 흥겨움과 동시에 서글픔도 느껴진다. '까보에이라'는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길을 걷다가 혁명기념일을 축하하는 합주단을 만났다. 걸으며 합주를 하고 있다. 빨간 카네이션을 든 시민들이 이들을 뒤따르면서 손뼉 치고 호응하며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길 가 가판대에서는 작은 잔으로 한 잔씩 술을 팔고 있는데 포르투갈의 전통주인 '진자'다. '진자'는 계피와 물, 설탕을 넣고 발효시킨 체리주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술잔이 초콜릿이다. 한 잔 술을 마신 후, 술잔인 초콜릿도 먹는 거다. 우리도 한 잔씩 사서 마셨다. 술잔인 초콜릿도 씹어 먹었다. 독한 술 한잔 뒤 입안에 달콤함이 가득 남는다.
▲ 초콜릿 잔에 담기는 포르투갈 전통주 진자
ⓒ 김연순
모두가 기뻐하는 포르투갈 혁명의 날을 축하하며 나도 그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호시우 광장에 도착했는데, 진자로 유명한 술집 '아 진자냐'가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진자를 산다. 광장에 진자 마시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흘린 진자로 인해 광장의 바닥은 이미 끈적끈적해져 있다. 나도 한 잔 하려고 줄을 섰다.
주문하려고 보니 한 잔 사서 그걸 누구 코에 붙이냐 싶어 그냥 한 병을 샀다. 달콤한 향의 지자냐, 그 자리에서 연달아 두 잔 마셨다. 속이 뜨끈하다. 도수를 확인하니 무려 23도다.
왁자지껄 사람 가득한 광장에서 포르투갈 혁명기념일 축제의 현장에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밤늦게까지 거리를 다니며 축제를 즐겼고 군사독재 시절을 경험한 한국의 시민으로서 나도 그들에게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