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17화)
탕헤르로 가는 버스는 셰프샤우엔 CTM 버스터미널에서 오후 6시 45분 출발 예정이다. 호텔에서 짐을 찾아 택시를 타고 터미널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크지 않은 터미널 구석구석 돌아보다가 벤치에 앉아 가방에 있던 초코칩 쿠키를 꺼내 먹었다. 달달한 맛이 혀끝에서 녹아내리며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피곤할 때는 역시 단 게 최고다.
그런데 출발시간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이제 버스가 안 오는 정도로는 긴장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여행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된 연륜이랄까? 안내소에 가서 물어보았다. 여기서 출발하는 건 맞지만 왜 안 오는지는 모르겠단다. 터미널 안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씩 마시며 기다렸다. 주변을 보니 우리처럼 캐리어를 들고 시계를 보며 수시로 고개를 빼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모두 탕헤르로 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버스는 7시 25분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몰려드는 사람들 속에서 서둘러 짐을 싣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테투안을 경유해 밤 10시가 되어 탕헤르에 도착했다. 중간에 한 번은 쉴 법 한데 버스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버스 기사님이 힘들 것 같았고 혹여 사고가 나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내 몸이었다.
멀미와는 거리가 먼 나는 웬일인지 버스 타고 가는 내내 멀미에 시달렸다. 계속 속이 메스껍고 토할 것 같았다. 남편이 옆에서 손을 주물러 주고 등을 쓸어내려주고 했지만 멀미는 여전했다. 그때 옆 좌석에 앉아 가던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괜찮은지 물으며 토할 것 같으면 쓰라고 비닐봉지를 내민다. 히잡을 쓴 젊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낯선 이방인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힘들어하는 나를 보며 안부를 물어주는 그들의 호의와 친절이 너무도 고마웠다. 조심스럽게 내미는 비닐봉지와 한 마디 말이 그리도 따스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도 뭔가 든든해지면서 힘도 나고 속도 이전보다는 훨씬 편해졌다. 생판 모르는 낯선 동양인을 위해 걱정해 주고 위로해 주는 그들의 따스한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졌나 보다.
되돌아 생각해 보니 한 달 여 간의 배낭여행으로 심신이 몹시 고단하다는 것을 몸은 알고 있던 것 같다. 생전 하지 않던 멀미로 그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러던 중 낯선 이방인들의 호의와 따뜻한 배려를 접하게 되자 그 따스함이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선의와 관심은 그 자체가 내겐 '돌봄'이었다. 무사히 탕헤르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맙고 친절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했다.
문화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의 일화가 생각났다. 그가 수업시간에 한 학생으로부터 인류의 문명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질문을 받았다. 그 학생은 아마도 점토로 만든 항아리나 낚싯바늘 같은 도구 혹은 종교적 유물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자 마가렛 미드는 인류의 문명은 "사람의 부러진 대퇴부 골절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답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다리가 부러지면 죽을 수밖에 없단다. 부러진 상태에서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먹이 활동을 할 수도, 강으로 가서 물을 마실 수도 없기 때문이다. 부러진 대퇴골이 치유된 흔적은 누군가가 다친 사람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고, 함께 머물며 회복될 수 있도록 돌보았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마가렛 미드의 설명에 다시 한번 깊이 공감하게 된다.
탕헤르는 모로코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예로부터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주요 거점이었다. 지중해를 건너면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지브롤터와 만나는 곳이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중세 시대 탐험가이자 여행가인 이븐 바투타가 바로 탕헤르 출신이다. 아프리카의 관문 탕헤르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일정상 모로코 여행을 마치며 여기서는 그저 하루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 지중해에 접한 마리나베이에서 본 밤의 전경
ⓒ 김연순
▲ 지중해 접한 탕헤르의 마리나베이에서 아침 전경
ⓒ 김연순
탕헤르의 숙소는 마리나베이에 있는 호텔이다. 입구에서부터 럭셔리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방으로 올라가 창문을 열었는데 넓게 펼쳐져 있는 지중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너무도 환상적이다. 널찍하고 길게 뻗어 있는 도로는 깔끔하고 조명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가로수인 야자수 너머로 보이는 지중해 바다에는 요트들이 가득하다. 요트가 가득한 바다를 보며 자게 될 줄이야. 이번 여행 중 가장 럭셔리한 숙소다. 가격에 비해 너무도 훌륭한 숙소에서 횡재한 기분으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계속 여기서 자고 싶다 생각했지만 내일 낮엔 여기서 나가야 한다. 그게 현실이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는데 몸이 무겁다. 안락한 곳에서 잤다고 쉽게 피곤이 떨쳐지는 건 아니었다. 몸을 추스르고 호텔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는 전 세계의 다양한 인종이 모두 모인 듯했다.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마라케시 제마알프나 광장의 야시장에서 불꽃 장난감을 던지는 묘기를 보이며 돈을 받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어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어떤 아이들은 동전 몇 푼 벌려고 늦은 밤에 광광객들 앞에서 장난감을 던져 올린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 그대로의 모습이라니 마음이 무겁고 씁쓸했다.
잠시의 휴식을 마치고 이제 밖으로 나가 지중해 해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나서자마자 머리 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그래도 해변을 걸어 봐야지 싶어 조금 더 걸었다. 해변에 도착해 발을 딛자마다 '앗 뜨거워'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해변의 모래에 발이 푹푹 빠졌는데 운동화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모래는 놀라울만치 뜨거웠다. 순식간에 이마로 땀이 차오르며 얼굴로 목덜미로 땀이 흘러내렸다. 안에서 보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현실이다. 얼마 못 걷고 다시 호텔로 들어왔다.
체크아웃 시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이 점점 더 쳐지고 일어나기가 힘들다. 그 무서운 양 머리도, 어깨를 스치는 갈매기도, 땅바닥에서 다리 사이를 오가는 비둘기와 고양이도 없는 마음 편한 곳에 있는데 몸은 아프다. 그래도 이제 추스르고 일어나 지중해를 건너야 한다.
탕헤르에서 하루를 묵게 된 연유는 오직 하나다. 지중해를 배 타고 건너는 감격을 맛보고 싶어서다. 그래서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비행기를 마다하고 버스 타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제 아프리카 대륙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 타리파로 가려한다.
▲ 여행 떠난 지 한 달쯤 되니 오래된 캐리어 손잡이가 부러졌다.
ⓒ 김연순
그런데 배를 타기 전, 캐리어 두 개 중 하나의 손잡이가 부러져 버렸다. 잠시 당황했지만 그러려니 싶었다. 오래된 캐리어라 여행 중 언젠가는 바퀴가 망가질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손잡이가 부러지긴 했지만 끌고 가는 건 가능하다. 부러진 손잡이를 보니 재미있고 웃음도 나왔다. 문득 새로 가방을 사지 말고, 여행 마칠 때까지 이 가방으로 다녀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캐리어에게 소리 내어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조금 더 버텨줄래?"
드디어 승선을 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페리호다. 짐을 맡기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에어컨이 지나치게 세게 나와 너무 추웠다. 더위에 매우 취약한 내가 오히려 햇빛을 찾아 창가로 갈 정도로 실내 공기는 차가웠다.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손수건까지 꺼내 무릎을 덮었다. 배 안에는 식당과 카페테리아가 있다. 도착하려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 따스한 창가에 자리 잡고 앉으니 조금은 추위가 가셨다. 그리곤 카페테리아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다. 배도 부르고 온기도 느껴지고 이제 더 바랄 것 없이 편안했다.
▲ 모로코 탕헤르에서 이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면 스페인 타리파에 도착한다.
ⓒ 김연순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지중해를 바라보았다. 넘실넘실 커다란 파도를 타고 배가 나아가고 있다. 잠시 후에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무슨 일이지 하며 정신을 차렸는데, 어느새 도착했단다. 시끄러운 소리는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잠시 앉았을 뿐인데 그만 잠이 들어 버렸던 거다. 도착해서야 깨다니, 말도 안 된다.
오로지 지중해 건너는 느낌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 배를 택했던 건데 샌드위치 먹자마자 잠이 들어 버리다니. 맙소사, 이럴 수가. 너무너무 황당하고 허무했다. 이러려고 다섯 시간 걸려 탕헤르까지 온 건 아니었는데... 우리 둘 다 몹시 피곤하긴 했나 보다. 기막혀 하며 마주 보았다. 그저 피식 웃음 밖에 안 나왔다.
▲ 페리호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는 중. 멀리 모로코 탕헤르가 보인다.
ⓒ 김연순
오늘 밤 목적지는 세비야다. 구글 지도 검색하니 타리파항에서 세비야 가는 버스터미널까지는 택시로 금세 갈 수 있는 거리다. 배에서 내려 한 시간 정도 후에 타는 버스로 예매해 두었기에 시간 여유는 있었다. 그런데 배에서 짐을 찾아 나오는데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입국심사장이다.
탕헤르는 모로코의 항구 도시이고 타리파는 스페인의 항구 도시다. 국경을 넘으면 입국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배를 타고 오다 보니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자칫 잘못하면 세비야행 버스를 놓치게 된다. 서둘러 나와야 했다.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연신 미안하다고 하며 '새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입국심사대에 섰고 다행히 별 탈 없이 바로 마치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택시승강장이 앞에 보였고 버스터미널로 직행했다. 터미널까지는 얼마 안 걸려 도착했고 간신히 시간 맞춰 세비야행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세 시간 정도 걸려 저녁 여덟 시쯤 드디어 세비야에 도착했다.
이제 다시 스페인이다. 보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전에 그 낯설던 스페인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스페인이 편안하다. 이 편안한 심정은 뭔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마음이 놓이며 안심이 되는 이 마음, 뭐지? 왠지 익숙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