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19화)
세비야에 머물며 당일치기로 인근 론다에 다녀오기로 했다. 론다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말라가주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 도시다. 론다는 가파른 타호 협곡에 있는 누에보 다리(Puent Nuevo)로 유명하다.
아침 9시 론다행 버스를 타러 터미널로 갔다. 택시에서 내려 터미널로 들어섰는데 론다행 버스 안내판이 안 보인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 터미널 이름을 확인하니 아뿔싸, 잘못 찾아온 거다. 곧바로 나가 다시 택시를 잡아 타고 플라자 데 아르마스 터미널로 갔다. 이번엔 실수하면 안 된다 싶어 터미널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출발했다. 허겁지겁 도착해 보니 다행히 버스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아침 일찍 시간 여유를 가지고 나와서 다행이다. 이제 이 정도 실수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뭐 이런 실수쯤이야
버스에 올라 차창 밖을 보니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평원 가득 자라는 나무는 짐작컨대 올리브 나무로 보인다. 버스는 세 시간을 달려 드디어 론다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화장실을 가려고 했으나 화장실 앞에 줄 선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모두 론다를 보러 온 여행객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카페테리아가 보였고 커피도 한 잔 마실 겸 그리로 갔다. 화장실 다녀온 후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메뉴 사진의 추로스가 눈에 확 들어온다. 전에 추로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 구미가 당겼다.
간단하게 간식으로 먹을 요량으로 추로스와 초코라떼를 주문했다. 여행책자에서 론다의 주민들은 보통 아침 식사로 추로스와 카페 콘 레체(카페라떼)를 먹는다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아침 식사로 나온다기에 간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2인분으로 나온 추로스는 양이 엄청 많았다. 막대모양의 한국 추로스와는 달리 둥글고 길게 말린 채 나왔다.
▲ 추로스와 초코라떼.
ⓒ 김연순
바삭한 추로스를 초코라떼에 찍어 먹으니 그 달콤함이야 어디 비할 바 있겠는가. 입안 가득한 달달함에 잠시 취해 있었으나 어느 순간 느끼함이 쑥 올라오고 배는 부를 만큼 불렀다. 남편은 전날 론다에 관한 책자를 보며 론다의 유명 맛집에서 소꼬리찜을 먹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추로스로 배를 채우다 보니 소꼬리찜은 그만 멀리 날아가 버렸다. 지금도 남편은 소꼬리찜 안 먹고 온 걸 몹시도 아쉬워하고 있다.
소화도 시킬 겸 론다의 상징 누에보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걸으니 누에보 다리가 보인다. 누에보는 새로운(New)이라는 뜻이다. 1735년에 타호 협곡 위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다리를 만들었는데 그 다리가 완공된 지 8개월 만에 어처구니없게도 그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 충격을 딛고 다시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튼튼하게 만들려다 보니 완공까지는 무려 42년이 걸렸다.
▲ 타호 협곡을 잇는 누에보 다리. 다리 위 오른쪽 건물은 파라도르.
ⓒ 김연순
이렇게 만들어진 다리는 '새로운 다리'라 해서 이름이 '누에보 다리'다. 누에보 다리의 길이는 30미터로 비교적 짧다. 그러나 높이가 무려 98미터나 된다.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기 그지없다. 누에보 다리는 3층 구조로 되어 있다. 협곡 바닥부터 있는 1개의 아치가 1층, 그 위에 길쭉한 타원형 아치가 2층, 마지막으로 조금 짧은 아치가 맨 위의 상판을 지지하고 있다.
다리 위에서 협곡을 내려다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다. 녹색 이끼 잔뜩 끼어있는 커다란 바위들 사이로 마치 영혼을 불러들이는 듯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웅장하면서도 기괴하며 동시에 짜릿하고 오묘하다. 이러한 오만가지 감성을 즐기는 듯 여행자들이 누에보 다리 위에 가득하다. 그 옆으로 협곡을 전망으로 한 파라도르가 멋들어지게 자리 잡고 있다. 파라도르는 유서 깊은 옛 수도원 같은 건물을 리모델링해 사용하는 고급 숙박시설이다. 협곡 위 누에보 다리와 파라도르는 헤밍웨이의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단다.
남편 말, 안 들었으면 큰일날 뻔
누에보 다리 끝 돌로 된 의자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더 다녀 보자고 한다. 나는 발이 아파 여기서 쉬겠다고 하고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남편이 떠난 후, 나는 계속 협곡에 마음을 뺏긴 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상념에 젖어 있었다. 얼마 후 남편이 돌아왔다. 누에보 다리를 보는데 최적인 장소를 찾았다며 가보자고 한다. 한낮의 땡볕에 나는 지쳤고 발이 아파 더 못 걷겠다고 했다.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발이 아프다 보니 슬슬 의욕마저 꺾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포기하지 않는다. 가보자고, 안 가면 후회한다고 계속해서 졸라댄다. 여기서 보나 다른 곳에서 보나 뭐 그리 다르겠나 싶었지만 하도 권하니 혹시나 해서 따라나섰다. 남편의 팔에 의지한 채, 골목을 돌아 십여 분 정도 아래로 내려갔다. 남편이 봐 두었다는 장소에 도착해 보니 놀라웠다.
그야말로 최적의 뷰 포인트다. 위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거대한 협곡의 바위 정면이 눈에 들어온다. 저 위로 누에보 다리가 보이는데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다리의 형상도 달리 보인다. 보는 위치에 따라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처럼 위치가 바뀌니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주변의 풍경 보이는 족족이 장관이었다.
▲ 내려다 보고 있으면 아찔함을 느끼게 하는 타호 협곡의 거대한 바위들
ⓒ 김연순
누에보 다리를 건너 동네를 걸었다. 기다란 골목 양쪽으로 온통 흰색 상가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건물 이층에 난 창문 모습이 특이하다. 창문마다 나무 재질의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데 실내가 아니라 모두 창문 바깥으로 드리워져 있다. 스페인 남부지방의 뜨거운 햇빛을 차단하느라 그리 해 둔 것 같다. 더위에 취약한 나는 그 방식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걷다 보니 성당이 보인다. 산타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이다.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성당으로 외관에서 얼핏 이슬람 양식도 느낄 수 있다. 이 성당은 론다의 수호성인을 기리는 곳이라고 한다.
자연과 여행자, 딱 내 얘기 같았다
더 가니 작은 박물관이 나타났다. 타일로 덮인 외벽에 글이 쓰여 있다. 번역기를 돌려보니 "역사적 기억, 유명한 전설, 웅장한 자연의 숭고한 효과, 어렵고 알려지지 않은 길"이라고 적혀 있다. 이어서 "론다는 무모한 여행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라고도 쓰여 있다. '웅장한 자연의 숭고한 효과'와 ' 무모한 여행자의 호기심을 끈다 '는 말에 마음이 요동쳤다. 읽고 또 읽으며 무슨 뜻인지 음미해 보았다.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연의 숭고함'과 ' 여행자의 호기심'이라는 문구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로 착 감겼다. 마치 씨줄 위에 날줄이 얹어지는 것처럼 어우러지고 뭔가 결실이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마침내 내가 이 글을 읽으려고 여길 왔나 싶은 생각마저 일었다.
지도 보며 전망대를 찾아 걷다 보니 자그마한 공원이 나온다. 커다란 나무들이 늘어선 공원은 곳곳에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늘에 들어서자 어딘가에 앉아 쉬고 싶었다. 때마침 버스킹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아름다운 기타 선율도 들린다. 그늘진 곳의 벤치를 찾아 앉았다. 기타 연주가 가깝게 들린다. 맑고 가벼운 투명한 소리다. 그런데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눈물이 왈칵 솟았다. 가슴이 미어지고 먹먹했다. 그리고는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 사람들이 볼까 싶어 고개를 돌리며 연신 주먹으로 눈물을 훔쳤다. 지금 떠올려 봐도 이유를 알 수 없다. 기타 선율에 눈물이 솟다니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다. 그런 게 음악인가 그저 짐작해 본다. 한참 동안 기타 연주에 빠져 있다가 홀연히 정신을 차리고 연주자에게 다가갔다. 꽤 많은 CD가 쌓여 있고 판매 중이다. 본인이 작곡한 음악이란다. 아름다운 연주에 감사를 전하고 한 장 사서 돌아 나왔다.
▲ 론다의 한 작은 공원의 기타 연주자
ⓒ 김연순
경찰 올 때만 잠깐 조용해진 사람들, 여기가 스페인
세비야로 돌아와 장 봐온 식재료로 숙소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 먹었다. 잠시 쉬고 스페인 광장에 가려고 8시쯤 나왔다. 세비야는 저녁 8시가 되어도 날이 환했다. 거리에 나서자마자 떼거지로 모여 있는 군중을 만났다. 빨간 유니폼 입은 축구 응원단이다. 모두 박수를 치며 합창을 한다. 응원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거리가 들썩이는 것 같다. 응원단은 젊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여성도 남성도 나이 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다 섞여 있다.
어린아이들도 어우러져 신나게 춤추며 손뼉 치고 노래한다. 골목을 가득 메운 시민들은 차가 들어서면 양쪽으로 갈라서 길을 내어 준다. 차가 지나가면 응원가를 부르며 차량의 보닛을 두드린다. 차량의 운전자는 싫은 내색은커녕 웃으며 함께 노래하면서 천천히 빠져나간다. 한 차가 지나가면 다음 차를, 또 이어서 지나는 차를 계속해서 두드리며 노래한다. 모두 다 신났고 그 신남은 전염이 되는지 우리도 따라서 덩달아 신났다.
뜨거운 열기 속 저 멀리에서 커다랗고 까만 차가 나타났다. 경찰차다. 들어서는 경찰차에 사람들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경찰차가 가까이 오자 차마 경찰차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박자에 맞춰 손뼉 치고 노래한다. 경찰차라고 무서워하거나 위축되는 게 전혀 없다. 이윽고 경찰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더니 무장을 한 경찰 대여섯 명이 내렸다.
▲ 세비야 경찰
ⓒ 김연순
웃음기 없는 단호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다. 길을 메울 정도로 시민들이 가득하니 사고가 날까 염려해서 배치된 것 같다. 경찰들은 내 예상과 달리 시민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그저 주위를 살피며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거리에 우뚝 서 있다. 경찰이 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 잠시 노래소리가 작아지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다시 박자를 딱딱 맞춘 노래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아, 스페인은 역시 축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