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부부의 좌충우돌 배낭여행기(9화)
2023년 4월부터 42일 동안 스페인(바르셀로나, 산세바스티안, 빌바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포르투갈(포루투, 리스본), 모로코(마라케시, 페스, 쉐프샤우엔, 탕헤르)의 12개 도시를 여행하며 경험한 이야기 공유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영화를 본 적이 았다. 포르투갈의 살라자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며 미지의 도시 리스본과 레지스탕스 그리고 야간열차라는 키워드 하나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언젠가는 꼭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지금, 드디어 실행에 옮길 기회가 왔다. "리스본에 갈 때는 무조건 야간열차를 탄다"가 처음부터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야심찬 계획은 곧 수포로 돌아갔다. 요즘은 리스본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운행하지 않는단다. 몹시 아쉬웠다. 그대로 포기할 순 없어서 아쉬운대로 '야간'은 아니어도 '리스본행 열차'는 타기로 했다.
포르투 숙소에서 체크아웃 후 우버를 불러 기차역으로 갔다. 포르투 캄파냐역에서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역까지는 기차로 세 시간 걸린다. 기차에 타 짐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드디어 리스본행 열차를 타는구나, 오랜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때마침 비가 내린다. 달리는 기차 창 밖으로 흐르는 빗물이 흐른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창밖 풍경이 빗물이 겹쳐 흐릿하게 보이는데 웬지 뭉클하면서도 처연하게 느껴졌다.
▲ 물결 모양의 자갈 바닥으로 유명한 호시우 광장. 브라질 최초의 황제가 된 동 페드로 4세의 동상이 있다.
ⓒ 김연순
리스본은 포르투갈의 수도다. 리스본은 영어식 표기이고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라고 부른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보아에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이 있었다. 해일을 동반한 지진과 화재로 인해 오랜 역사의 도시 리스보아 대부분 건물들은 파괴되었다. 사망자 수도 최대 6만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후 리스보아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유럽 최초의 내진 설계 가이올라 공법 발명되고 도시는 다시 만들어졌다.
리스보아는 평지보다 언덕이 많은 도시다. 윗동네에 사는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교통수단은 좁은 골목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푸니쿨라였다. 푸니쿨라는 1900년대 초부터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관광객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 2000년대 들어서 푸니쿨라 외관에는 그래피티 장식이 등장했고 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인다.
리스보아에서 7박 예정이라 교통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리스보아 카드를 구매했다. 리스보아 카드 하나면 버스, 메트로, 트램은 물론 가까운 인근 도시로 가는 기차까지도 가능하다. 여기저기 다니며 리스보아 카드를 잘 이용했는데, 남편은 카드를 두 번이나 잃어버렸다.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과 함께 넣었는데 핸드폰 꺼내다가 카드까지 같이 꺼내졌는지 그만 행방이 묘연하다. 한 번 실수했으면 다시 그러지 말아야 할텐데 뭐가 아쉬웠는지 남편은 다시 산 리스보아 카드를 똑같은 방식으로 또 잃어버렸다.
낯선 도시 리스보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일일투어를 신청했다. 가이드의 안내로 호시우 광장을 비롯해 피게리아 광장, 까몽이스 광장 등 몇 개의 광장과 산타루치아 전망대와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를 둘러 보았다. 트램과 버스를 타며 다녔고 높은 언덕에 있는 곳들은 푸니쿨라와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다.
▲ 언덕이 많은 많은 도시 리스본을 오가는 푸니쿨라. 이제 외관은 그래피티로 가득하다.
ⓒ 김연순
조금 이동하면 유서 깊은 광장이 나오고 또 조금 이동하면 아름다운 리스보아 전경이 보이는 전망대들이 나온다. 다니다보니 신기하게도 거리의 가로수가 오렌지 나무다. 일일투어 함께 한 일행들도 신기해했다. 갑자기 생각나서 제주의 가로수는 하귤나무라고 말해 주었다. 사람들이 그것도 신기해했다.
다음날 아침, 느즈막히 일어나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탑이 있는 벨렝 지구로 출발했다. 마침 현금이 거의 떨어져 버스 타러 가는 길에 ATM기를 찾았다. 현금을 인출하려고 월랫 카드 비번을 누르는데 이상하게도 계속 실패다. 비번을 잘못 기억하나 싶어 초조한 마음으로 심사숙고하며 이것 저것 눌러 보았는데 다 실패다. 급기야 연속 5회 실패라고 카드가 정지되었다.
월랫 카드가 앱의 비번과 실물 카드의 비번이 다르다는 걸 생각하지 못한 채 저지른 사고다. 머리 속이 하애졌다. 일단 생각을 정리하기로 하고 바로 앞에 있는 코메르시우 광장의 노천 카페로 들어가 앉았다. 남편이 숙소에 두고 온 다른 카드로 해봐야겠다며 카드 가지러 숙소로 갔다. 나는 에스프레소 한잔을 주문했다. 벌어진 난감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아침 햇살은 너무나 투명하고 맑았다. 어떻게든 방법이 있겠지 낙관하며 천천히 커피를 음미해가며 마셨다. 햇살은 따스했고 드넓은 광장의 호젓함이 딱 마음에 들었다.
▲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 전망대에 올라 내려다 본 리스본 시내 전경
ⓒ 김연순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따스했던 햇빛은 점점 땡볕이 되어갔다. 기다리는 남편은 안온다. 전화 했더니 전화도 안 받는다. 급기야 땀이 주르륵 흐르며 더위에 취약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에서야 남편이 나타났다. 남편의 표정도 좋지 않다. 남편은 본인의 월랫 카드로도 해 봤는데 비번 5회 실패로 똑같이 정지되었다고 한다. 카페에서 나오며 커피값을 결제하는데 사용 정지된 카드라고 결제가 안된단다. 이런 망신이 또 있나 싶었다. 남편이 조금 남아 있는 현금으로 결제하고 나왔다.
하루의 시작이 험난하다. 그래도 일단 제로니무스 수도원으로 향했다. 천만다행하게도 우리에겐 리스보아 카드가 있다. 이 카드로 버스든 트램이든 다 탈 수 있다. 버스를 타고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에서 내렸다. 그런데 수도원으로 가는 사람들이 선 줄이 끝도 없을 정도로 늘어서 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그런가 싶었다. 줄 서 기다리기엔 무리가 있어 항해(발견)기념비를 먼저 가기로 했다. 저 앞에 보이기도 하고 버스를 타기엔 애매한 거리라 천천히 둘러보며 걷기로 했다. 가는 길에 푸드트럭이 있는데 때마침 배가 고팠다. 치즈 파니니와 핫도그 그리고 쥬스를 한 잔 주문했다. 남은 현금을 거의 털었고 혹시 모자랄까봐 음료는 한 개만 주문한거다.
강가에 앉아 파니니와 핫도그를 먹는데 왜 그렇게 맛있던지, 없으니까 더 귀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어쩌다 이 낯선 땅에 와서 카드도 안되고 현금도 떨어지고, 어찌 이리 되었나 싶었다. "쥬스 아껴 먹어" 하며 서로 구박하다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흐르는 테주 강물도 운치 있고 바람도 시원했다.
▲ 항해(발견)기념비. 맨 앞은 포르투갈의 항해왕으로 불리는 엔리케 왕자
ⓒ 김연순
항해기념비에 대해 안내 책자에는 '발견기념비'라고 적혀 있다. 발견기념비는 포르투갈의 항해왕이라 불리는 엔리케 왕자의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1960년에 세운 기념비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로 항해를 떠난 바로 그 자리에 세워져 있다. 기념비는 거대했고 선박 모양의 구조물에 걸터 앉은 인물들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배의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엔리케 왕자다. 그 뒤를 바스쿠 다 가마, 카브랄, 마젤란, 바돌로뮤 디아스 등이 따르고 있다. 모두가 당시의 포르투갈 입장에서 볼 때 새 항로의 개척자이고 새로운 대륙의 발견자들이다. 그래서 이름이 '발견기념비'인거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다. 아프리카도 아메리카도 원래 있던 땅이고 원래 거주하는 사람들인데, 발견이라니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그 땅에서 벌인 약탈과 살육을 떠올리면 이들에 대해 지극히 야만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타 대륙에 대한 착취와 약탈로 이룬 유럽의 부에 대해 다른 해석이 필요하고 언어도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발견기념비가 아니라 '항해기념비'로 부르고 싶다.
항해기념비 맨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리스보아 카드로 입장권 할인 받아 전망대에 올랐다. 사방을 둘러보니 탁 트인 풍광이 너무도 멋지다. 아래 광장의 바닥에 세계 지도가 새겨져 있다. 한반도 지도도 있는데 자세히 보니 누군가 작게 독도를 그려 넣은게 보인다.
▲ 항해(발견)기념비 전망탑에서 내려다 본 전경ⓒ 김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