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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령 Jun 20. 2023

명리공간

건축가가 읽는 명리학

Intro


사주라는 용어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안 들어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생활과 삶에 매우 밀접하게 닿아 있다.

지금까지는 사주라는 말 자체만으로는 점, 미신, 동양철학 이런 말들로 매우 천시되고 ‘사주를 본다’라는 말은 점 본다, 미신을 믿는다와 같은 말로 경시되어 왔다. 나 조차도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고 독실한 신자인데 명리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뭐 그런 걸 믿어? 아니면 무당이 하는 ‘말도 안 되는 미신’이라고 비하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명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 명리학이 얼마나 동양에서 ‘생활철학’으로 필요하며 나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기에 나만 이 좋은 학문을 아는 것이 아까워서 알리고 싶은데 사실 이 공부를 다 끝내서 공유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학문이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은 나의 전공인 건축설계와 접목해서 명리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공간과 명리를 접목해서 한번 풀어보자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짧게 본인에 대해 설명하면 앞서 밝힌 것처럼 기독교인이다. 그냥 기독교인도 아니고 독실한 신자이다. 기독교인이 명리가 어떻고, 사주가 어떻다고 하면 일단은 그거 미신인데 왜 믿냐,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로 하나님 외에 믿는다는 것 자체가 금기 시 되어 있기 때문에 사주를 본다, 점을 본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내가 왜 사주명리학을 공부하고, 나아가 책을 쓰게 되기 까지를 간단히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태어났다. 건축사이고 그 어렵다는 시기(1990년대)에 독일로 유학도 다녀왔으며 독일 유학에서 취득한 석사 학위도 모자라서 한국 홍익대학교에서 건축설계로 박사학위도 받았다. 건축사사무소도 개설하고 운영해 보았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강의 경력도 많아서 대학교에서 교수 생활도 해 보았다. 이러한 나의 경력과 학력을 들어보면 누가 봐도 부족할 게 없었으며 빠르고 쉽게 전문직을 얻었고 그렇게 되기 어렵다는 교수도 되었었다.

그런 내가 왜 사주가 궁금했으며 명리학을 공부하기에 이르렀을까?

나는 지금 생각해 보니 어려서부터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려고 했던 거 같다. 물론 한국에서의 고등학교까지의 삶, 그리고 대학교의 삶이 부모의 도움이 있었고 유학도 부모의 도움으로 갈 수 있었다. 유학을 하기 전의 나의 한국에서의 삶은 참으로 부모 없이는 불가능했던 삶이기 하다. 그런데 고등학생 다닐 때 나에게 처음 들어왔던 생각이 나는 무얼 하고 살아야 하나, 무엇이 되고 싶나를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었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엔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볼 때는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라고 생각하셔서 의대를 보내 의사를 시키고 싶으셨던 게 가장 큰 바람이셨다. 근데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의사를 하기 싫다고 생각을 굳혔으며 부모에게 말을 안 하고 속으로 ‘디자이너’가 되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디자이너?...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디자인(design)이란 말이 참으로 생소했고, 디자이너가 뭘 하는 직업인지도 잘 모르던 시절인데 어린 나는 무슨 생각으로 디자이너(designer)를 꿈꿨는지 지금 생각하면 엉뚱했다.


수학자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하지만 내가 뭘 잘할 수 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림을 잘 그렸고, 수학을 잘하니 뭔가 순수미술을 할 수 있는 실력은 안될 거 같고 디자이너는 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의 외삼촌과 외숙모가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계셨는데 외숙모가 잠시 한국에 나오셔서 나에게 점심을 사주셨는데 밥을 먹으면서 내게 했던 말들과 상황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외숙모의 큰 오빠가 독일에서 자동차디자인을 공부하셨고 자동차 디자이너가 되어 쌍용자동차의 디자이너가 되셨다는 소식이었다. 내게 그 소리가 너무도 크게 와닿았고 속으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디자이너’가 돼야지…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시절을 의대를 위한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며 갈 실력도 안되었기에 대학능력평가고사를 보았는데 너무도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고, 부모에게는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으니 유학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아버지는 허락을 해주셨고 점수에 맞춰 일단 대학교를 들어갔으나  어차피 유학 갈 사람으로 2학년까지만 학점관리하면서 유학을 준비하였다.

내가 유학을 갈 당시에는 자비로 유학을 간다고 해도 비자발급이 안되어서 유학시험으로 독일어를 보고 패스가 돼야 갈 수가 있었다.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시험에 붙었고 나는 대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독일 가서 편입을 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다.

여기까지는 누가 들어도 부럽고 평탄한 삶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처음 느끼는 철저히 혼자로 이 세상에서 나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는 경험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신의 존재를 찾게 되었고 삶과 죽음에 대한 존재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나는 유학 오면 다 될 거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절망감과 처음으로 느끼는 고독, 외로움.. 그 어린 나이에 모든 감정과 고민이 크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꿈에 부풀었던 디자이너, 디자이너가 되려면 대학교를 들어가야 하는데 자동차디자이너가 막연한 꿈인데 무슨 디자인을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연히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처음부터 다 다시 해야 했다. 우리나라랑 독일이랑 학제가 달라서 고등학교 일 년을 더 다녀야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대학교 입학처로부터 들었고 나의 유학비자는 처음에 언어연수를 위한 비자라 모든 것을 다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차피 독일어가 부족하니 독일 고등학교 과정을 반복하면서 어학도 하고, 전공언어를 미리 공부한 것이었으니 그렇게 시간을 허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장애물이었고, 그전에 먼저 디자인과를 들어가기 위해 혼자 알아보고 입학시험으로 신청해서 보았는데 당연히 탈락했다. 정보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외국애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근데 그 당시의 어린 나는 실패도 처음, 도와주는 사람도 하나 없이 혼자,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했다.

물론 외삼촌, 외숙모가 독일에 계셔서 심리적인 의지는 되었으나 두 분 모두 학업과 생업이 바쁘시니 한계가 있으시고 모든 것은 내가 해야 하고 극복해야 하는 경험들이었던 것이다.


자동차디자이너에서 건축디자이너로

이때 신을 간절히 찾았고, 지금의 전공인 건축설계도 이 신을 믿고 만나는 과정에서 찾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게 독일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고, 건축설계 전공도 기독교를 믿으면서 찾게 되었고 하다면서 왜 사주를 공부하게 되었는가? 이 이유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일 유학시간들은 처음엔 너무도 힘들고 외롭고 나와의 싸움으로 견디기 힘들었는데 기독교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경험을 겪으면서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믿음과 기도로 이겨내었다.

나의 유학시간은 기독교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으며 다행히 신앙의 힘으로 매우 공부도 열심히 했고 잘했으며 시간도 엄청 빨리 단축해서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나의 독일 유학시간들을 길게 서술하자면 훨씬 긴 얘기들이 많지만 이만 줄이고, 유학을 다녀와서 한국에서 겪은 경험들과 어려움은 또 다른 레벨의 힘듬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결혼을 하였으며 결혼하자마자 독일로 돌아와 학위를 마쳤다.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생활을 하고 한국의 설계사무소에 취직을 했다. 한국에 연고가 없어서 어느 사무실에 가서 취직을 해야 하는지도 몰라서 물어 물어 소개로 광장건축사사무소라고 그 당시 유명하셨던 김원선생님이 계셨던 사무실이다. 처음으로 건축으로 설계라는 걸 사무실에서 실무로 하게 되었는데 유학을 8년 하고 독일사고방식으로 적응되어 있던 나는 적응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힘들게 적응하면서 다니다가 아이를 갖게 되어 출산휴가를 얻어 잠시 쉬고 복직하려고 했더니 IMF가 터져서 내 자리는 없었다.

열심히 독일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는데 갑자기 출산하고 사회상황 때문에 실직자가 되어 쉬게 된 나는 곰곰이 고민해 보니 열심히 공부해서 학위까지 취득했으니 강의를 해서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강의를 하고 싶어서 신문에 교수채용공고를 찾아보았다. 그 당시에 교수가 되려면 석사학위뿐만 아니라 박사학위가 있어야 한다는 문구를 보게 되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취득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가족들이 동의해 주어서 첫째 아이 출산하고 둘째 아이까지 낳고 바로 홍익대학교에 박사학위를 위해 박사과정으로 입학하였다.

짧게 나의 살아왔던 모습들을 써내려 가지만 매우 치열했고 많은 고민들과 어려움들이 당연히 있었다. 독일에서의 어려웠던 유학시간들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면서 겪었던 많은 어려움, 문제들.. 그리고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바로 전에 국민대학교에 전임으로 취임을 하고 교수가 되었었지만 3년 만에 교수를 그만두게 된 사연들… 너무도 괴롭고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지만 생략하겠다.

박사학위뿐만 아니라 나는 그 사이 독일 건축사, 대한민국 건축사도 취득했다.

남들이 하기 어렵다는 학위, 유학, 전문직을 위한 자격증을 나는 30대 중반에 다 이루었다.

이렇게만 들으면 참으로 성공한 삶 같고 누구보다 행복해야 하지만 그 시기에 난 자살을 하고 싶었고 저녁에 잠이 들기 전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싫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지내던 시기였다.

왜 그랬을까?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열심히 살았고 누구보다 노력했으며 신앙생활도 독실히 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의 마음속은 지옥이었고 왜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어느 종교도 학문도 답도 주지 못했다.

내가 믿던 하나님도 내게 답을 주지 못하셨고 내 맘이 너무 괴로워서 불교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도 열심히 들으면서 이해하려고 애썼으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첫 번째, 나는 왜 사는가

두 번째,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세 번째, 삶은 왜 열심히 사는 사람인데도 외면하는가

네 번째,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다소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이 생긴 이유는 내가 삶에서의 이해 안 되는 상황들로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되면서였다.


실내공간 디자이너

이해가 안 됐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하였다. 목표였던 교수가 돼 보았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고 목표가 사라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였고 찾아보았는데 그 당시 실내건축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고 나는 건축설계가 전공이지만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면서 현재는 건축설계뿐만 아니라 실내건축, 즉 인테리어까지 가능한 전문가가 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게 ‘동네프로젝트’였다. 여러 디자이너들이 협업하여 소상공인들에게 좋은 디자인으로 설계를 해주면 좋겠다는 게 취지였다. 연희동에서 셰어 오피스를 여러 디자이너들과 같이 하게 되면서 프로젝트를 같이 진행해 보았다. 뜻은 너무 좋았다. 소상공인들이 적은 자본으로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데 그 돈으로는 좋은 디자인의 공간을 실현할 수 없으니 그래픽디자이너, 웹디자이너, 건축디자이너 등이 같이 한 프로젝트를 협업하여 진행하면 소상공인에게도 좋고 일 수주가 어려운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다행히 기회가 찾아왔고 연남동에 여성복 샵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였다. 이름은 ‘앨리스’, 가게 상호와 그래픽 모든 디자인을 해주는 프로젝트로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금 봐도 그 당시의 디자인은 참 훌륭했다. 그런 프로젝트가 계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면 참으로 잘 되었을 텐데 수주할 능력이 적었고 혼자만의 의지로는 끌고 가기가 참으로 버거웠다.

셰어오피스(share office)라는 개념도 지금은 익숙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없었던 개념이고 디자이너의 협업, 적은 자본으로 다양한 분야의 디자인으로 인테리어까지 완성해 준다는 아이디어는 참으로 획기적이었다.


카페주인, 일상공간

그러다 더 생각을 확장해서 설계사무실을 1층에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카페를 같이 하면 가능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고 연남동에 공원이 생길 무렵에 일층에 카페와 설계사무소를 오픈하였다.

이게 참 힘든 게 설계사무소라면 대게 건물에 임대를 할 때 임대료가 1층이 비싸니 2층 이상으로 임대를 할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다. 프로젝트를 의뢰하러 쉽게 문턱이 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럼 카페랑 같이 하면 가능하겠다고 생각해서 일상공간이라는 카페를 설계사무실과 같이 오픈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디어도 많았고 하고 싶은 거도 많았다. 그런데 역시 또 운영이 어려워 겨우겨우 하다가 3년 만에 정리하고 지금은 건축사사무소랑 인테리어 설계 사무소를 운영한다.

일상공간을 운영할 때 나의 근본적인 질문은 계속적으로 나를 괴롭혔고 이 질문에 답을 얻고 싶었다.

그 당시 지금 같이 일하는 소장님이 철학관에 예약을 둘이 했는데 한 명이 펑크 냈다, 너 혹시 같이 가 볼래?라고 하여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인이라면 사주를 본다는 걸 금기 시 하는데 호기심이 발동해서 한번 가보고 싶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했고 예약 시간이 돼서 생전 처음으로 나의 사주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주가 뭔지도 몰랐으며 그 철학관의 상담해 주시는 분이 얘기해 주시는 게 무슨 말인지도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그냥 듣고 나왔다.

그 사람의 나에 대한 첫마디가 가장 아닌 가장, 독신 아닌 독신이라며 남자 복이 없고 어쩌고 저쩌고,,, 나는 너무 사실 놀랬고, 내용을 이해하고 싶었다. 대체 왜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는 걸까?


명리학이 뭘까

그러다 우연히 신문에서 강 헌 선생의 ‘명리’라는 책이 출간된다는 기사를 읽었고 당장 그 책을 구입해서 하루, 이틀 만에 읽어 내려갔다. 그제야 그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단어는 이해가 같으며 이 명리학이란 게 뭔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말았다.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었고 다행히 그 당시 강 헌 선생이 너무도 일반 사람들도 읽기 쉽게 풀어서 ‘명리’라는 책을 출간하여 명리학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책을 읽고 앱을 다운로드하여 나의 사주가 뭔지를 만세력으로 알게 되고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는 있는데 혼자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나의 명식이 뭔지 알게 되었고 책을 뒤져가면서 그 철학관에서 한 얘기가 무슨 얘기인지 찾아보았으나 책만으로 알기에는 무리가 있어서 명리학이 뭔지 만 알고 그냥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나의 지적 호기심은 계속 명리학을 알고 싶게 하여 유튜브를 보다 여러 명리학에 대해 강의하는 사람들의 내용들을 듣게 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이 사람 저 사람 뒤져보면서 알고 싶어 했다.

책을 사고 유튜브로 독학을 3년 정도 했다. 아시다시피 유튜브로 공부한다는데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 아실 거다. 정말 또 파고, 파도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에 여러 선생님들 강의들을 듣다가 지금 배우고 있는 정동찬 선생님의 강의를 보게 되었고 너무도 탁월한 해석과 이해가 쏙쏙 되게 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선생님의 유튜브 공개 강의는 거의 다 찾아보면서 좀 더 명리학이 뭔지를 알게 되어갔다.

그러다 정동찬 선생님의 선생님이 화풍정 선생님이란 걸 알게 되고 그분의 강의가 내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는 공지를 보고 코로나가 좀 풀릴 때 화풍정 선생님의 제자인 석정선생님이 명리기초반을 개설한다고 해서 문의를 하여 지금은 석정선생님과 정동찬 선생님에게 명리학을 배우고 있다.

나는 아직 명리학에 대해서는 더 공부를 해야 하고 너무도 먼 길이라 하나하나 차분히 배울 예정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의 전공인 공간과 명리학을 접목하여 글을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명리학을 배우고 나서야 나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답을 찾았다.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알게 되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하면 좋은지,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게 좋은지를 명리학에서는 가르쳐 준다. 명리학이라는 게 단순히 점을 쳐서 앞을 내다보는 그런 게 아니라 인생의 지침이 되고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공간디자이너로써 명리학적 해석

나의 전공인 공간디자인을 건축가로서 명리학적 해석을 해서 알려주면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서는 우선 가장 기본적인 명리에 대한 기본이론을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하고 명리학적 해석을 공간사례를 통해 볼 것이며 이 한 권으로 다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렵게 길게 쓰지 말고 쉽고 짧게 쓰기 위해서 시리즈로 구성해 볼까 한다. 우선 가장 가까운 주거의 공간을 주된 사례로 설명해 볼 것이다. 그리고 상 공간, 전시공간 순으로 하나하나 쉽게 풀어서 보다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을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유리하게 좋은 환경으로 살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풍수를 좀 더 가깝게, 쉽게 명리학으로 이해하면서 해석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나는 풍수를 배운 적은 없으나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어떤 방법으로 풍수를 보고 정했는지는 알 것 같다. 짧은 지식으로 풍수까지는 논하지 못하고 내 일상의 공간, 생활공간을 명리를 통해 읽고 적용해 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건축가가 읽어주는 명리, 지금부터 한번 하나하나 쉽게 풀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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