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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May 23. 2024

질보다 양

광고 아이디어가 선택되는 길

광고대행사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무얼까?

당연히 아이디어 회의다.


펜타클에 합류한 초기에 가장 큰 목마름은 큰 브랜드의 경쟁 비딩에서 승리하는 일이었다.

경쟁 비딩이 시작되면 이런저런 회의를 합쳐 대부분 10번 이상의 회의를 진행했다.

아이디어를 발표하는 회의는 거의 매일 진행되었다.

마른 수건에 물 짜듯 매일매일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동료들은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

동료들은 물론 매일 2~3시간씩 피드백을 줘야 하는 나 역시 힘들었다.

지금은 덜 하지만 몇 년 전까지 기획과 크리 구분 없이 아이디어를 갖고 와야 했다.


비딩에 참여하는 펜타클 동료들의 대부분은 경험이 많지 않은 저연차였다.

나를 포함해 우리 중 누구도 광고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화려한 경력이나 경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유명하고 큰 대행사들과의 싸움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얻어내기 시작했다.


최근 5년간 진행한 PT를 분석해 승리와 실패의 원인을 파악해 본 적이 있다.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했지만 10번 이상의 아이디어 회의를 거친 PT는 75%의 승률을 나타냈다.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엄청난 양의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던 그 당시의 방식이 경쟁 PT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아이디어가 좋다는 전제를 두고 발표한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 교수 딘 사이먼턴은 천재들조차 자신의 아이디어가 좋은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서툴다는 것을 발견했다.

베토벤이 쓴 편지들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베토벤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다고 한 곡들 중 후대에 걸작으로 평가된 경우가 여덟 곡 이상이었다. 우디앨런은 자신이 만든 영화 [맨해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배급사에 영화 개봉 중지를 요청했지만 개봉하자마자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피카소 역시 자신의 대표작 게르니카의 스케치가 마음에 들지 않아 79장이나 그렸지만 대표작이 된 것은 초반에 그린 것들이었다.

딘 사이먼턴 교수가 궁극적으로 밝혀낸 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의 양과 작품의 우수성 사이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작품을 많이 발표한 예술가들에게는 걸작도 많았다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20년 동안 37편의 희곡을, 베토벤은 600개가 넘는 작곡을, 밥 딜런은 500곡이 넘는 노래, 피카소는 1만 2000점의 드로잉을 발표했다. 우리가 아는 걸작은 그중 겨우 몇 편에 불과하다.


천재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 중 어떤 것이 걸작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움에도 결과적으로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많은 작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애덤그랜트의 오리지널스 참고)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의사 결정자의 선택을 받고 광고주의 선택을 받아내기 위함이다.

나의 주관적 생각이 객관적 선택을 받을 때 광고 아이디어는 빛을 보게 된다.

객관적 선택을 받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회의실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들고 가는 것이다.

초기의 광고 기획 단계에서는 더 그렇다.

정말 좋다고 생각한 하나의 아이디어에 시간을 쏟기보다, 가능한 다양한 접근, 다양한 방향에서 아이디어의 단초들을 많이 만들고 회의 시간에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보는 게 현명하다. 이 아이디어가 좋은가 나쁜가를 스스로 평가해 죽이고 살릴 필요는 없다.


베토벤은 가장 훌륭한 곡들이라 평가받은 다수의 곡을 스스로 형편없다고 생각했고 우디앨러도 걸작이라 평가받은 영화를 개봉하면 망신당할 거라 여겼다. 훌륭한 예술가들은 그런 걱정이 있었지만 일단 세상에 작품을 내놓았다. 앞에서 천재들 마저 했던 실수를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른오징어에 물을 짜듯 아이디어를 요구한다'

몇 년 전 한 후배 동료가 나에 대해 한 이야기다. 당연히 동료들에게 늘 미안하다.

아이디어를 내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걸작은 다작에 기인한다는 이야기를 통해 동료들에게 더 많은 아이디어의 요구를 정당화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의 일이 그렇다. 남들이 물건을 팔 때 우리는 오롯이 머릿속의 생각을 팔고 그 생각을 광고로 만든다.

나의 생각을 선택받게 하는 일이 우리 일이 중요한 일 중 하나다.

그 일을 조금이나마 쉽게 만들 수 있는 일이 바로 질보다 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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