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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핀드로 Aug 04. 2022

왜 자기주도학습이 필요한가?

정보와 유전

정보와 유전

어느 날 아이들이 내 학창 시절 성적표를 장롱속에서 찾아냈다. 누리끼리해진 성적표에는 요즘과 달리 전교 석차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잘 봐라, 아빠 성적. 너희도 아빠의 유전자를 갖고 있으니 공부 잘할 거야”

“와, 신난다. 아빠가 공부 많이 해 놨으니 공부 안 해도 되겠네?”

“안타깝지만 아빠가 공부한 건 유전이 안돼. 너희들이 새로 공부해야 해”

“에이, 아빠한테는 공부 빼고 물려받고 싶은 게 없는데…”


***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조금이라도 더 생존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고민 끝에 선택한 행동이라 해도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다만 과거의 경험으로 확률적으로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변기 레버를 내리면 물이 빠지면서 그것도 사라질 것이다, 와이프에게 돈을 송금하면 집안이 평온해질 것이다, 진통제를 먹으면 두통이 사라질 것이다, 큰아들한테 공부하라고 말하면 짜증을 낼 것이다, 막내딸에게 대화하자고 하면 방문을 잠가버릴 것이다… 모두 과거의 경험을 근거로 확률적으로 미래를 예측할 뿐이다.  


우리는 미래의 일을 예측하기 위해 기억 즉, 과거의 정보를 이용한다. 자기 자신, 자신의 조상,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 우린 알고 있다. 이 정보를 이용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대충은 예측할 수 있다. 


다행히도 유전 정보는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고 태어난다. 이 정보는 주로 호흡, 소화, 맥박, 배변, 감각, 감정과 같이 아주 기본적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이다. 사람마다 유전 정보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외계인이 본다면 그 차이가 거의 없다고 여길만큼 비슷비슷하다. (우리가 대장균 각각의 지능과 성격을 구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상들은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추려 유전자에 넣어 전해줬다. 숨쉬고, 소화하고, 배변하고, 감각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 외에도 살다가 급박한 위기 상황이 닥치는 경우에도 우리는 우선 이 정보에 기대어 행동한다. 


뭔가 날아오는 것이 느껴지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손으로 막는다. 큰 소리가 나면 움츠리고, 추우면 손을 비빈다. 대부분 이 정보를 믿고 따르면 위기 탈출이 가능하다. 우리가 위급할 때 조상님을 찾고 명절때마다 큰절하고 감사하는 이유다.


이 정보는 사람마다 별 차이가 없다. 최초의 인류 루시 Lucy로부터 나에게 이어지는 조상들의 역사나, 다른 사람에게 이어지는 조상들의 역사나 그게 그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근거에는 사람마다 갖고 있는 유전 정보가 거기서 거기라는 점도 포함된다. 


이렇게 조상이 물려준 정보를 믿고 따르는 것을 흔히 본능이라고 한다. 하지만 매우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본능에도 약점이 있다. 현재의 환경에 맞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화가 나면 다른 사람을 때리고, 배고프면 다른 사람의 음식을 뺏어 먹으라는 본능은 수백만 년 전에나 통하던 것이었다. 지금 그 본능을 따랐다가는 오히려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환경에 맞는 추가 정보 습득이 필요하다. 그중 가장 신뢰성 높은 정보는 아마 자신의 감각 기관이 습득한 정보일 것이다. 감각 정보는 신속하고 신뢰할 만하니 가중치를 줄 만하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다.) 다만 감각 정보는 시공간적 제약이 크고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자신의 감각 정보만으로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정보, 심지어 수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 갖고 있던 정보도 학습을 통해 습득한다. 언어, 역사, 수학, 과학, 예술, 기술 등 여러 종류의 학문을 습득하고, 때로는 본능과 감각 정보를 무시하기도 해야 한다.


다른 생물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바로 뛰고, 날고, 먹잇감을 구분할 수 있다. 인간처럼 교육을 받지 않는 생물들도 유전 정보를 따라 그럭저럭 잘 살아간다. 그들이 보기에는 태어날 때 한참 부족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들이 오히려 미개한 생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왜 어떤 정보는 유전으로 물려받고, 어떤 정보는 출생 후에 배우는 것일까? 애초에 부모가 가진 정보를 통째로 다 물려받으면 태어나자 바로 한 사람 몫의 생산을 할 수 있으니 더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인간이 지금과 같은 유전과 학습 체계를 갖게 된 것은 먼저 뇌의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가 욕심을 부려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자녀에게 물려주면 자녀는 스스로 학습한 정보를 저장할 공간이 부족해진다. 그러면 부모가 물려준 정보만 껴안고 살아야 한다. 만약 인간의 뇌 용량이 두배가 된다면 해결 가능하겠지만, 이미 인간의 두뇌는 몸에 비해 너무 크고 무겁다. 


게다가 유전되는 정보의 양에 비례하여 아기의 머리도 커져야 하는데, 그러면 출산 시 엄마에게 신체적 무리가 가해진다. (큰아들 녀석의 머리가 커서 와이프가 엄청 고생했다.) 또 부모가 많은 정보를 물려주려면 자궁 속에 머무는 시간도 지금의 10개월보다 더 길어져야 한다. 그럼 그 기간동안 엄마의 생존 자원 취득에 제약이 커진다. (출산 휴가는 아직 3개월에 불과하다.) 10개월이라는 임신 기간은 이것저것 다 따져 절충된 결과다. 


그래서 우리의 조상들은 필수 정보만 후손에게 물려준다. 그 외 생존에 필요한 정보는 출생 후 감각 기관과 학습을 통해 얻도록 했다. 실제로 인간의 두뇌는 25%만 성장한 채 태어난다. 나머지 75%는 커가면서 마저 완성된다. 이게 여러모로 훨씬 더 효율적인 방법인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이 있다. 주변 환경에 대한 정보는 그때 그때 달라진다. 부모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보를 건네주어도 환경이 변해서 막상 자녀에게는 쓸모없고 오히려 생존 리스크만 커지게 하는 정보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유효 기간이 아주 긴 정보만 유전으로 물려준다. 변동 가능성이 큰 정보는 태어나서 습득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쯤에서 진화를 멈추었을 것이다.


새 스마트폰에는 운영 체계, 인터넷 브라우저, 알람, 전자 계산기, 녹음기, 사진기 같이 필수적인 앱들은 이미 설치되어 있다. 누구나 자주 쓰는 앱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필수 앱들이 안 깔려 있으면 남들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편집까지 끝냈을 때, 카메라 앱 설치를 해야 한다. 한마디로 생존 경쟁에서 뒤쳐진다. 하지만 필수 앱이 아니라면 사용자가 그때그때 설치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스마트폰 제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앱들로 스마트폰 메모리를 꽉 채워 판매한다면, 사용자는 새로 나온 앱을 설치할 메모리 공간이 부족하게 된다. 기존의 앱을 삭제하면 된다지만, 지우는 것 또한 운영체계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 성능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정보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의 두뇌 속 기억 공간에 무엇을 채울지는 아이들 스스로 결정한다. 아이들도 주변을 둘러보고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판단할 능력쯤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부모가 특정한 정보의 습득을 강요하는 것은 애초 인간이 진화한 방식과 맞지 않는다. 부모의 판단이 항상 옳았다면 임신 기간이 10개월이 아니라, 코끼리처럼 22개월쯤으로 늘어났어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큰 머리로 태어났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 아이들에게 ‘자기 주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인간은 현재도 환경에 맞춰 진화 중이다. 장기간 환경에 변화가 없어 자녀에게 물려줄 만한 정보가 많아졌다고 판단되면 임신 기간은 점점 길어질 것이다. 반대로 환경의 변화가 빨라 몇일 전의 정보도 의미 없다고 판단되면 임신 기간은 줄어들 것이다. (물론 수백만 년 걸리기에 우리는 인식하지 못한다.) 


***


큰아들 녀석은 한자를 잘 몰라서인지 역사 과목을 무척이나 어려워한다. 이 녀석이 역사 시험을 앞두고는 조선 전기의 왕자의 난, 사화, 붕당 정치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고 한다. 내가 중학생 때 달달 외웠던 것인 데도 이 녀석에게 유전되지 않은 이유를 알았다. 그때 생존이 아니라 단순히 시험을 보려고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입시만 목표로 하는 암기 위주 주입식 교육의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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