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가속도에만 민감할까?
"어, 머리 염색했네. 언제 했어?"
"며칠 전에 한 건데 이제서야 눈에 들어오냐? 넌 그게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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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미국의 특허청장 찰스 듀얼 Charles H.Duell은 말했다. “Everything that can be invented has been invented.” 발명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발명되었기에 앞으로 더 이상 발명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아마 19세기말을 살던 사람들은 그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고 느꼈나 보다.
그런데 현재 우리 생활에 큰 변화를 일으킨 과학 기술의 혁신과 발명은 정작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이루어진 것들이 훨씬 많다. 물론 21세기에 들어서도 변화의 속도는 멈추지 않고 더 빨라지고 있다. 2022년,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과 신제품이 등장하고 있으며, 그전에는 몰랐던 우주와 자연의 비밀 또한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이렇듯 20세기 이후의 변화 속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훨씬 빠르고, 그것을 우리가 몸소 체감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같은 하이테크 제품에 제때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과거 고려 시대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을 건너뛰어 조선 시대에 오면 적응하는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한다. 반면 100년 전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오면 겨우 100년 차이지만 너무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물론 ‘단위 시간 당 변화의 양’은 과거보다 현재가 훨씬 크다. 일단 인구가 훨씬 늘어서 기술자, 과학자, 예술가 등이 그만큼 더 많다. 그러니 신기술은 더 많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유통되는 정보의 양이 늘어서 다방면에 더 많은 변화를 촉진시킨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말하는 ‘변화의 속도’는 옛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별 차이가 없다. 즉, 어느 시대 사람이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이는 한 칸의 높이가 동일한 계단이지만. 원근감에 의해 가까이에 있는 계단은 높아 보이고 멀리 있는 계단은 낮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착시 현상이다.
비단은 언제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대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중국의 비단은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과 유럽으로 흘러 들어갔다. 당시 유럽 사람들의 눈에 비단의 등장은 지금으로 치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등장보다도 엄청난 혁신이었다. 비단이 있기 전에는 가죽, 모시, 목화 등으로 만든 두텁고 투박한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런데 속이 비칠 듯이 얇고 윤이 나는 비단은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강렬한 시각적, 촉각적 충격이었다.
비단이 얼마나 큰 놀라움을 주었던지, 전쟁터에서 비단으로 깃발을 만들어 흔들어 댔더니 적들이 처음 보는 형체에 깜짝 놀라 뿔뿔이 도망쳤다고 한다. 요새 사람이 타임머신 타고 그 전쟁터에 가 있었다면 멍하니 그대로 서 있다가 죽었을 것이다.
비단과 같은 새로운 소재뿐 아니라 옷의 색상조차도 옛날 사람들에게는 큰 혁신으로 다가왔다. 고대 로마에서는 황제의 옷만 자주색으로 염색을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 자주색 염료 1g을 얻기 위해서는 소라고동 무려 1만 마리를 잡아야 했다고. 그러니 로마 사람들이 길을 걷다가 자주색 옷을 보게 되면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동네 사람들에게 자주색 옷을 봤노라 떠벌리고 그날 밤 일기장에도 적어 놨을 것이다. 요새 아이들은 어렸을 때 48색 색연필을 접하다 보니 색상 때문에 놀랄 일 없이 산다.
지금으로부터 4,000년 전, 바빌로니아에서 만든 점토판의 글씨를 해독했더니 ‘요즘 젊은이들 버릇없다’고 쓰여 있었다. 2,500년 전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도 ‘요즘 젊은이들 버릇없다’고 한탄했다. 즉, 인간이 체감하는 변화의 속도는 시대와 상관없이 언제나 크고 빨랐다.
왜 변화의 양과 속도가 20세기에 비하면 훨씬 적고 느렸던 과거에도 사람들은 변화가 빠르다고 느꼈을까? 그것은 인간이 주로 체감하는 변화는 ‘변화의 양’이나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변화의 가속도’이기 때문이다.
F=m x a
이 식은 뉴턴의 ‘제2의 운동 법칙’을 나타내는 공식이다. 일명 가속도의 법칙이라고 한다. 여기서 F는 힘, m은 질량, a는 가속도다. 이 식은 힘이 ‘속도’가 아닌 ‘가속도’와 비례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걸 사람의 감각에 적용한다. 어차피 인간도 물리 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의 감각도 결국 물리 법칙에 영향받는 신경 세포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감각에 무언가 변화를 일으키려면 힘 F가 필요하다. 감각을 변화시키는 힘 F는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가속도’와 비례한다.
현재는 과거보다 ‘변화의 양’은 크게 증가했다. 그리고 ‘변화의 속도’도 더 빠르다. 이를 좌표 평면위에 그래프로 표현해 본다. ‘시간’을 x축에, ‘변화량’을 y축에 놓고 그래프를 그린다. 그럼 기하 급수적으로 우상향하는 그래프다. 이번에는 ‘시간’을 x축에, ‘변화의 속도’를 y축에 놓고 그래프를 그린다. 산술급수적으로 우상향하는 그래프다. 마지막으로 ‘시간’을 x축에, ‘변화의 가속도’를 y축에 놓고 그래프를 그린다. 우상향이 아니라 그냥 수평선이 된다. 즉 기하 급수적으로 변화가 발생해도 감각이 느끼는 힘 F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회의 규모는 커지고 정보는 훨씬 많아졌다. 하지만 인간이 감각하는 변화의 가속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큰 차이가 없다. 단 그 변화를 설명할 때 원근감에 의한 착시 효과로 인해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너무 빠르다’ 라고 말한다.
차를 타고 갈 때 가까운 곳을 보면 풍경이 빨리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먼 곳을 보면 천천히 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어디를 보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속도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가까이만 주시한다. 저 멀리의 환경보다 자신 주변의 환경 변화가 생존에 더욱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항상 빠르게 변한다고 느낀다.
왜 사람들은 ‘변화의 양’이나 ‘변화의 속도’가 아니라 하필 ‘변화의 가속도’에 민감할까? 가속도에 민감한 가장 큰 이유는 주변 환경의 예측 가능성과 관련있다. 가속도가 ‘0’이라 등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는 미래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즉, 이런 움직임은 우리의 생존에 리스크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속도가 변하는 물체는 위치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속도를 알아야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환경들, 사람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가속도 운동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각을 통해 가속도를 알아내서 미래를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예측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야 생존이 가능한 ‘위험한 우주’이기 때문이다.
또, 내적으로는 우리 신체의 구조가 변화의 가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는 것도 관계있다. 혈액을 통해 단위 시간당 적정한 양의 산소와 에너지가 세포에 공급되면 우리의 세포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산소와 에너지 공급량의 가속도가 ‘0’이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무언가 변화가 가해지면 세포로의 산소와 에너지 공급 속도가 감소되거나 증가하게 된다. 이때 속도의 변화, 즉 ‘가속도’가 생긴다.
우리의 세포는 일정한 속도로 에너지가 꾸준히 공급될 때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런데 에너지 공급 속도에 변화가 생겼을 때는 그 가속도를 인식하고 에너지를 더 달라고 하거나, 그만 보내라는 신호를 신경계에 전달한다. 즉, 단위 시간당 공급되는 에너지가 감소하면 신경계가 배고픔을 느끼게 하여 신체가 음식을 찾아 나서게 한다. 반대로 단위 시간당 공급되는 에너지가 증가하면 포만감을 느끼게 하여 음식 섭취를 멈추고 대신 다른 생존 활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에너지 공급의 부족은 심각한 비상 사태다. 잠깐은 상관없지만 장시간 공급 부족이 지속되면 세포와 신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에너지 공급 속도의 감소가 감지되면 우리의 신경계와 신체는 부족을 해결하고, 미래에 두 번 다시 부족한 상태에 이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기억, 의식, 감정 등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의 가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동화된 화학 공장은 규모에 비해 직원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화학 공장내부에는 파이프 라인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정작 직원들은 깨끗한 사무실 안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직원들은 제품이 생산되는 모습을 일일이 들여다보지 않는다. 대신 단위 시간당 얼마의 유체가 흘러가는지 체크하는 센서를 파이프 라인 곳곳에 심어 놓았다.
공장은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직원 한 명이 동시에 여러 생산 라인을 관리하도록 한다. 그래서 직원들은 모든 파이프 라인 속의 유속을 일일이 확인할 틈이 없다. 대신 유속의 변화가 생겼을 때 알람이 울리도록 설정해 놓고 다른 일을 하거나 틈틈이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다 알람이 울리면 여러 직원들이 집중적으로 투입되어 그 공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고 대처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신체는 일종의 화학 공장이다. 그래서 화학 공장과 마찬가지로 속도의 변화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주변 상황을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등속도로 움직여 가속도가 ‘0’인 것은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차를 몰고 고속 도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다 보면 심심해지고 졸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급가속과 급정거를 하거나 노면이 거칠어 차가 덜컹거리면 운전에 주의를 기울인다. 한방향으로 똑같은 속도로 날아가는 새는 잠깐 눈에 들어올 뿐이다. 하지만 급강하를 하거나 방향 전환을 하는 새에는 계속 눈길이 가게 마련이다. 이런 움직임은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변화의 양’뿐 아니라 ‘변화의 속도’도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제대로 감각하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을 하려 한다면,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두뇌 용량이 다 차버리고 우리는 두통에 시달릴 것이다(이것이 카메라, 녹음기, 인터넷 등이 필수품이 된 이유다), 그리고 정작 꼭 필요한 생존 활동을 못하고 계산만 실컷 하다가 제자리에서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용량이 제한된 우리 두뇌는 가속도만 인식하고, 가속도만 정보로 보유한다. 가속도만 알고 있으면 적분을 통해 미래에 발생할 ‘양’과 ‘속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발명품과 신기술이 등장하고, 갑자기 전쟁이 발발하고, 예기치 않은 경제 위기가 터진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아무리 많은 변화가 생기더라도 우리가 체감하는 변화는 옛날 사람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결국 동서고금의 모두가 격변의 시대를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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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대로 넘어온 조선 시대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처럼 와이프가 헤어 스타일 바꾼 것을 알아채지 못해 구박받을 일은 없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