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핀드로 Aug 04. 2022

인공지능 vs 인간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나은 점은 무엇일까...

*이 글은 2020년 말에 작성한 글입니다.


 인공지능이 고도화되면서 인공지능이 과연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지, 인간처럼 감정과 창의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또 SF 영화처럼 미래에 인공지능이 인간을 공격하거나, 지배하지는 않을는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많아지고 있다. 반면 인공지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에 절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자신들이 편하겠다고 인공지능을 만들어 사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이 자신을 죽일까 봐 걱정하는 인간들의 이중성,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바로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협업의 효과는 누리되 경쟁에서 손해보지는 않겠다는 본성이다. (내가 와이프 눈치를 보는 이유와 동일하다.)


***


먼 미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인공지능, 뉴스에 자주 등장했던 인공지능 의사 '왓슨'이나 바둑 고수 '알파고'만 있는 게 아니다. 인공지능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인터넷 채팅 상담, 뉴스 기사 작성, 주식 정보 제공 등과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는 이미 모두가 체험하고 있다. 또 스마트폰마다 음성 인식과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 앱들도 이미 다 사용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외국어 번역 앱의 실력은 그 외국어를 몇 년 공부한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래서 이제 외국어 공부는 몇 글자만 외우면 끝이다. “Charge, please.”. “充電してください.”, “请帮我充电.”, “충전해주세요.” 방금 4개 국어를 마스터했다. 이렇게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인공지능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인공지능에게 인간과 같은 감정이나 의식은 없다고들 한다. 다만 미래에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을 어느 정도 흉내 내는 정도는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감정이나 의식이 정작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인공지능이 이를 모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건 정말 난센스다. 마치 와이프가 나에게 “내가 끓인 라면 맛있지? 넌 아무리 연구해도 이 맛 절대 못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인공지능에게는 창의성이 없는 것이 한계라고도 한다. 그런데 인간의 창의성 또한 어떻게 발현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최근의 인공지능 기술 GAN은 그림을 그리고, 소설도 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창의성이 있는 척하는 거라며 폄하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작품을 인간의 작품과 구별해내기란 정말 어렵다. 


엄밀히 따지면 인간의 창작이란 것도,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 정보의 조합이거나 무의식적 계산의 의식화에 불과할지 모른다. 혹은 무의식의 실수가 운 좋게 성공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자물쇠를 열기 위해 000부터 999까지 다 넣어보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제대로 얘기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 우월주의와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근본적인 차이는 사실 감정, 의식, 창작 등에 있지 않을 것이다. 감정, 의식, 창작도 결국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인 신경계에서 비롯된다. 원재료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생물과 인공지능의 차이점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생존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만약 인공지능에게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하는 욕구를 코딩으로 집어넣는다면, 인공지능은 생명을 갖게 된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인간을 공격하고 지배하려 할지 모른다. 


영화처럼 인류와 인공지능이 전쟁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초반에는 인류가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런데 인류가 전멸할 것 같지는 않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보면 알 수 있다. 초반 기세를 보면 5판의 대국 모두 이세돌이 크게 질 것 같았다. 하지만 4번째 대국은 이세돌의 78번째 수로 승리를 거두었다. 겨우 한판의 승리였지만 아무리 인공지능이 강해도 인류가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가능성은 인류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 인공지능은 엄청난 학습을 기반으로 그때그때 가장 승리 확률이 높은 수를 찾아 둔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가장 승리 확률이 높은 수뿐 아니라 때론 승리 확률이 거의 없는 악수를 두기도 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실수이든, 의도이든, 상상을 초월하는 선택을 하는 별 희한한 인간들이 다 있다. 어떤 인간은 최악의 수만 골라 두기도 하고, 어떤 인간은 눈 감고 두기도 하고, 어떤 인간은 중간에 바둑판을 뒤엎기도 한다. 인공지능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은 학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양성은 언제나 최고의 생존전략이다.


2021년, 코로나 바이러스와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이 아직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인간이 코로나 바이러스를 멸종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도 인간을 멸종시킬 수 없다. 그래서 언젠가 서로 공생하는 길을 찾게 된다. 대장 속에서 우리와 공생하고 있는 유산균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 생각에 동의할까?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걸쳐 있는 바이러스, 그 하나하나에는 지능이 없다. 그래서 바이러스의 움직임은 단순하고 예측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인간이 과학기술로 대응하면 성공적으로 물리칠 것이라 기대한다. 물론 바이러스 하나하나는 지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이러스 집단은 개체수가 거의 무한에 가깝다. 그래서 바이러스는 집단 지능이 있는 곤충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이미 인간의 군중 심리와 방역 체계를 꿰뚫었다. 이를 통해 때와 장소를 바꿔가며 변종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잠복기와 전파력에 변화를 준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자신의 존재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전략에는 인간이 아직 모르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의도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전파력과 치사율이 다른 바이러스보다 높다. 그렇다고 그것이 인간을 멸종시키겠다는 의도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에게 강력한 방역을 유도하여 자신의 라이벌, 즉 감기나 독감 바이러스를 멸종시키려는 의도는 아닐까? (치사하게 딱 자기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의 방역을 인간에게 원할 것이다.) 인간 사회에 유행하는 유일한 바이러스가 되겠다는 야망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날이 오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편하게 살겠다며 전파력과 치사율을 적당히 낮출 것이다. 그리고 뭔 일 있었냐는 듯한 순진한 표정으로 인간과 어깨동무를 할지 모른다. 영생불사를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하면서. 


현재 여러 제약 회사에서 코로나 백신을 개발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라 부작용이나 효과에 대한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못하고 일단 접종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한 회사의 백신이 아무리 안정적이고 효과가 좋아 보여도 국민들에게 한 종류의 백신만 접종하면 안 된다. 효과가 다소 떨어져 보여도 가급적 여러 종류의 백신을 섞어서 국민에게 접종해야 한다.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인공지능이라면 그 시점에서 최고의 효과와 안정성을 보이는 한 종류의 백신만 권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최악의 선택도 한다. 그게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열등해 보이면서도 결정적으로 우수한 이유다.


***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아직 많지만, 모든 심리 현상과 사회 현상도 결국 물리적 현상이다. 인공지능도 물리적 현상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도 물리적 현상이다. 물리적 현상은 시간이 많이 걸릴 뿐 언젠간 이해가 가능하다. 다만 그때까지 우리가 살아있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TV 드라마를 마지막 편까지 다 못 볼 것 같으면 우리는 그 드라마를 아예 안 본다.



작가의 이전글 제사와 종교의 기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