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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 Oct 24. 2023

흔적

10월 초 어느주말의 기록

그 이후로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매일 연락하던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가족들과의 연락도 간단하게만 했다. 어머니와의 소소하고 따뜻한 대화는 늘 나를 치유해주었는데, 그 마저도 힘에 겨워 조금 줄였다.  

그저, 혼자 가만히 있고만 싶었다.


지난 3년여 간의 시간 동안 그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수만큼 다양하고 강렬했던 목소리와 주장, 나를 둘러싼 요구와 의무 속을 매일 만나면서도 체감하지 못했던 깊은 피로가 뒤늦게 몰려온 기분이었다.


일을 열심히 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스스로 이런 내가 조금 낯설고 위태롭기도 했다. 자다가 속에 천불이 나서 벌떡 일어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것 같은 불면도 계속 되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에 앞 공터를 걷기도 했다. 그러다 잠시 울기도 했다.  일에 지속되는 집중도 현저히 떨어졌다.

그게 한달 넘게 계속되니 일이 아니라 삶에도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치유를 했다. 휴일 아침 일부러 일찍 일어나 조용한 까페에 가서 철학 서적을 탐독하거나, 근처 청주미술관에 가서 멍하니 앉아있거나, 좋아했던 영화를 다시보며 울거나 웃었다. 낮은 산이라도 올라갔다 내려왔다. 되도록 아무것도 떠올리지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


그러기를 한달여만에 글을 쓸 힘이 생겼다.


워라밸이라는 단어는 지난 3년간 내 일상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실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워라밸'은 내 주변의  타인걱정 또는 타이름의 방식으로 내게 전해졌다.

'너는 너무 일만 한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너는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걱정어린 시선과 말들이 달갑지않았다.

마냥 순하지않은 내 안에 못된 뿔이 드러난 것일수도 있다.   체력적으로 좀 힘들긴 했지만, 그때의 나에게 워라밸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반복된 걱정 속에 숨어있는 타인의 교묘한 심리를 인지하게 되면서, 그후론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 하곤 했다.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하고, 나는 그 일을 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기에 당신이 나를 볼때마다 말하는 것만큼 위태롭지 않으니 걱정 마시라.'라는 말은 하지않고, 숨기는  편이 정중했기에. 그들의 걱정이야 그들의 자유이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굳이 Work와 Life를 왜 구분해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걸까, 하는 반문이 마음속에 들만큼 몰입의 시간이었다.  

 

 2019년까지의 직장 생활과 가족, 연인, 친구와의 관계는 꽤 만족스러웠다. 그것을 뒤로하고 굳이 타지에 와서 낯설고 때로는 공격적인 상황과 마주했던 이유는 바보같지만 분명했다. 어머니가 늘 걱정하시던, 하나에 빠지면 끝까지 가보려고 하는 경주마같은 나의 심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교육과정이라는 관념적이기도 실재적이기도 한 대상에 대해, 내가 가 닿을 수 있다면 모든 층위의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무모하기도 했고, 실상은 다 몰랐으니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럴테지만..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겪은 온갖 일들이 주는 감정- 때로는 성취, 때로는 부끄러움, 때로는 답답함, 수시로 찾아오는 막막함- 을 버티게 해준 것도 그 바보같은 무모함이었다. 단순해서 버틸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바보같은 마음들은 알고보면 학문의 형태로 3년보다 더 이전...모두 합치면 어느덧 9년이라는 꽤 긴 시간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정이 무섭다. 무형의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은 일방통행의 짝사랑이라 더 그렇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워커홀릭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의 눈에 그리 보인다면 그리 불러도 이의는 없다. 사실 나는 그것이 꼭 '일' 이 아니라도 일상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늘 필요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상적이지 않는 관념들이나 공부, 생각할 거리-때로는 일, 운이좋으면 사람-에 시간을 보내면서 생기를 찾곤 한다.


내가 마주했던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던 지난 3년간의 그 '이벤트(event)' 속의 경험은 강렬했다.

코로나를 앓았던 사람들이 겪는다는 long-covid 후유증처럼  경험은 내 사고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어쨌든 나는 한 가운데의 현장(spot)에서 한 걸음 떨어져있다. 한 달이 지났고, 비로소 주말 오후 붐비지 않는 조용한 카페에 앉아 글을 쓸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생겨났다.

이제는 그 흔적들을 시간이 더 지나가기전에 기록으로 남겨볼 용기도 생겼다. 나라는 사람의 필터를 거치면서, 그 흔적이 생채기를 남기는 후유증이 아닌, 그럼에도 한걸음 내딛어볼만한 의미를 가진 시간이었다고 남기고 싶어졌다.

역시 짝사랑은 답도 없는 것이다.


혼자 있는 휴일 오전의 고요한 시간이 나에게 위안을 준다.

이 한옥 까페의 나무 냄새와 쾨쾨한 책 냄새가 안정을 준다.

조용히 내 안의 물결들을 들여다보는 시간 속으로 비로소 돌아온 느낌이다.

여전히 마음 한켠 남아있는 씁쓸함도, 억울함도, 서운함도 물결의 흐름실려 보내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의 얼굴도 양쪽 선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어떠한 잎도 양쪽이 완벽히 똑같지 않으며, 어떤 가지도 대칭 형태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불규칙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변화를 암시한다. 따라서 불완전함을 추방하는 것은 표현을 말살하고, 노력을 억제하며, 활력을 마비시키는 일이다. (존 러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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