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은 유난히도 더웠다. 어느 해부턴가 여름이 길어졌다. 여름과 겨울이 제 무게를 더해갈 즈음,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버린 봄가을이 제법 그립다. 때가 아닌데도 시작된 더위를 보아하니, 올여름도 꽤나 길 것만 같다.
부쩍 길어진 해 덕분에 이른 아침을 시작한다. 새벽부터 남편은 아침운동을 부지런히 나가고, 나는 아이들 등원 가방을 챙긴다. 긴 밤, 더위를 못 이긴 아이는 배를 훌쩍 까보이고는 선풍기 쪽에 바짝 몸을 대어 잠들어있다.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하며 아이 몸을 힘껏 일으켜보지만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억지로 들쳐 안아 거실 중앙 소파에 아이를 눕힌다. 한참을 소파에서 뒹굴대더니 기특하게도 짜증 한 번을 내지 않고 일어나 준다. 이것만으로도 큰 효도를 했다 싶은 순간이다.
분주했던 아침 등원이 끝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아직 무더위는 찾아오지 않았다지만, 장마철 습기로 끈끈해진 몸을 이끌고 왕복 한 시간에 달하는 등원 거리를 다녀오면 누구라도 금세 지쳐버릴게 분명했다. 그렇게 등원을 시키고 나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 절실해진다. 아침시간, 출근으로 북적이는 사람들 틈 속에서 헝클어진 머리와 대충 입은 츄리닝 바지가 부끄럽지 않을 곳은 딱 하나, 스타벅스다.
집 가는 길목에는 스타벅스가 자리하고 있다. 더위로 녹을 것만 같을 때 녹색 간판만 보아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느껴진다. 이곳에서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은 사막 위 오아시스가 틀림없다. 조금만 있어도 에어컨 추위로 얼어버릴 것만 같지만 집에서 에어컨 틀 전기료를 생각하면 떠날 수가 없다.
카페 안은 바쁘다. 생각보다 사람도 많고, 모여든 사람 또한 다양하다. 하지만 대다수는 나 같은 아줌마들이다. 어느새 이곳은 등교를 끝낸 엄마들에게는 가벼운 수다의 장소가,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기엄마들에게는 잠시나마 천국이 되어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각각 다른 주제를 다양한 화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간다. 가만히 앉아 사람들의 목소리에 둘러싸여본다. 아이들을 보내놓고 난 뒤의 집안 공기는 어쩐지 탁하고 무겁게만 느껴지곤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며, 혼자 시간을 지내본 지 오래여서 그런지 남겨진 그 시간이 이제는 어색하다. 어쩔 줄 모르는 그 순간, 어느덧 집이라는 공간은 무한대로 커져나가고 공허함 그 속에 놓여진 나는 철저히 이방인이 되어간다.
그러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울려 퍼지는 카페 안, 이곳에서의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나는 오늘도 스타벅스를 찾았고, 언제나 그렇듯 톨사이즈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이곳의 많은 것을 나는 사랑한다. 맛을 평가할 만큼 뛰어난 미식가가 아니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맛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들려오는 세련된 재즈음악이 기분을 새삼 북돋아준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육아에 지쳐 도태된 것만 같던 나 자신을 되찾은 느낌이 들곤 한다.
어느 날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김영하 작가의 말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호텔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서 모든 걱정을 잊고 편안한 감정을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 어쩌면 스타벅스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준 건 아닐까.
매일 스타벅스를 찾다 보니 나처럼 자주 찾는 이들이 눈에 띄곤 한다. 대부분 나처럼 등원을 시키고 온 듯 보였다. 대개 그녀들은 조용히 책을 읽거나,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떤다. 어떤 날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하기도, 좋아하는 미드를 보기도 한다. 하루 중 유일한 그녀들만의 자유시간인 셈이다.
그렇다고 스타벅스를 늘 혼자만 찾은 것은 또 아니었다. 가끔 독박 육아에 지치거든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는다. 커피와 함께 아이들 먹일 간식을 함께 주문한다. 운이 좋거든 마침 낮잠에 빠져든 둘째 아이 덕분에 첫째와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아이는 색칠공부에 삼매경이고, 나는 미처 못 다 읽은 카페글을 마저 읽는다. 특히나 남편이 늦는 날에는 육아가 더 힘들게 느껴지곤 한다. 그런 날 스타벅스는 우리에게 최고의 장소가 되어주곤 했다. 어느새 그곳은 나 혼자만의 장소가 아닌, 우리 아이들과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 되어 있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서둘러 카페를 떠나야 한다.
들어가는 길 저녁 장을 보고 아이들 간식 준비를 한다. 밀린 빨래를 돌리고 정신없이 청소기를 돌린다. 건조가 다 된 빨래는 개어 서랍장에 넣는다. 매일 하는데도 언제나 설거지거리는 한가득이다. 대충 한 끼를 해결해두고 나면 금세 아이들 하원시간이 다가온다. 그렇게 나는 무더위를 뚫고 아이들을 데리러 다녀온다.
언제나 같은 하루, 비슷한 한 주가 지겹게 느껴질 때 나는 오늘 중 스타벅스에서의 커피 한잔을 떠올린다.
하루 중 누리는 유일한 나만의 시간,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지친 일상으로부터 해방된다. 호텔이나 고급 휴양지에서 누리는 남다른 휴가는 아닐지라도, 내게는 지친 일상으로부터의 자유쯤으로 의미 부여해두고 싶다.
오늘을 이는 힘, 나는 그것을 스타벅스로부터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