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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온 돌보 Sep 26. 2023

잘 차린 한상

절기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처서가 지나고, 백로가 오자 이슬이 맺혔다. 부쩍 서늘해진 새벽녘, 잠결에 눈이 떠졌다. 떠오르는 해, 그 빛에 어스름 져가는 밤의 어둠이 스쳐 지나간다.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시간 참 빠르다. 하루는 과속하여 우리를 이끈다. 까마득히 멀 것만 같던 1년이 코앞으로, 그렇게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가을이 성큼 곁을내어주고, 농담 같던 세월 속에서 우리는 또 한 번의 눈밭을 기다린다.




추석은 딸과 며느리, 그리고 엄마. 세명의 내가 떨리고 설레는 날. 지난 1년으로부터 또다시 이렇게 세월이 흘렀다. 명절이라 해서 특별히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보고 싶었던 얼굴을 확인하고, 안부를 묻는 그런 뻔할, 그러나 그 자체가 특별할 날. 이번 명절에는 어떤 선물을 드릴까, 이 또한 내게 주어진 성스러운 미션이었다.


어느 날부터 명절은 내게 슬픔의 시간이었다. 어릴 때에는 시집살이로 고통받던 엄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시간이었고, 독립을 하고선 올해가 꼭 엄마와의 마지막 명절일 것 같은 생각에 목이 메어오곤 했다. 모든지 그녀가 원하는 쪽으로 해주고 싶었다. 뻔한 것은 어쩐지 싫었다. 특별했으면 좋겠다 싶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을 생일처럼,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도 푸짐한 한상을 준비해볼까 싶었다.


마트는 벌써부터 명절 준비로 분주했다. 곳곳에 쌓여있는 과일상자가 귀성길을 떠올렸다. 내게는 바삐 지낼 제사도 없고 명절 전 서둘러야 할 성묫길도 없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성가셨다. 이번 명절은 무얼 준비해서 먹을지,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지 제 나름대로의 준비시간을 가져야만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다가오는 명절에 바쁜 것은 마트뿐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제각각 준비한 명절행사들이 다가온 추석을 생생히 체감케 했다. 한복을 입혀 보내고, 고사리 손으로 빚은 송편을 미리 맛보며 아 이렇게 또 한 번의 추석을 맞이하는구나 예감하는 것이었다.


숨쉬기 어려울 만큼 잦은 기침으로 힘들어할 엄마를 위해 한상을 차리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을 것 같다. 명절 때마다 외로이 올려진 고기 한 접시에 하얀 쌀밥만큼 마음이 미어지는 것 또한 없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서 귀한 사위가 온다며 한상 푸짐히 차려내어 주던 엄마의 정성을 이제는 보지 못할 것만 같아 그때마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참아야 하는 것은 고문 아닌 고문은 아니었을까. 둥근달의 싸늘한 빛을 온몸으로 맞이하며 해묵은 기억 속 지난 명절의 어둠이 다시금 재연될까 벌써부터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다.


어쩌면, 이번이 그녀와의 마지막 명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늘 또한 지나친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이만큼 무성의하게 느껴지는 날이 또 있을까. 수많은 밤, 엄마를 그리며 잠든 순간들 속에서 아이들에게 치여, 생활에 치여 나도 미처 잊고 살아야만 했던 해도 너무한 날들. 나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엄마는 하지도 못할 살림에도 냄비를 하나씩 늘려가는 데에 열을 올렸다. 살면 얼마나 살겠냐며, 해 먹으면 또 얼마나 해 먹는다면서도 맞이한 그녀의 살림살이가 내심 못마땅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얼마간 그녀를 휩쓸어간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여전히 삶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다. 곧이어 마련한 작은 밥솥에 흰쌀밥을 해내며 너무 귀엽다며 아이처럼 맑아했다. 그 모습에 나마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런 엄마에게 한상을 푸짐하게 차려드리는 일은 생각보다 성가시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시부모님께는 몇 번이고 차려드린 한상을 엄마에게는 왜 해주지 못했는지 마음이 참 아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마음을 제대로 먹었다. 엄마에게 제대로 된 한상을 차려주자는 남다른 의지라고 해야될까.




명절. 누군가에게 기쁠 그러나 어쩌면 불편할 단어. 귀경길 숱하게 싸우던 엄마 아빠의 고성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내게는 늘 지옥 같던 순간들, 명절이 다가오거든 제발 이번만큼은 무사히 지나가자며 자동차 뒷자석에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르겠다. 내겐 늘 최악의 순간이었고, 그때마다 이번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열렬히 기도하던 어릿한 기억만이 내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나는 엄마가 되었다. 또 하나의 며느리가 되었고,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딸이었다. 명절은 내게 많은 의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수많은 의지를 남긴다. 남편과 싸우지 말기, 금세 지칠 교통체증에 짜증 내지 않기, 지나친 시부모님의 말씀에 서운해하지 않기, 그렇게 올 명절도 푸짐하게 보내기.


추석. 오늘 아이가 만들어온 송편을 먹으며 어쩐지 눈물이 났다. 유년시절, 함께 송편을 빚으며 화기애애할 명절의 기억은 전무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그런 순간을 안겨주고만 싶다.


이번 명절, 어머님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더불어 엄마에게는 잘 차린 한상을 내어드리려 한다. 보름달 아래, 한껏 선듯해진 가을의 온도 속에서 모두가 뿌듯한 명절이 될 수 있기를 나는 오늘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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