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쇼핑공간만? 공유오피스 등 다른 공간의 가능성

『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 스물 섯번째 글

by 멘토K


지하도상점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 전제에 갇혀 있었다.
“여기는 물건을 파는 곳이다.”


이 전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지하도상가의 미래는 늘 과거의 연장선에서만 맴돌 수밖에 없다.
나는 현장에서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말 이 공간은 쇼핑 말고는 다른 역할을 할 수 없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도시 환경과 일하는 방식,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고려하면 지하도상가야말로 쇼핑을 넘어선 기능 실험이 가능한 공간이다. 문제는 가능성이 아니라, 상상력과 용기의 부족이다.


지하도상가의 가장 큰 특징은 명확하다.
도심 한가운데에 있고, 교통 접근성이 뛰어나며, 기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조건은 단순 소매보다 오히려 업무·학습·협업·체류형 기능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옷 가게, 신발 가게, 잡화점”이라는 익숙한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첫째, 공유오피스는 지하도상가와 의외로 궁합이 좋다.
재택근무와 유연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사람들은 집도 회사도 아닌 제3의 업무 공간을 찾고 있다.
하지만 도심의 공유오피스는 임대료가 비싸고, 접근성도 제각각이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지하철과 바로 연결되어 있고, 출퇴근 동선 한가운데 있다.


실제로 일본 도쿄의 일부 지하상업시설에서는 소규모 ‘마이크로 오피스’를 실험적으로 도입했다.
1~2인용 업무 부스, 단기 이용 좌석, 회의용 소형룸을 결합한 형태였다.
이용자는 주로 프리랜서, 외근이 잦은 직장인, 자영업자였다.
쇼핑객을 끌어오지 않아도, 매일 반복적으로 찾는 고정 수요가 만들어졌다.
지하도상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반복 방문’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시사점은 분명하다.


둘째, 학습·스터디·교육 공간으로의 전환 가능성이다.
지하도상가는 소음 통제가 상대적으로 용이하고, 외부 자극이 적다.
이 특성은 집중이 필요한 학습 공간에 유리하다.
청소년 스터디룸, 성인 직무 교육, 온라인 강의 수강 공간, 자격증 준비반 등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서울의 한 지하도상가에서는 공실 점포를 활용해 청년 대상 코딩 스터디 공간을 시범 운영한 적이 있다.
대형 학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접근성과 비용 측면에서 호응이 컸다.
이 공간을 이용한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인근 카페형 매장과 식음 매장을 이용하면서 상권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가 생겼다.
쇼핑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을 붙잡는 기능이 상권을 살린 사례다.


셋째, 공공·행정·생활밀착 서비스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이다.
지하도상가는 본래 공공 인프라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다시 공공 기능을 끌어들이는 것도 충분히 합리적이다.
무인 민원 발급기, 생활 상담 창구, 지역 정보 데스크, 소규모 주민 라운지 등은
쇼핑 수요가 줄어든 지하도상가에 안정적인 유입 인구를 만들어준다.


부산의 한 지하상가는 구청과 협력해 ‘생활 행정 서비스 존’을 설치했다.
주민들은 민원 업무를 보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상가를 지나게 되었고,
상인들은 “물건을 사지 않아도 사람이 늘었다”는 변화를 체감했다.
지하도상가가 다시 ‘생활 동선’ 안으로 편입된 순간이었다.


넷째, 창작·콘텐츠·소규모 제작 공간이다.
요즘 세대는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생산자다.
유튜버, 크리에이터, 1인 브랜드 운영자, 수공예 작가 등은
큰 매장보다 작고 합리적인 작업 공간을 원한다.
지하도상가의 소형 점포는 이들에게 오히려 최적의 크기다.


조명과 방음만 보완하면 촬영 스튜디오, 팟캐스트 녹음실, 공방, 콘텐츠 제작실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이런 공간은 단순 임대 수익을 넘어, 지하도상가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여기는 무언가 만들어지는 곳”이라는 인식은 상권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다섯째, 중요한 것은 ‘혼합’이다.
지하도상가가 갑자기 전부 공유오피스나 교육 공간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심은 쇼핑 일변도의 구조에서 벗어나 기능을 섞는 것이다.
쇼핑, 업무, 학습, 휴식, 공공 서비스가 공존하는 구조.
이때 상권은 더 이상 특정 시간대에만 살아 있는 공간이 아니라, 하루 종일 숨 쉬는 공간이 된다.


나는 현장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지하도상가는 무엇을 파느냐보다, 어떤 시간을 제공하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물건은 온라인에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집중할 시간, 머물 공간, 연결될 장소는 여전히 오프라인의 몫이다.


지하도상가의 미래는 쇼핑을 버리는 데 있지 않다.
쇼핑만 하던 사고를 버리는 데 있다.
공유오피스든, 학습 공간이든, 공공 서비스든,
그 모든 가능성의 출발점은 하나다.


이 공간에서 사람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하도상가는 다시 도시의 중요한 층위로 복귀할 수 있다.


- 멘토 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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