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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maZ Aug 29. 2024

본질을 못보는 눈

혀나 끌끌 차지 말고 분노하라.

교인들 앞에서는 그처럼 신앙 좋은 사람이 없어 보이는데 실생활에서는 바닥인 사람들이 있다.  남들 앞에서 헌신적인 남편과 아내, 목회자, 장로, 집사처럼 보이지만 속에서는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들 말이다. 헌신과 친절과 신실이라는 가면을 쓰고 교묘하게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 이들이 직장에도 교회에도 가정에도 존재한다.

그들에게는 매우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다. 그 목적을 달성하고 취하기 위해서 뱀처럼 교묘하게 사람과 상황과 주변을 이용한다.


목회자의 불륜 혹은 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릴 때도 있고, 아들 목사에게 유산처럼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를 넘기는 아버지 목사 이야기도 자주 듣는 뉴스 중 하나다. 때로는 임직자 혹은 목사가 교회 헌금을 빼돌리고 도박을 하고 돈세탁을 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교회 돈 혹은 선교단체의 돈으로 목사 혹은 선교사 개인의 이름으로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매입하고 자식들에게 나눠줬던 일도 종종 듣는다. 게다가 몇 년 전에는 실세에서 밀려난 목사가 동료 목사에게 칼부림까지...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바닥인 이들의 이야기를 줄줄이 나열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흔해빠진 이야기가 돼버렸다.


이런 식상한 얘기는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반복되는 악행에 내성이라도 생긴 듯 악한 죄를 바라보는 이들은 냉소적인 태도로 혀를 쯧쯧 차며 나만 안 그러면 된다는 마음으로 돌아서버린다. 때로는 너무나 귀한 목회자고 성도고 사업 가고 정치가인지라 그럴 수 도 있다며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며 그들을 보호하려 드는 사람들도 있다.


목사님도 사람인데 그럴 수 있지~

선교사님을 오해한거야~ 그럴 사람이 아냐~

주의 종한테는 무조건 복종해야지!

그러니까 왜 부른다고 거길 가! 너가 먼저 마음이 있던거 아냐? 네가 먼저 유혹을 한거겠지!

돈을 빌려준 너가 바보지!

아냐~ 너가 오해한걸꺼야. 그럴리가 없어~


피해를 당하고 배신과 이용을 당한 이들을 향해 날 선 말을 뱉고 상처에 소금 후추 다 뿌린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가 30대 때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프레스코 그림을 그린 후 20년이 흘러 그가 50대가 되었을 때 교회는 그에게 최후의 심판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천장 그림의 시작은 천지창조에서 노아의 방주까지 이어져 죄악 된 세상을 물로 덮고 새로 시작한 시기를 그렸다면 천장과 맞닿는 벽은 우리 모두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마지막에 관한 그림이었다.   


그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정점에 달하는 시기였고 혼란의 시기였기에 수많은 이들은 이 시기에 정말 예수의 재림이 시작되리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종교개혁의 모습은 머리에 두건을 둘러매고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따위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난 사람들은 교회와 건물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신념과 엇갈린 길을 가는 모두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길에는 시체가 나뒹굴고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은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현실은 마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때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시기에 미켈란젤로가 그려낸 최후의 심판은 그저 상상이 아니라 정말 지옥 같은 현재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었다.


이런 위대한 작품에 꽤 재미있는 얘기가 있는데 저 벽화의 오른쪽 아래 한 남자의 모습이다. 뱀 한 마리가 벌거벗은 남자의 성기를 물고 있는 이는 사실 당시 성당에 속한 시세나 신부였다고 한다.

아앗! 실제 존재했던 사람이라고? 그것도 그 사람이 신부라니! 주의 종을 저렇게 민망한 모습을 빼박으로 그려넣다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미켈란젤로는 당시 이 그림을 그릴 때 사회를 향한 심란함이 가득했다.  평소 독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그가 혼란에 빠진 사회를 바라보며 느낀 두려움을 그대로 표현한 작품이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예수가 다시 재림했을 때 악한 이들은 지옥에 선한 이들은 천국에 갈 것임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삶이란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이어진다는 믿음을 보여준다.


당시 이렇게 심오한 작품을 심란한 마음으로 그리고 있을 때 시세나 신부는 종종 그의 작업을 보며 혀를 찼다고 한다.


어디 이 신성한 교회에 벌거벗은 여자 남자를 저렇게 그리는가? 저딴 그림은 목욕탕에나 어울리지 이렇게 신성한 교회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매번 올 때마다 혀를 찼던 시세나 신부를 참다 참다 폭발한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 사이드 코너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의 재판관 미노스의 모습으로 박아버린 것이다.  물론 당나귀 귀는 그가 얼마나 멍청한 인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그려 넣은 미켈란젤로 재치(?) 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미켈란젤로는 이리도 벌거벗은 여자 남자들을 그렸던 것일까?

사람은 태어날 때 맨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벗은 몸이 아니라 맨 몸.  태어난 모습 그대로 즉 하나님이 만든 내 모습 그대로 그분 앞에 나갈 것이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깊은 생각과 판단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벌거벗음은 오직 사람만 부끄러움을 느낄 뿐 예수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악행을 일삼은 것에 대한 분노가 더 크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인간들에 대한 분노.

남을 해하고 악한 행동으로 주변에 상처를 주고 재산을 빼앗고 생명을 빼앗은 악인들을 향한 분노.

이웃을 이용하고 등쳐먹고 비수를 꽂는 이들에 대한 분노.

사랑하지 않고 저주만 부었던 이들에 대한 분노.

이런 악한 죄에 분노하지 않고 오직 벌거벗은 사람들을 그려 넣는 미켈란젤로를 향해 저질스럽다고 한다.


크리스천은 어디에 언제 어떻게 분노해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의 대답을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에 우리의 마음도 아파야 하고 하나님이 분노해야 하는 일에 우리도 같이 함께 분노해야 하는 것이다.  혀나 쯧쯧 차면서 본질을 못 보는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그 깊이에 이르지 못하면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 앞에 너무 쪽팔려지는 거다. 시세나 신부의 눈높이 말고 미켈란젤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기도한다.


크리스찬으로서 제대로 믿고 쪽팔리게 행동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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