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한 줌의 친구만 있어도 괜찮은 나이다.
정말 오랜만에 친한 지인들과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계획한 건 올봄이었는데 네 가정이 모두 가능한 날짜는 가을이나 돼서야 가능했다. 각기 다 다른 일을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맞추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여행 가기 일주일 전 우리는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며 누가 무엇을 준비할 것인지 적어내려 갔다.
어른 8명
애들 8명
물티슈는 내가 엑스트라로 가져갈게
우리 집에서 가위랑 국자 준비할게
김이랑 스팸 내가 챙길게
우리는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알아서들 가져올 목록을 준비하고 누가 어디에서 장을 볼 것인가도 정했다.
역시 여행에는 컵라면이 빠질 수 없고 삼겹살과 차돌박이가 빠질 수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먹일 신선한 과일을 챙기는 일도 입이 심심할 때마다 넣어줘야 할 과자 목록도 꼼꼼히 적어내려 갔다.
완벽한 준비를 마친 뒤에 우린 금요일 퇴근 후 각자 차를 몰고 호수로 향했다.
밤늦게 도착한 별장에 호수는 보이지 않았지만, 먼저 도착한 나의 친구들은 테이블에 앉아서 우리 부부를 맞아준다. 맥주 한 캔 따고 치킨을 먹으면서 살겠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다음날 아이들은 호수 모래사장에서 두더지 마냥 한참 땅을 팠다. 땅 파는 게 질리면 놀이터에 놀다가 배가 고프다고 하면 후다닥 먹을 것을 입에 넣어줬다. 그러면 아이들은 다시 몰려 나가 흙을 만지고 무당벌레를 잡았다. 그 누구도 전화기를 달라고 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비디오 게임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시골에 사는 똥강아지들처럼 아이들은 흙에 가을 단풍에 뒹굴며 놀았다. 몇몇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을 돌아가며 돌보고 사진을 찍어주고 챙기면 나머지는 또 각자 시키지도 않은 식사 차리기 간식 챙기기 과일 씻기를 알아서 한다. 그러다가 식탁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도 너무 피곤하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낮잠도 잔다.
그중 한 가족이 노래방 마이크를 가져왔고 어른들은 평생 노래를 너무 부르고 싶었지만 부를 수 없던 서글픈 인생이라도 산 사람들처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목이 터져라 발라드를 부르다가 소녀시대가 나오다가 나중에는 Eminem의 랩을 하기 시작했다. 이건 마치 말도 안 되는 블랙코미디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다가 호수 뒤로 해가 뉘엿뉘엿 질 시간이 되자 다시 호수로 향했다.
붉은 태양이 호수 뒤로 슬금슬금 숨기 시작하더니 이내 쑥 하고 들어가 버린다. 시원한 바람이 불지만 춥진 않은 가을 저녁 우린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우린 또 매우 자연스럽게 각자 알아서들 자리를 잡아 함께 일을 해냈다.
고기 굽는 아빠 둘
모닥불 피고 옥수수 굽는 아빠 둘
햇반을 돌리는 엄마
김치찌개를 끓이고 담는 엄마
옆에서 설거지하는 엄마
그럼 밥이 담긴 접시에 반찬을 올려 식탁에 올리는 엄마
그럼 또 우린 저녁을 맛있게 먹는다. 애들은 밥을 먹자 우당탕탕 2층에 올라가 술래잡기를 하고 어른들은 설거지를 하고 옥수수를 먹고 또 수다를 떤다.
우린 이런 휴식이 얼마나 필요했던가?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떨던 우린 서로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위로를 건네고 파이팅을 건넸다.
20대 때는 전화기에 가득한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의 이름이 가득한 게 좋았다. 소셜 미디어에 내 친구가 몇백 명이나 되는 게 은근 자랑스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다 보니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이들만 찾게 되더라.
함께 있는 게 그냥 좋고 편한 사람들이 한 줌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에 나는 사람을 골라서 만나고 있다.
지금 딱 이 정도로도 나는 매우 충분함을 느낀다.
당신들의 사랑과 애정이 나를 매우 충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