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ine 육은주 Sep 25. 2022

대한민국 국제경영

III- 9,10,

골드만 삭스의 예정된 시나리오 


2010년대 초 필자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2050년경이면 한국이 미국의 뒤를 이어 G2가 된다"는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의 예측이 있었다. 그 보고서는 이미 2005년에 나온 것이었고, 한국 관련 공부를 하는 외국 학생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뿐 아니라 골드만 삭스는 2007년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이를 다시 확인했다. 다만 골드만 삭스의 예측은 한가지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 한국과 북한의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는 조건하에서이다. 그럴 때 한국의 기술력과 자본,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 지하자원 등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2010년대 당시만 해도 한류가 지금처럼 지속적 태풍은 아니었기 떄문에 '설마, 그럴 일이 일어날까' 하고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한류 부상의 기세가 심상치 않고, 예상외의 지속성과 강력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영미 언론의 밀어주기 또한 살짝 과도하면서 골드만 삭스의 오래된 예측은 단순한 경제 예측이 아니라 국제 경영세력의 오래된 계획이 아닐까 하는 필자만의 '매우 합리적이지 않은 의심'이 들기도 할 정도이다. 골드만 삭스는 단순한 투자은행이라기엔 너무나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세계 주요 국가들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에게는 국가 성장 발전 계획을 도맡아 짜주기도 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한반도를 한국 주도의 자유민주체제로 통일시켜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계획은 거의 이십년 전부터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  이미 최상의 장밋빛 시나리오는 오래 전부터 마련되어 있는데, 그걸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는가는 우리 대한민국 하기 나름이다. 

또 하나 포인트는 서울이 최근 국제 언론의 아시아 허브가 되는 중이라는 것이다. 2021년부터 뉴욕타임스 아시아 디지털 본부가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표면적으로는 홍콩의 언론관련 법제 변경, 한국의 자유로운 취재환경과 디지털 환경, 한류 등 문화전선의 확대 등을 꼽았지만, 뉴욕 타임스의 이같은 선택은 '서울이 앞으로 뉴스꺼리가 많~을 것'이며,  앞으로 그 어느 때보다 한국이 글로벌 뉴스의 프론트 생산 전선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에는 시사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글로벌 기업이나 국제기구 등이 아시아 허브로 삼기에는 제약이 많고 매력도가 떨어지는 나라다. 우선 북한 리스크가 있고, 외국기업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도 그닥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난 정권까지도 반기업 정서에다, 각종 제약, 규제, 최고율 세제 등으로 국적 불문하고 대기업을 두드려패왔다. 대기업 총수 중에 감옥 갔다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다. 반면 일본은 기업친화적 환경과 강한 외국인에게는 '바짝 수그리는' 국민성 덕분에 '엑스펫(글로벌기업의 파견직원)들의 천국'이라 불릴 정도로, 외국기업과 외국투자자들에게 선호받는다. 중국은 시장 크기에 대한 매력과 성장도 때문에 매력적인 허브투자처로 꼽혀왔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계 정세와 국제 뉴스에 특히나 강한 뉴욕 타임스가 이런 지정학적, 국민 감성적 리스크가 상존하는 서울을 택했다는 것은 '무언가 확실한 소스를 갖고 허브를 이전한 것은 아닐까' 하는 또 한번의 필자만의 비합리적인 의심을 들게 한다.


원치 않은 지도국


골드만 삭스의 미래 예측이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은 가까운 시일 내에 지도국, 선도국 위치를 점하게 된다. 이것은 필자의 무슨 장밋빛 예언이 아니다. 사실 선도국, 지도국 위치가 겉보기처럼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국내 통합 문제, 북한과의 통일 문제 등으로도 할 일이 너무 많아 선도국 위치까지 하려면 짜증이 나지만, 적어도 아시아에서의 지도국은 우리가 하고 싶다고,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다. 가치의 우월성과 정치 경제적 급격한 발전상, 한류의 문화 제패까지 대한민국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밖에 할 사람이 없다. 이것은 미국의 2차대전 후의 상황과 같다. 미국인들이 세계 패권을 원했다기보다 세계가 미국을 원한 것이다. 2차대전 직전까지도 미국의 주요 외교전략은 고립주의였다.

미국과 한국은 겉보기엔 전혀 역사적 공통점이 없고, 손발도 안 맞는 것 같아도-일례로 미국 정치권과 한국이 이념적 보조를 맞춘 적이 거의 없다. 박자가 맞은 적이 없다. 미국이 민주당이면 우리는 보수 정권이 들어서고, 우리가 진보일 때 미국은 공교롭게 공화당 정권이다. 이런 것을 보면 궁합이 지독히도 안 맞는 부부 관계 같기도 하지만- 사실 근본 성향, 기본 가치를 두고 따져보면, 미국과 한국은 잘 맞는 관계다. 두 나라 모두 완벽한 이념국가들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한국은 다른 어느 나라들보다도 이념과 가치에 신경 쓰는 근본주의자들이다. 우리나라 주류 기독교는 청교도에 기반한 미국 교회조차 혀를 내두르는 '근본주의'이고,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국민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특이한- 거의 유일이라 해도 좋을- 아시아 국가이다. 

반면 일본, 중국은 서로 다른 의미와 방향으로 실용주의자들이다. 중국은 이념국가가 아니다. 공산주의 이념 국가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뼛속까지 철저한 실리주의자들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국민 지배와 통치를 위해 강력한 공산 체제를 유지하면서 경제 발전만은 자본주의 이식이 가능한 이들이다. 

일본은 공기를 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민한 실리주의자들이다. 그 때문에 약삭빠른 여우같은 이미지를 주지만, 국제화, 산업화 초기부터 전략적으로 국가경영을 잘 해온 것-물론 이는 일본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관점에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민족 세계경영 역사


한민족 세계경영의 경험의 역사는 고려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완전히 단절되었다. 통일 신라,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세계 역사에 존재감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신라가 당, 왜, 천축국 등은 물론 아라비아, 멀리 로마와도 교류하고 맥이 닿을 정도로 세계 경영 스케일이 컸던 데에도 이유가 있다. 이러한 세계경영은 고려 때도 활발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의 영문 국호 '코리아'가 이를 방증한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은 이런 세계 경영과는 완벽 단절. 오로지 중국의 한 변방으로서만 기능했고, 활동 무대를 동북아시아로만 극히 한정지었다. 역동성을 버리고 안정을 택했으나 그 안정은 고루함과 폐쇄로 일관, 패망의 길로 이르렀다. 

필자는 삼성 그룹 계열사 CEO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몇년간 일한 적이 있다. 당시 삼성 CEO는 경영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분이셨는데, 그분이 오랜 경험과 경영철학에서 내린 리더십 정의에 따르면, '리더십이란 누가 보아도 좋은 일을 ,누구보다 먼저 하자고 할 때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이것보다 명료하고 쉽고 단순하게 리더십의 근원을 설명한 통찰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필자가 감히 하나 더 보태고 싶다면 "할 수 있는 자" 라는, 리더십 주체의 역량을 강조하는 말이다. 

누가 봐도 좋은 일을 먼저 하자고 제안하는 자가 그것을 수행할 만한 총체적 능력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그 리더십은 잠시 관심을 끌 수 있을 지언정, 진정한 추진력은 갖지 못한다. 

일례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란 나라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고, 미국에게 일본의 군사적 야욕을 경고할 수 있을 정도의 국제 정세를 읽는 감각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미국인들보다 우월한 언어적 능력과 지성으로 미국 정가를 이용하여 동맹전략을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외교적으로 능력있는 리더였다.  다만 대한민국이란 신생국가의 총체적 실력- 이기붕 등 수하들의 권력 발호와 각종 선거 스캔들 등등-이 처참할 정도로 부족했기 때문에 한계에 부닥친 리더였다. 


못다한 노무현의 꿈


또 다른 예로 노무현 대통령은 넘치는 의욕에 비해 실력이 부족해 야심차게 천명한 '동북아 균형자'라는 외교전략에 대해 주변국의 비웃음만 샀다. '불가능하다, 미국이 이미 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 는 반응을 들었지만, 사실 대한민국이 국제무대에서 주체적으로 무언가 역할을 해보겠다고 거의 처음으로 나선 것이었다. 

최근까지 우리나라는 국제 무대에서 우리나라의 리더십을 중간 사이즈 정도의 영토에, 대국들 사이에서 문화적으로 일정 정도의 역할을 하는 정도의 '중견국'이라는 포지션을 취해왔다. 현실적이지만 아쉬움과 한계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동북아시아 역내에서 정치적 리더십을 가질 역량이 있고,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과 일본을 리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만 우리가 바라는 통일에도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의 안보 측면이나 역내에서의 조정자 역할 상당부분을 미국이 담당하고 있고, 우리는 미국과 공조를 펼쳐왔지만, 국제관계에서 영원은 없다. 영원히 미국에 기댈수만은 없다. 

우리 스스로가 국제 경영 자신감과 역량을 키워야 한다.  이루지 못한 노무현의 꿈을 이제는 도전해볼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가 지정학적, 문화적으로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정치적 역량까지 확대해나간다면 정치적으로도 균형자 역할에서 나아가 아시아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까지 할 수 있다고 본다. 

지도력, 리더십 역량은 나라의 크기보다는 나라가 가진 총체적 실력 더하기 무형적 밸류의 크기에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우리나라가 가진 밸류가 중국과 일본을 앞서야 한다는 전제에서이다. 그것은 각 부분의 실력에 더해 앞으로 우리의 정치발전 정도, 우리의 시스템과 컬처 혁신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대한민국이 지난날의 경제 성공신화에서만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각 부문에서 혁신 신화를 쓸 수 있을 때 우리의 혁신 신화는 주변국을 압도할 만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러면 무형적 자산, 즉 주변국의 존경 (respect) 얻게 되고 이것이 국가 리더십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전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가진 나라, 또 이를 문화의 형태로 잘 커뮤니케이션 하는 나라, 누가 보아도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하자고 하는, 실력있는 나라가 바로 리더십 있는 나라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충분히 지향할만하고, 지향해야만 하는 목표라고 생각한다. 


건국이념을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 국제 지도력을 얻기 직전의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와 그 이후 드러난 대한민국의 새로운 차원의 국제 리더십이 그 증거이다. 물론 그 리더십은 국민의 희생과 공동체정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극강의 배려의 정신이 바탕에 깔려있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 만이 가능한 것이다. 

홍익인간의 정신을 바탕에 둔 인류애라는 보편가치에 정보화 실력, 생명과학분야에서의 실력, Bio 산업 인프라와 인재역량이 골고루 갖추어진, 이 모든 것이 호조건으로 들어맞아 어우러졌을 때 나오는 코로나 극복 리더십이다.  

중국은 이념이 없는 철저한 실리국가라서 리더십이 생기지 않고, 일본은 영민한 전략가이긴 한데,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스케일이 너무 작다. 쉽게 말하면, '너무 지밖에 몰라서' 리더가 되지 못한다. 국가 설립의 근본 이념, 원리주의자에다 국제 공동체 정신이 고대 국가 성립이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한국인이 동북아시아에서 리더로서 자질이 있다. 

다만 국가 사이즈가 문제인데 이걸 상쇄할 기회는 곧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이 국토와 인구수에서 덩치를 불릴 통일의 기회 말이다. 통일 문제는 남북한 둘만의 문제라기 보다 국제적 역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코로나 직전까지 통일 역학 국제 정세가 우리에게 유리한 기회로 무르익었는데, 코로나라는 의외의 복병이 출현하면서 지연되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지난한 노력 끝에 세계에 유례없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고, 민주적 정권교체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었다. 우리가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 권위주의적 관습을 끝내고, 감성보다는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두고, 최소한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꾀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유일한 나라로 자리매김하고, 정경유착과 과도한 규제의 고리를 끊고 경제에 새로운 날개를 달아주고, 우리 내부에서의 치열한 가치 대결이 소모적인 정쟁이 아니라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나가게 될 때, 대한민국이 희망과 도전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남북한 이념대결, 가치 대결의 장에서 그 동안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 통일의 명분 싸움에서 승기를 쥐게 된다.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에게 리스펙트를 얻고 나라 사이즈에 관계없이 주변을 선도할 기회, 리더십을 갖게 된다. 

결론은 우리는 앞으로 선도적 위치에서 전략적 세계경영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민족의 리더십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 높은 차원의 것이어야 하고, 그러할 것이라고 예측된다. 홍익인간이라는 고차원의 밸류를 고대시대부터 가졌기 때문이고, 거기에 덧붙여 그걸 구현해낼 수 있는 실력과 능력까지 갖추어가고 있다. 

우리는 기나긴 역사 동안 극도의 자국 이기주의를 통치이념, 국가 이념으로 가진 이웃들 속에서 이타주의라는 고귀한 이념을 지닌 채 부대끼며 살아왔다. 홍익인간을 다시 보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는 건국 이념은 현재 우리 대한민국의 처지- 민족 분단을 7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고, 선조들이 물려준 영토도 제대로 통합하지 못한- 에 비추어 너무나 과분한, 너그러운 대제국이나 가질 법한 이념이다. 

이런 이념은 미국같은 지구 최강 강대국이나 가질 법한 이념이다. 실제로 미국은 경제 문화 최전성기에 너그럽기 그지없는 정책들을 펼쳤다. 한때 미국은 전세계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의 종착지로 아무 기술없고, 복잡한 서류 없이도 그저 이름 석자만 댈 줄 알면 간단히 이민절차가 끝나고, '웰컴 투 아메리카'란 희망송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은 경제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국가들에게 각종 인적 물적 원조들을 아낌없이 펼쳤다. 2차대전후 유럽을 살린 복구 플랜 마샬 플랜이 그렇고, 공산화를 막기 위해 한국전에 참전해 피를 흘린 것이 그렇다. 그런 제국에나 어울리는 거대한 이념을 우리가 갖고 있고, 그것을 이상으로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한때 역사 이전, 고대 시기 잘 나가던 대제국의 시기가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제국의 이상주의는 실질적 힘을 잃어버리면 오히려 현실 걸림돌이 된다. 우리가 이타주의라는 차원 높고 큰 밸류를 가졌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극강의 이기주의로 무장한 이웃들 틈에서 그 고생을 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너그러웠던 아련한 제국의 기상과 기억을 회복하고, 선하고 강한 것을 추구하며 신바람나게 놀아보면 된다.  지금까지 남이 깔아준 멍석에서 놀기만 했다면, 이제는 놀 멍석까지 우리가 깔 때 전정한 지도력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다. //





작가의 이전글 한류 가치 커뮤니케이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